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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893화 (877/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93화 >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우왁! 깜짝이야! 뭐야 이 새끼?! 너 스토커야?!"

그리고 오후에도 열심히 땀을 흘리고, 아, 물론 난 구경만 했지만.

아무튼 중간에 있는 휴식 시간마다 레이아와 마틸다의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거나 물병을 들고 직접 물을 마시게 해주거나 하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잠깐 신전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게 됐다.

훈련이 끝나고 나서 다들 땀에 젖은 몸을 씻으러 가버렸거든.

쳇. 레이아하고 마틸다만 가는 거였다면 나도 꼈을 텐데.

그 둘이라면 같이 씻자고 해도 분명 허락해줬을 테고.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거기에서 같이 훈련받던 성직자 전원이 다 같이 씻으러 가는데 나도 끼자는 뻔뻔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젠장. 다시 생각해도 아쉬워. 미인들만 모여있는 성직자들 수십 명이 다 같이 몸을 씻는 곳이라니. 분명 천국이 펼쳐져 있을······아, 아니.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내 눈에는 레이아와 마틸다만 들어오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가만히 기다리기도 심심했던 나는 신전 안이나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는 얘기다.

여자들끼리 몸을 씻으러 갔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아니. 물론 레이아하고 마틸다는 날 생각해서 금방 나오겠다고 했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남자인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느긋하게 하고 오라고 말해줬다.

그러고 나서 신전을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예배를 위해 찾아왔던 신도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엄청나게 쏠리게 됐고, 그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것 같은 시선에 거북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신전 바깥쪽으로 향하게 됐다.

그리고 신전의 입구에서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쳐버렸다는 거다. 점심에 이어서 또.

제길. 뭔가 묘하게 성자를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하필 위치가 신전이라 방심해버렸어.

"하핫.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점심에 신전 근처에서 식사하고 계셨으니, 신전에 뭔가 볼 일이 있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렇게 신전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스토킹 맞잖아. 새끼야!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어졌지만, 참기로 했다.

아니. 딱히 이 녀석이 예뻐서 그런 건 아니고, 신전 앞이라 이목이 엄청 쏠리고 있으니까.

실제로 뭔가 부탁하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위한 보험 역할을 할 녀석과 둘이서 괜히 시선을 더 끌 필요는 없지.

"······그래서, 무슨 볼일이라도?"

"네. 성자님의 히든카드로서, 확인하지 않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말입니다."

내가 한숨과 함께 질문하자, 녀석은 그 호랑이 얼굴을 내쪽으로 바싹 들이밀며 속삭였다.

가까워 새끼야. 확실히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 건 맞지만.

"뭔데?"

"네. 아라크네 클랜과는 어느 정도 선에서 협력하면 되는 겁니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녀석이 이렇게 은밀하게 속삭일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내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혼자 들떠서 그러는 거라고.

그래서 별일 아니면 히든카드면 히든카드답게 나대지 말라고 주의나 줄 생각이었는데, 이건 생각 이상으로 별일이었다.

"아라크네 클랜에서 너희한테 접촉이라도 해온 거야?"

이 녀석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남들한테 보인 적이 없다.

그 지옥에서 돌아올 때도 제대로 어려지는 팔찌를 끼고 여장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아라크네 클랜이 내 분장까지 간파할 정도로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다면······확실히 저택을 드나든 모든 인물의 동선을 파악하면 수상하게 느껴질 만 하기는 했지만.

저택을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감시했다고?

쓰레온이 밖에서 기웃거릴 때조차 알아챈 우리 완벽 집사님의 눈까지 속이고?

"아뇨. 그건 아닙니다."

긴장한 나는 무심코 녀석의 호랑이 페이스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덩달아 속삭였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썅······아니. 아니지. 아직 방심할 단계는 아니다. 이 녀석의 입에서 갑자기 아라크네 클랜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부터 뭔가 있기는 하다는 거니까.

"그럼 그런 말은 왜 했는데?"

"구원님은 아라크네 클랜과 상호 협력 관계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인데."

"하핫. 성자님의 행보에는 많은 사람의 이목이 쏠리고 있으니까요. 성자님의 뒤에서 은은히 비치는 성스러운 후광을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아니. 그건 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니까. 내가 뭔가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이 새끼 설마 내 팔찌 끼고 여장했을 때도 혼자만 보이는 후광인지 뭔지로 눈치 챈 건가?

"게다가 아라크네 클랜 역시도 던전의 비밀에 관심이 많은 호사가라면 누구나가 주목하는 거대 클랜이니까요. 성자님과 그런 클랜이 만났으니, 소문이 퍼지는 것도 빠른 거죠."

"······그래서, 아라크네 클랜이랑 어느 정도 협력해야 할지 알고 싶다고."

이 녀석, 역시 혼자서 나댄 거 맞았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했던 내게, 그렉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구원님과 아라크네 클랜이 협력 관계라는 사실에 주목하니, 문득 전에 들었던 소문이 떠오르더군요."

"소문?"

"네. 이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문입니다만, 아라크네 클랜의 사람들이 던전 안에서 종종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건가. 이 녀석은 소계층에서 다음 소계층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그 소문과 소계층 간의 이동을 연관 지어서 생각하고는 나와 아라크네 클랜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긴밀한 협력 관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건가.

즉, 이 녀석은 지금 아라크네 클랜도 자신들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지 물어보고 있는 거다.

이것만 들으면 이 녀석도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걸 생각 못 하고 있네.

만약 아라크네 클랜이 그랬으면, 내가 굳이 변장까지 해가면서 너희랑 그 지옥에 갔겠냐?

그냥 아라크네 클랜한테 시키고 말지.

"아라크네 클랜은 신경 쓸 거 없어. 만약 그쪽에서 접촉해와도 모른 척해. 그리고 앞으로는 나하고도 접촉을 자제해. 너희는 말 그대로 히든카드. 나와 뭔가 관계가 있다는 의심 자체를 피하고 싶으니까."

히든카드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는 일부러 그 말을 강조하며 말해줬다.

이렇게 말하면 앞으로는 이 땀내나는 녀석도 좀 접근을 안 하겠지.

"크흑! 서, 성자님······!"

아니. 그러니까 얼굴 들이밀지 말라고 새끼야!

너 방금 접촉 자제하라는 말 못 들었어?!

"마, 맡겨만 주십시오! 성자님이 구원해주신 이 목숨, 성자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니. 접촉하지 말고 쥐죽은 듯 지내라는데 그딴 말이 대체 왜 나와?!

너 내 이름으로 말장난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새끼야?!

에휴. 이런 새끼랑 조금이나마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내가 바보지.

"그럼 난 간다."

나는 손으로 놈의 호랑이 얼굴을 밀어내고는, 다시 신전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본의 아니게 시간은 충분히 때웠으니, 슬슬 레이아랑 마틸다도 몸을 씻고 돌아왔겠지.

"아아~그 늠름한 뒷모습은~."

"즉흥곡 부르지 마 새끼야! 아니. 내 노래를 부르지 마!"

저 새끼가 또 그 지옥의 트라우마를 되살아나게 하네!

하여간 말을 험하게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어요!

"구원씨? 어딜 다녀오셨는데 그렇게 피곤해 보이시나요?"

"으허허헝! 천사니이이임! 추기경니이이이임!"

"어머?!"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우리 천사님과 추기경님이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요염하게 뽐내며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천사님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둘에게 달려들어서, 양팔로 각각 한 명씩 끌어안고는 그 커다란 네 개의 봉우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후우. 이거야. 이거야말로 내 마음의 오아시스지.

더러운 사내새끼와 대화하면서 더럽혀진 마음이 깨끗하게 씻겨지는 기분이야.

"후훗. 네. 저 여기에 있어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요."

그리고 둘도 그런 내게 쓴소리 하나 하지 않고, 내 어리광을 전부 받아들여 줬다.

"아흥······당시인······이런 곳에서는······."

한 명은 조금 과하게 받아주는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뭐,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지만······마틸다야. 먼저 시작하고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주위에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있으니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머리에 키스 세례를 퍼붓는 건 자제해주지 않을래?

아까 남들 안 보이게 몰래 둘이서 키스하고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거, 전부 의미 없어져 버리고 있는데.

아니. 뭐, 다들 따뜻한 눈으로 봐주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저기에는 추기경님이 잘됐다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까지 있네.

마틸다 너 진짜로 인망이 두텁기는 하구나.

아무튼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 또 이 시간이 찾아왔다.

레이아는 신전에서 이미 몸을 제대로 씻었기 때문에 다시 씻을 필요도 없어서, 나는 레이아와 같이 방으로 들어왔다.

뭐, 그래 봤자 나는 씻어야 하니까 바로 같이 침대에 갈 수는 없었지만.

"자, 구원씨. 눈을 감아주시겠어요?"

"네. 헤헷."

이렇게 천사님이 씻겨주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손에 거품을 잔뜩 내고 마치 두피 마사지를 해주는 것처럼 내 머리를 감겨주시는 천사님.

원래 세계에서 미용실을 다닐 때도 느꼈던 거지만, 왜 다른 사람이 머리를 감겨주면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어디 가려운 곳은 없나요?"

"응."

게다가 우리 천사님이 머리를 감겨주시면, 그 앞으로 크게 돌출된 가슴이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서 다른 의미로도 기분이 좋았다.

"후훗. 내일부터는 또 고생하셔야 하니까, 오늘은 저한테 전부 맡기시고 푹 쉬어주세요."

그래. 오늘이 레이아 차례라는 건, 다시 말해서 드디어 우리 애들 차례가 한 바퀴 돌아갔다는 거다.

그 말은 즉, 내일부터는 다시 던전에 갈 예정이라는 거다.

처음부터 모두와 한 번씩 밤을 보낼 때까지만 위에서 쉬고 다시 던전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그 망할 녀석과 만나는 바람에 괜히 더 던전에 가기 싫어졌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안 갈 수도 없으니까.

아라크네 클랜이 6계층 아래로 가는 방법을 발견할 길이 없다고는 해도, 너무 방심해서 느긋하게 지낼 수도 없고.

왜 영화 같은데 보면 꼭 그렇게 방심하다가 된통 당하는 놈들이 나오잖아.

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거든.

뭐, 지금은 그런 것보다 우리 천사님이다.

"그럴 수는 없지. 내일부터 고생해야 하는 건 레이아도 마찬가지잖아."

"저는 뒤에서 보조하는 게 전부인걸요."

"무슨 소리야. 또 혼자서 몰래 변신 연습도 할 거잖아?"

"그, 그건······."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는지, 레이아가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을 간질이듯 살짝살짝 닿고 있던 가슴이 출렁면서 얼굴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줘서, 그게 또 기분 좋았다.

"던전에서는 레이아 혼자서 노력할 수밖에 없겠지만, 듬뿍 오늘은 나도 도와줄게."

"구, 구원씨······왠지 말하는 게 야하세요······."

"그야 그렇지. 레이아가 섹스를 너무 좋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정마아알!"

계속된 내 장난에, 레이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꼬리로 내 다리를 때렸다.

"아읏!"

푹 젖은 꼬리는 다리를 때릴 때마다 찰싹찰싹하고 크게 소리를 냈고, 우리 천사님은 또 그 생각보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마치 자기가 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소리만 컸지 통증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천사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건지, 방금 때렸던 부분을 이번에는 꼬리로 쓰다듬어주셨다.

거품 묻은 꼬리로 이러니까 마치 씻겨주는 것 같네.

아, 겸사겸사 그것도 노리고 하시는 건가.

"뭐, 농담은 이쯤하고. 실은 레이아한테 도움이 될만한 아이디어도 생각해놨어."

사실 천사님이 편하게 변신하는 걸 도우려고 아이디어를 짜냈다기보다는, 하루종일 욕망에 가득 차서 그쪽으로 머리를 굴리다 보니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것뿐이지만.

괜찮잖아. 원래 모든 발전의 어머니는 욕망이라고.

"정말인가요?"

"응. 아마 엄청 도움이 될 거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93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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