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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06화 (89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6화 >

    "죽어서도 이승을 떠도는 불쌍한 자의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을 일깨워라. 그리고 그 쌓이고 쌓여버린 사념을 궁극의 그릇에 담아 욕망을 충족시켜라. 그리하면 길은 열릴 것이다."

    문양이 큰 만큼 이것 말고도 다른 말도 주저리주저리 많이 쓰여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문단은 바로 지금 내가 중얼거린 저 부분이었다.

    다른 부분은 5.5계층에서 봤던 여신님 말투 그대로 쓰여있는데 딱 저 부분만 뭔가 근엄한 말투로 쓰여있는 것에 엄청나게 태클을 걸고 싶어졌지만, 나는 일단 참기로 했다.

    지금은 그게 아니더라도 태클 걸 부분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저 말을 풀이해보자면 이런 거잖아?

    죽어서도 이승을 떠도는 불쌍한 자는 이 6계층에 있는 언데드, 복수를 지칭하지 않고 불쌍한 자라고 딱 한 명만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계층의 주인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 계층의 주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건, 뭐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성욕이겠지.

    수면욕이라든가 식욕이라든가 해골 모습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은 많이 있겠지만, 여신님의 사상을 생각해보면 성욕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성욕을 부추긴 다음,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욕을 궁극의 형태에 담아서 충족시켜라라는 문맥.

    성욕을 충족하기 위한 그릇이라면,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애초에 위에서부터 성기가 열쇠였고 그걸 특정 구멍에 꽂아서 문을 여는 구조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욕망을 충족 어쩌고 하는 부분까지 합쳐서 생각해봐도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즉, 언데드의 성욕을 성기에 담아서 어딘가에 꽂으면 되는 거다.

    문제는 굳이 그릇이라는 표현 앞에 궁극의 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점이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아니. 그렇잖아?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궁극의 그릇. 다시 말해 궁극의 남성기라고 하면, 내 아들밖에 떠오르지 않잖아?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내 중얼거림을 들었을 때부터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 다리 사이로 쏠려 있었다.

    아니.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열한 명의 미녀가 그렇게 제 다리 사이만 뚫어지게 바라보시면······.

    "뭘 꿈틀대는 거야, 이 바보야!"

    "아야! 아니. 궁극의 그릇이 뭔지 다들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려고······."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다들 보고 있는데! 읏! 당신들은 그만 보지 못해요?! 남의 남자 걸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에요?!"

    가죽 갑옷 아래에서도 다 숨겨지지 않는 용솟음을 보고 제일 먼저 태클을 걸어준 건 다름 아닌 사라였다.

    내 너스레에도 착실하게 대꾸를 해준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모두가 내 다리 사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모양이다.

    내 고간 앞을 자신의 손으로 가려주고 아라크네의 간부들을 쏘아붙이는 사라였지만, 아무리 우리 용사님의 으름장이라고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쟤들한테까지 통하지는 않았다.

    "하핫. 든든한 애인을 뒀네."

    그 든든한 사람이 네 이복 언니다 이것아.

    뭘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고 있는 거야. 내 고간도 제일 먼저 쳐다보기 시작했던 녀석이.

    "아무튼 그런 거야. 우리는 먼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는 거지. 이제 우리를 믿어주겠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엘은 계속해서 시원스런 미소와 함께 그런 말을 해왔다.

    "그래. 괜히 의심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미리엘에게 이렇게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심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있어야 6계층 아래로 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차라리 얘들끼리도 6계층 아래로 가는 게 가능했고, 그런 상태에서도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면 의심의 여지가 줄어들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얘들의 목적이 진짜로 우리가 생각했던 마신과 관련된 그런 거라면, 우리가 무조건 이 아래로 먼저 갈 수 있게 됐는데도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그야 그렇잖아? 얘들은 우리가 여신님한테 사명을 받고 마신의 잔재를 없애려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먼저 내려간다는 건, 바꿔 말하자면 자신들의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내색을 전혀 안 할 수 있겠어.

    설마하니 이렇게 안심시켜놓고 날 납치해서 자기들이 먼저 가거나 하려는 것도 아닐 테고.

    ······진짜 그러려는 건 아니지?

    "아니. 괜찮아.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을 위해서니까. 불안요소가 있으면 최대한 의심하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겠지. 이 녀석은 이런 말까지 하는 녀석이니까.

    이렇게 보면 또 별다른 꿍꿍이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아오. 헷갈려.

    "이해해줘서 고맙다."

    아무튼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일단 여기서 하룻밤을 쉬기로 했다.

    딱히 우리가 같이 행동할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일단 협력 관계인 두 클랜이 만난데다가 두 파티가 다 위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따로 행동하는 것도 부자연스럽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발을 디뎌보는 6계층을 끝까지 뚫고 온다는 강행군으로 지쳐있었고, 저 녀석들도 저 녀석들대로 5.5계층을 꼼꼼히 답파하고서 마지막에 그곳의 문양을 발견한 다음 6계층을 다 뚫고 온 거니까 지친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길 뚫고 올 생각을 하다니."

    그런 이유로 다 같이 식사를 하게 된 자리에서, 앨리시아는 우릴 쳐다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만큼은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지고 싶지 않은데.

    난 아직도 네가 검을 땅에 박아서 4계층의 해류를 돌파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정말로. 보기보다 훨씬 더 터프하네? 역시 전에 한번 먹어둘 걸 그랬나?"

    그리고 루티아 누님. 저 말을 그렇게 받아버리면 어떻게 해요?

    애초에 먹기는 대체 뭘 먹어둔다는 겁니까? 전 먹는 게 아니라고요.

    아니. 그보다 앨리시아가 절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안 이후로는 그런 장난 안 치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요?

    전에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도 해주셨잖아요.

    "구, 구원님께 그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실비아가 내 앞에서 두 팔을 쫙 펼치고 루티아에게서 날 필사적으로 지켜내려고 했지만, 루티아는 오히려 그런 실비아에게까지 눈독을 들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누님. 다른 간부들하고도 육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지.

    실비아야. 조심해라. 그러다가 너부터 잡아먹히겠다.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잖아? 전부터 거북이굴을 뚫을 능력은 있는 파티였고, 거북이를 뚫을 수 있으면 그 아래의 몬스터들을 뚫기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겠지. 속력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이야. 몬스터의 상대법은 대마법사님이 알고 계실 테고, 저쪽은 성자의 스킬로 어그로 관리도 수월할 테니까."

    그리고 그런 루티아의 태도가 마치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리엘은 시원스런 목소리로 날 대신해서 앨리시아에게 그런 말을 해줬다.

    그 말을 들은 앨리시아는 "그런 건가······." 라는 중얼거림과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나는 또 그 말을 그냥 단순히 넘길 수가 없었다.

    미리엘 저 녀석, 마치 내 성자 스킬이 6계층의 몬스터에게 통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고 너희가 올 줄 알았으면 계층의 주인과 먼저 싸우지 않았을 텐데. 조금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아쉽게 됐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그 문구를 봤잖아? 욕망을 일깨우라는 문구. 성자님의 스킬을 계층의 주인에게 사용한 다음에 전투에서 이기라는 말 아니겠어? 성기를 얻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뭔가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물건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혹시 성자님의 해석은 조금 달랐어?"

    "아니. 똑같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성자 스킬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뭔가 새로운 아이템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게, 해골한테서 성기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또 타이밍이 묘하네.

    미리엘이 6계층 몬스터에게 성자 스킬이 통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에 내가 의구심을 품자마자, 마치 그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저런 말을 하다니.

    그냥 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저 문양 말이야. 넌 대체 어떻게 읽을 수 있는 거야? 봤으니 알겠지만 나 같이 여신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만 읽을 수 있게 해놓은 글인데."

    "아, 그건가. 간단해. 내 핏줄에는 약간이지만 이방인의 피도 흐르고 있거든. 운이 좋게도 그 능력을 조금은 이어받은 모양이야."

    하지만 내 심문하는 것 같은 질문에도, 미리엘은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는 듯 시원스럽게 대답해줬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나를 다시 혼란에 빠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짧은 문장에 내포되어있는 뜻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잠깐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세계에 왔던 이방인들은 모두 나와 같은 사명을 부여받고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거야?

    확실히 5.5계층의 문양이나 여기의 문양에 쓰인 글을 읽어보면, 나 말고도 사명을 받고 온 사람들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게다가 그렇게 되면, 미리엘이 던전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 버리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라와 미리엘의 아빠, 그러니까 마신과 뭔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용사 사우론 쪽 커넥션을 통해 미리엘이 던전의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와는 정반대되는 루트. 그러니까 여신님의 사명을 부여받은 이방인 쪽 커넥션으로 던전의 정보를 알았다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얘기다.

    그리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미리엘은 마신 부활 같은 허무맹랑한 얘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우리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마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게 된다.

    아니. 하지만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우리한테 사실대로 얘기했으면 끝났을 얘기고······으아아아! 복잡해! 디아나! 거기서 쌍둥이들한테 진땀 빼고 있지 말고 나 좀 도와줘!

    애초에 이놈의 아우덴이라는 집안은 대체 뭐하는 녀석들이야!

    마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의 힘을 가지고 있지를 않나!

    그러면서 이제는 또 여신님에게서 사명을 부여받은 이방인의 능력마저 갖추고 있으시다?!

    지금 나랑 장난해?!

    진짜 사람 머리 복잡하게 만드는 가문이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우리 예쁜 사라를 낳아주신 것은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그걸 빼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집안이야!

    "너무 그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곤란한데.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성자님과 같은, 그런 사람의 성감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은 없어."

    "야. 구원."

    "무, 넌 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런 걸 기대하는 눈으로 널 쳐다봤다고! 아니야! 아니야, 사라야! 아니야, 얘들아! 나 그런 거 하나도 기대 안 했어!"

    "하핫. 성자님. 그렇게 당황하면 괜히 더 수상해 보이게 돼."

    "나도 아니까 넌 좀 조용히 해!"

    뭘 시원스런 말투랑 시원스런 표정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하는 건데?!

    "······나한테 그런 말투를 쓰는 남자가 있다니. 루티아 말대로 성자님은 보기보다······."

    "그러니까 넌 내가 조용히 하라는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진심으로 슬슬 우리 애들의 시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주세요!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그러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아라크네의 간부들까지 껴서, 우리는 떠들썩하게 식사를 마쳤다.

    뭔가 중요한 얘기도 많이 오간 것 같았지만, 결국 중간부터는 오해를 푸는데 필사적이 되어서 그에 관한 생각을 할 틈이 전혀 없었다.

    미리엘 저 녀석, 어린 나이에 거대 클랜의 클랜장을 맡는 이유를 알겠어.

    마냥 시원스럽기만 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저런 두뇌 플레이를 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이 구원, 중요한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남자라고.

    잠을 자기 위해 각자 파티 별로 갈라져서 각자의 텐트에 들어온 다음, 나는 곧바로 아까 했던 생각들을 정리하여 다른 애들에게 얘기해줬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6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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