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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05화 (88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5화 >

    그런 고집 때문에라도 기세 좋게 6계층으로 쳐들어갔던 우리였지만, 역시나 6계층의 전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디아나는 5계층 몬스터와 그다지 전투력 차이가 없다고 했지만, 아니. 상대해본 느낌으로는 확실히 전투력 차이는 그다지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6계층은 6계층이라는 듯 상대하기 까다로운 점은 있었다.

    "그어어어······."

    일단 이 언데드놈들은, 데미지를 입어도 아무런 반응 없이 멀쩡하게 공격을 해온다는 점이 짜증 났다.

    팔이 부러져도, 다리가 부러져도, 보통 몬스터라면 움직임을 멈추거나 몸을 움츠릴 데미지를 입어도 녀석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공격을 해왔다.

    게다가 당연한 얘기지만 이 언데드놈들은 성감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성자 스킬이 통하지 않는 적들이었다.

    모든 공격에 성자의 손길을 섞어서 상대의 빈틈을 만들며 싸워왔던 내게 이보다 까다로운 적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내 성자 스킬이 봉인 당한 건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자 스킬이 봉인됐다는 건 최고의 어그로 스킬이 봉인됐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이 녀석들은 마치 병사들이 소대를 꾸려 다니는 것처럼 무리지어서 몰려다니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였다.

    대형 몬스터가 한두 마리씩 돌아다니던 5계층보다는, 5계층 녀석들보다는 덩치가 작은 대신 무리지어 다니던 5.5계층의 머슬맨들을 상대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머슬맨들이나 이 언데드들이나 인간형이라는 공통점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우리는 실비아가 앞에 나서서 탱커를,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적을 휘젓는 역할을, 그리고 뒤에서 후위진이 공격과 보조를 해주는 전법으로 언데드들을 상대해나갔다.

    그나마 케르베로스가 후위진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실비아가 앞에 나서서 메인 탱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아, 그리고 이 언데드놈들은 일단 제대로 무기를 쥐고 공격해왔기 때문에, 평생 인간을 상대하는 수련을 해왔던 실비아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비아 혼자서 몰려드는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감이 없잖아 있어서, 전투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일단 멈춰 서서 실비아의 상처를 치료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시간이 지체될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러고 있을 때에도 아라크네 간부 파티는 6계층의 보스 방에 다가가고 있을 테니까.

    아예 늦어버렸다면 모를까, 아슬아슬하게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안달이 났다.

    길을 알고 곧장 5.5계층을 돌파했던 우리와 달리, 아라크네 클랜은 혹시 있을지 모를 6.5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찾아보면서 5.5계층을 돌파했을 테니까.

    거북이굴을 조사할 때도 벽이라는 벽을 모조리 두드려보면서 조사했다는 아라크네 클랜이니, 5.5계층의 전역을 조사하는 것도 상당히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리고 걔들이 내게서 거북이 성기를 얻고 곧장 5.5계층으로 출발해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면, 정말로 우리보다 조금 먼저 5.5계층의 보스 방에 도착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달 난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런 내색을 하면, 아니. 하지 않더라도 이 성실하고 착해 빠진 기사님은 무리를 하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것도 자기 때문에 시간이 지연되는 게 죄송스럽다는 표정까지 지으면서.

    "절대 안 돼."

    "우······하, 하지만······."

    "안 돼."

    "네에······."

    그래서 나는 초조함을 최대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면서 실비아의 치료를 가만히 기다렸다.

    안 그래도 실비아가 전투 때마다 이렇게 부상을 입는 게 안쓰럽고 미안해 죽겠는데, 그런 실비아가 저런 미안한 표정까지 짓게 할 수는 없잖아?

    젠장. 언데드 녀석들한테 성자 스킬만 먹혔어도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그 녀석들은 성감대가 없어서 우리 실비아를 이렇게 힘들게······아니. 잠깐만.

    성감대가 없어?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치료를 받고 있는 실비아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이거 어쩌면.

    다음 전투에서, 나는 곧바로 아까 했던 생각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으으윽······."

    내가 성자의 손길을 두르고 공격한 순간, 언데드는 확실히 뼈만 남은 허벅지를 안쪽으로 오므렸다. 텅 빈 다리 사이에 뭔가가 달려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으하하핫! 역시나! 역시나 그런 거였어!"

    이 녀석들은, 사람의 모양을 한 언데드들이다.

    그 말은 즉 생전에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고,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성감이나 성욕 따위를 모르는 골렘과는 다르다는 얘기가 된다.

    몸에 성감대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뿐, 그 정신 한구석에는 성욕을 갈구하는 생물의 본능이 확실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런 상대라면, 설령 성감대가 없더라도 내 성자 스킬이 통한다는 얘기였다.

    "괜히 지레짐작하고는 안 썼잖아! 니들 이제 다 죽었어!"

    나는 우리 실비아를 괴롭히는 사악한 해골 놈들에게 사정없이 성자의 파동을 날려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하셨어요!"

    "죄송합니다······."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후, 이번에는 내가 레이아에게 치료를 받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아니. 내가 아무리 그림자 이동을 쓸 수 있어도, 인해전술에는 당해낼 수 없겠더라고.

    "하지만 언데드에게 자네의 스킬이 통할 줄이야······. 이제는 조금 두렵기까지 하구먼."

    지금까지 계속 6계층에서는 내 스킬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왔던 디아나인 만큼, 이번 일은 상당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후하핫. 괜히 여신님이 주신 스킬이겠어?"

    "웃을 때가 아닐세. 자네에게 부여한 사명이 그런 능력을 갖춰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으니 말일세."

    뭐,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이제 우리는 본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리가 본실력을 다 발휘하면, 6계층의 언데들 따위는 그냥 공격패턴이 조금 더 다채로운 머슬맨이나 마찬가지인 없는 놈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러운 걸 덜렁이며 오지 않는 만큼 상대하기 편한 구석마저 있었다.

    "아무튼 가자! 이대로 속력을 내면 분명 그 녀석들도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다행히도 길은 디아나가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2계층에 막 진입했을 때는 자신은 맵퍼가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길을 제대로 못 찾는 모습도 보여줬던 디아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2계층과 6계층은 사정이 다르니까.

    디아나 실력에 2계층은 금방 지나가서 별다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을 거고, 반면 6계층은 던전 탐사를 포기하기 직전까지 꾸준히 다니면서 제일 꼼꼼하게 조사했을 테니까.

    아무리 맵퍼가 아니라도, 계층의 주인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라크네 클랜 추적에 속력을 붙이게 된 우리는 서둘러 계층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점점 아래로 가면 갈수록 몬스터와 만나는 빈도가 줄어들어 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던전이라는 곳은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몬스터의 전투력도 강해지고, 만나는 빈도수도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몬스터와 만나는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누군가가 몬스터를 정리하고 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을 돌아다니는 모험가의 수 역시도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6계층은 편하게 오갈 수 있는 마을조차 없는데다가, 5계층의 몬스터와 전투력 차이가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얻을 수 있는 마석의 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던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던전에 오는 녀석들이 아니고서야, 굳이 올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확신을 하면서 계층의 주인이 있는 방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역시나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 막 계층의 주인과의 전투가 끝난 건지, 다들 조금 지친 느낌으로 드랍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었다.

    "응? 너희들······어떻게······."

    그리고 우리의 접근을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다름 아닌 앨리시아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앨리시아를 무시하고, 제일 먼저 미리엘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펴봤다.

    미리엘은 다른 파티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침 보스 방의 모든 벽면이 한눈에 들어올 만한 위치에 서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살짝 늦어버린 건가.

    "······여. 왔어?"

    그렇게 우리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미리엘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었다.

    뭔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내뿜으면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미리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시선 처리도 뭔가 이상했다.

    언제나 당당하게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대화하던 미리엘이, 지금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어딜 보는 거죠?!"

    미리엘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었는지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바로 사라였다.

    사라는 한 손을 쫙 펴서 내 다리 사이를 가리듯이 뻗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아니. 실은 나도 긴가민가하기는 했지만, 쟤 진짜로 내 거길 본 거였어?

    "아, 음. 미안."

    하지만 우리 용사님의 사나운 모습에 기죽는 모습도 없이, 그리고 별로 미안한 것 같지도 않은 표정으로, 미리엘은 가볍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살짝 시선을 돌려서, 자기 파티원들에게 눈짓하기까지.

    어느샌가 아라크네의 간부진들은 주변정리를 끝내고 미리엘의 곁으로 모여 있어서, 마침 우리 파티와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하는 모양새가 됐다.

    젠장. 이거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거 완전히 이 다음에 쟤들이랑 싸우는 분위기잖아.

    "그래서, 너희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그걸 피부로 느끼면서도, 나는 일단 원만한 해결을 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쓸데없이 떠보는 것 같은 말투는 그만두지. 여기까지 급하게 따라온 거니까, 너희들도 짐작 가는 게 있는 거 아니야?"

    내 예상대로, 미리엘의 태도는 상당히 삐딱했다.

    언뜻 보면 평소처럼 시원시원한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때까지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았다.

    "그 문양의 비밀을 알아낸 거군."

    "역시. 그렇게 말한다는 건, 너희도 알고 있었다는 거네. 그래. 맞아. 지금 막 여기서 읽고 있었어."

    이제 더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미리엘은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대충 말하는 걸 보니, 역시나 이곳의 문양은 6계층 아래로 내려가는 힌트를 써놓은 문양이었던 모양이다.

    "6계층 아래로는 우리가 먼저 가기로 약속했을 텐데?"

    "그랬지. 하지만 그 직전까지는 우리 자유잖아?"

    ······전에는 무협지 주인공처럼 시원시원하다고 생각했던 미리엘의 태도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쟤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 그랬다.

    "그럼······."

    나는 계속해서 미리엘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미리엘은 내 말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은 지킬 거야. 6계층 아래로 내려가는 건 너희가 먼저. 그렇지? 그러면 너희도 와서 이 문양을 읽어 봐."

    "으, 응?"

    아니. 잠깐만. 뭐라고?

    "응? 왜 그렇게 놀라? 너희도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을 텐데, 안 볼 거야?"

    놀라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미리엘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렇게 말해왔다.

    잠깐만. 나 지금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진짜로? 그냥 이대로 화기애애하게 상황 종료하고 끝이라고?

    "아니. 보기야 볼 거지만······우리가 먼저 가도 된다고?"

    "물론. 그런 약속이었잖아. 설마 내가 약속을 깰 거라고 생각한 거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

    그게 아니면 지금 이 분위기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네 동료들은 왜 우리랑 대치하고 있었던 거고?!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넌 평소처럼 시원시원한 태도였지만!

    너희 파티원들도 그냥 주변 정리가 끝나서 파티장 곁으로 모인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그럼 내가 너희랑 어떻게 싸울지 고민했던 것도 헛수고였다고?!

    여차하면 성역 선포로 우리 애들이랑 너희 전부를 내 성자 스킬에 말려들게 해서 발정시킬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너 엄청 급한 거 아니었어? 우리 지금 당장 이 아래로 내려가거나 하지 않을 건데?"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든 나는 그런 말로 미리엘을 떠보기까지 했지만, 이 무협지 주인공감은 여전히 시원스런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물론 강해지고 싶다는 비원은 지금 당장에라도 이루고 싶지만, 약속을 깨면서까지 서두를 생각은 없어."

    "······그럼 나도 본다? 진짜로 본다?"

    "그래. 여기에서 보면 보일 거야."

    미리엘은 친절하게도 한발 옆으로 물러나서 내게 문양이 잘 보이는 위치를 양보까지 해줬고, 나는 혹여나 기습이라도 당할까 봐 언제든 그림자 이동을 쓸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미리엘은 그런 치사한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았고, 나는 6계층의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됐다.

    ······이 녀석. 아까 내 거시기부터 쳐다봤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냐.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5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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