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4화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앞은 지옥이었다.
그래도 더러운 사내새끼들이랑 같이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더러운 거 세우고 내 여자한테 다가가지 마 새끼들아!"
그래. 홀딱 벗고 거시기를 세우면서 포징을 취하는 게 패시브인 이 녀석들이, 우리 애들한테 다가오는 꼴을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내새끼들이랑 다닐 때는 그런 점은 신경 안 써도 괜찮았는데.
"으아아아! 다가오지 마! 아니 그렇다고 우리 애들한테도 가지 마! 그럴 바에는 나한테······으악! 내 눈! 포징 취하지 마! 혼란을 틈타 껴안으려고 하지 마!"
그 때문에 나는 머슬맨들이 보이는 족족 성자 스킬을 날릴 수밖에 없었고, 모든 어그로를 한몸에 끌며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녀석들은 공격 패턴이 비교적 단순해서, 사서 고생한다는 느낌도 살짝 들지 않는 것도 아니기는 했지만······아, 아니야! 그래도 우리 애들한테 더러운 놈들이 접근 못 하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그렇게 싫으면 실비아양과 적당히 나눠서 막는 게 어떤가?"
설령 우리 애들이 이 머슬맨들을 보고 별다른 리액션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다른 몬스터들 상대하는 것하고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가 있지?
내가 이상한 거야? 그런 거야?
"그럴 수 없어! 우리 귀여운 실비아한테······으악! 지금 살짝 살갗에 닿았어! 기분 더러!"
뭐 그래도 전부 내가 부담하기는 할 거지만 말이야!
이 녀석들하고는 내가 제일 상성이 좋기도 하고.
······잠깐만. 뭔가 표현이 이상한데.
말해두지만, 이상한 의미로 상성이 좋다는 게 아니니까!
이 녀석들은 잡기 기술로 공격해오니까, 나는 잡히더라도 데미지를 입기 전에 그림자 이동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 나는 파티에서 홀로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후우······.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지만 내가 그렇게 모든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면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니, 사냥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내 정신력이 바닥나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 정신력을 보충해줄 오아시스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아라크네 녀석들 안 보이네."
"우으으으읏!"
무릎 위에 실비아를 앉히고 얼굴은 옆에 앉은 레이아의 가슴에 파묻는 것으로 바닥난 정신력을 고속으로 충전하면서, 나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참고로 실비아는 지금 완전히 긴장이 풀려서 내 몸에서 실비아 테라피를 최대치로 발동해주고 있었다.
"······그러네. 딱히 비명 같은 것도 안 들리고. 혈흔 같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사라는 그런 내게 무진장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태클 없이 내 말에 대답해줬다.
내가 전투 내내 고통받는 걸 봤으니, 아무리 사라라도 이 정도는 용서해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지니양의 말처럼 단순히 사냥에 빠져서 늦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먼."
"역시 그게 가능성이 제일 높지."
나도 디아나의 말이 제일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뭐, 우리도 수많은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해서 온 거니까 완전히 다른 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만약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적어도 한두 명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빠져나가려고 했을 거고, 그러면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도 뭔가 흔적이 남았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확인은 해보고 싶어요."
"응. 그래야지. 어차피 어느 길로 가든 결국 최종 목적지는 6계층으로 이어지는 보스 방이니까. 거기까지 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 아라크네 간부 파티가 패한다면 잡몹보다는 보스한테 패할 확률이 높고.
"덤으로 자네가 봤다는 그 문양도 확인하고 말일세!"
디아나 너한테는 그게 본 목적 같지만 말이야.
눈을 빛내면서 기대하는 디아나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전에 내가 그 문양에 관한 얘기를 해줬을 때도 보고 싶다고 그랬었지.
그게 그렇게 보고 싶을까? 어차피 6계층에서도 비슷한 문양은 봤을 텐데.
아무튼 그렇게 전투 때는 지옥을, 전투가 끝나고 난 이후의 휴식 시간에는 천국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착실히 보스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보스 방에 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전에 고추 파티와 여기서 보스를 잡은 다음 시간이 꽤나 흘렀으니, 리젠이 안 된 건 아닐 거다.
그리고 여길 알고 있는 건 우리와 아라크네 클랜, 그리고 전에 같이 왔던 세 명뿐이다.
그 셋은 던전에 오기 전날에도 위에서 얼굴을 봤으니 당연히 아닐 테고, 그렇다면 역시 아라크네 간부 파티가 여기 와서 쓰러뜨렸다는 소리가 되겠지.
"역시 그냥 싸우다 보니 흥이 나서 끝장을 본 모양이네. 딱히 혈흔 같은 것도 안 보이고, 아마 그대로 6계층에 간 것 아닐까?"
"다행이네요······."
내 말에, 우리 천사님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셨다.
마치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안도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우셨다.
"결국 헛걸음했다는 거네."
"상관없잖아. 어차피 5계층에 있어봐야 마을 근처에서 사냥하면서 레벨업이나 했을 테니까. 여기가 레벨은 더 잘 오르잖아?"
괜히 범위 공격에 후위진이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기도 했고.
뭐, 그만큼 내가 고통받기는 했지만.
"구원이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뭐야. 날 생각해서 한 말이었어?
하여간 귀엽기는. 이 오빠는 아무렇지도······아니. 솔직히 빈말로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너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힘낼 수 있어!
"그럼 돌아갈까. 돌아가서 확인해보면 아라크네 애들도 돌아와 있겠지."
"그 전에 문양일세!"
"아, 그랬지. 이쪽이야."
나는 우리 애들을 6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이끌었다.
"흠. 이것인가? 이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구먼."
문양을 보자마자, 디아나는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다니. 그러면 6계층에 있는 문양은 이것보다 훨씬 크다는 뜻인가?
"흐음······흐으음······던전의 마나와 뒤섞여 상당히 눈치채기 힘드네만, 이렇게 집중해보니 확실히 뭔가 마법적인 처리를 한 것이 느껴지는구먼."
하지만 작다고 해서 관심이 꺼진 것은 아니라는 듯, 디아나는 문양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런 그림이 글로 읽힌다니, 신기하네요."
"그러······으으읏!?"
문양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다른 애들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문양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사라가 큰 소리를 냈다.
"사라야? 왜 그래?"
"저, 저거······!"
나하고 관계된 일만 아니면 쿨한 척 잘하는 우리 용사님이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깜짝 놀라서 사라에게 다가갔지만, 사라는 문양을 가리킨 채 여전히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저 문양이 왜?"
"나도······."
"응? 너도? 너도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별나네. 저게 뭐라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별생각 없이 그렇게 받아쳤던 나였지만, 사라가 동요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나도······저게 글자로 읽혀······!"
"······뭐?"
나는 순간 사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했다.
아니. 확실히 저 글 내용이 나 하나만 보라고 쓴 내용은 아니야.
하지만 명백하게 여신님이 목적을 가지고 보낸 이방인만 보라고 쓴 글이잖아?
그런데 그 글이 사라한테 읽힌다고? 이방인도 아닌 사라한테?
얘가 이런 장난을 칠 애가 아니기는 하지만, 혹시 그냥 장난치는 거 아니야?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볼래?"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나는 확인차 그렇게 물어봤지만, 사라는 망설임 없이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서브 계층 올 클리어······축하합니다······?"
확실하다. 사라는 진짜로 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아니. 이상하잖아? 저거 여신님과 계약한 사람만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사라양. 혹시 자네 조상 중에 이방인이 있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에 동요하는 날 대신해서, 어느 샌가 문양에서 눈을 떼고 이쪽으로 다가온 디아나가 냉정한 목소리로 사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아뇨. 아, 그게······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그런 얘기와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았던 사라다.
자기 아빠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용사라는 것조차 몰랐던 사라가 자기 집안 내력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라는 처음에는 부정하려다가 이내 그 사실을 깨닫고는 확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디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네만, 사라양의 조상 중에 이방인이 있다면, 그 영향으로 사라양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네."
그리고 디아나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나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뭐? 잠깐만. 그렇다면······!"
"음. 미리엘양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되는구먼. 사라양의 모계 쪽 조상 중에 이방인이 있었던 것이라면 다행이네만, 이 몸은 그럴 것 같지 않구먼."
확실히. 디아나가 말한 대로다.
사라의 아빠 쪽은 족보가 상당히 스펙터클 한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이방인이 하나 더 끼어있다고 해서 놀랄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사라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빠 쪽 핏줄 덕분이라면, 미리엘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은······!
"그렇지만 미리엘씨는 6계층에 있다는 문양을 이미 본 것 아니었나요?"
당황해서 시야가 좁아진 내 눈을 뜨게 해준 건 다름 아닌 천사님이었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래! 미리엘은 이미 6계층에 있는 문양을 해석해내지 못했으니까!"
"흠. 자네. 사라양. 여길 봐주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디아나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고, 벽에다 마법으로 뭔가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는 여신님의 메시지와 정확히 똑같은 문양을.
"이 몸이 새긴 이 문양도, 똑같은 뜻으로 해석되는가?"
하지만 그 문양은, 옆에 있는 문양과 달리 단순한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라 역시도 그렇게 보였는지,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우리 반응을 본 디아나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심각해졌다.
"디아나?"
"······6계층에 있는 문양은, 이것보다 훨씬 크네. 일부러 그렇게 보기 위해 자리 잡고 보지 않는 한,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크기일세. 이 몸도 일부분씩 베껴 그린 그림을 나중에 연결해서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해본 적은 있네만, 직접 6계층에서 문양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담은 적은 없을 정도일세. 그리고 그것은 아마······."
"아라크네 클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음. 그리고 자네들이 이 몸이 그린 이 문양을 글로 느끼지 않는 것처럼, 미리엘양 역시 나중에 합쳐본 그림을 글로 의식하지 못했을 걸세. 하지만 만약 미리엘양이 여기 있는 이 문양을 직접 봤다면······."
"6계층에 있는 그것도 글자일 거라고 눈치챘겠지."
아마도 6계층의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이 쓰여 있을, 그 문양을.
그리고 아라크네 간부 파티는, 그 무뚝뚝한 지니가 걱정할 정도로 오랫동안 던전 탐사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길드 카드를 확인해본 바로는 누군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렇게 연결 고리가 맞춰지고 나니,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것들, 6계층에 있는 문양을 다시 확인하러 간 거였어!"
젠장! 걔들이 이런 데서 다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어떡하지? 지금 당장에라도 쫓아가고 싶지만, 그 녀석들이 향한 곳은 6계층의 보스 방이다.
아무리 5계층과 6계층의 몬스터들 간에 전투력 차이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얼마 전에 막 5계층에 진입한 우리 파티가 거기까지 따라갈 수 있을 리가······.
"가자."
망설이는 내게, 사라가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줬다.
"뭐? 하지만······."
"구원씨. 저희라면 괜찮아요."
"제, 제가 전부 지키겠습니닷!"
레이아나 실비아 역시도 사라와 같은 의견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자네들의 성장을 위해 이 몸이 전력을 낸 적이 거의 없었네만. 이 몸이 전력을 다한다면 6계층 돌파 따위 식은 죽 먹기일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아나 역시도 없는 가슴을 쭉 펴며 그렇게 말해줬다.
엄청나게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저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알았어. 가보자."
솔직히 우리 애들을 데리고 이렇게 준비도 덜 된 위험한 모험을 하는 건 꺼려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신님의 사명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단순히, 지금까지 노력해왔던 게 물거품이 되는 걸 보는 게 싫을 뿐이다.
그렇잖아? 이대로 마신이 부활하고 사명은 실패했습니다로 끝나면, 억울해서 밤에 제대로 발 뻗고 자지도 못한다고.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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