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79화 (86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79화 >

    "훗. 이곳에 오니 떠오르는군. 이 두 발이 붉게 물들었던 그 시절이."

    "음?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 지나간 일이지. 굳이 입 밖으로 꺼낼만한 일이 아니야."

    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추억에 잠길 뻔했지만, 추억은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족한 거야.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나 같이 쿨한 남자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지 않겠어?

    "······이 몸과 사라양을 만나기 전에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다닌 모양이구먼."

    "야!"

    사람이 모처럼 한껏 폼을 잡고 있는데 그렇게 초를 쳐야겠냐?!

    그야 붉은 발의 구원이니 뭐니 떠들었던 그 시절은 흑역사고, 입 밖으로 꺼내봐야 자기 흑역사를 자기 스스로 헤집는 꼴이니 일부러 얼버무린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이곳의 몬스터에게는 역시나 전혀 영향이 없는 모양이구먼."

    "뭐, 예상했던 대로네."

    이쪽으로 덤벼드는 늑대개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동시에 뒷 포지션을 잡고, 손을 뻗어 고환을 잡아 뜯는다.

    일련의 동작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한 후, 손에 남은 마석을 인벤토리에 대충 집어넣으며 나는 디아나의 말을 받아줬다.

    여기에 오지 않게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내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면 두세 단계 건너뛰고 3계층 정도부터 조사해도 되는 거 아니야?"

    2계층의 오크들도 마나 같은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마을로 덤벼드니까.

    대충 2계층까지는 몬스터들에게 마나 성질 변환기가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봐도 좋을 거다.

    하지만 디아나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몬스터들이 있는 가운데에 장치를 꺼내면 어떻게 변하는지도 확인하고 싶으니 말일세. 차근차근하세. 급할 것도 없이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날 바라보는 디아나의 시선에 뭔가를 느낀 나는, 곧바로 재치있게 말을 받아줬다.

    "하긴. 단계를 건너뛰면 괜히 디아나하고의 데이트 시간만 줄어들게 되니까. 나야 좋지."

    그리고 이런 내 대답은, 역시나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떼기.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앞으로 더 깊은 곳을 진행하는 것에 있어서도 중요한 실험일세. 데이트가 뭔가. 데이트가."

    디아나는 그렇게 하면서 내 이마를 훈계하듯이 손끝으로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렸지만, 그 입가는 살짝 헤실헤실하게 풀려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난 아직 어리광부리고 싶을 나이란 말이야. 디아나 누나."

    "······정말로 이 낭군님은."

    거기에 분위기를 타서 한 번 더 애교를 부려주자, 디아나는 이제는 완전히 풀린 입가를 다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방글방글 웃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아무튼 우리는 모처럼 커플로 맞췄던 로브를 같이 뒤집어쓰고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마나 성질 변환기가 몬스터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던전의 초입의 늑대개의 무리가 모여있는 곳. 우리가 설치한 1계층 텔레포트에서 조금 더 간 곳에 위치한 오크 부락. 그리고 2계층 마을을 경유해서 2계층의 오크 부락까지.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많이 돌아다닌 것 같지만, 사실 생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중간에 만나는 몬스터에 끌리는 시간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수준으로 우리 전투 능력은 높았고, 또 단순히 이동 속도만 놓고 봐도 예전과 비교도 안 될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내가 디아나를 등에 업고 달려야 했지만.

    뭐, 그건 좋다. 사실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꺄아아! 좀 더! 좀 더 빠르게! 바람의 흐름을 읽고 그 사이를 가르듯 달리는 걸세!"

    다 좋은데 넌 왜 갑자기 속도광이 되어있는 거냐?

    너도 옛날 생각나서 기분 좋아진 거냐?

    뭐, 기분 좋아 보이니 나도 좋지만 말이야.

    내 등 뒤에 매달려서 팔을 붕붕 흔드는 디아나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더욱 다리에 힘을 줬다.

    "흠. 역시나 그런 것인가."

    2계층의 오크 무리 한복판에서 장치를 꺼내고 그 오크들과 일전을 치른 후, 디아나는 턱에 손을 괴고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뭐가?"

    "음. 일전에 몬스터가 자네의 성자 스킬을 맞으면 더 극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자네가 사용하는 마나가 여신님의 마나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응. 그랬지."

    어제 셋이서 얘기할 때, 분명 그런 말도 나왔었다.

    "그와 같은 원리로 몬스터 무리 사이에 이 장치를 꺼내면 몬스터들이 제일 먼저 이 장치부터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네만······."

    "아······확실히. 살짝 흥분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 장치를 노리려고 하는 느낌은 또 아니었지."

    참고로 말하자면 흥분했다는 건 말 그대로 격앙됐다는 의미이지,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신님의 마나만으로 그렇게 되겠어? 우리 여신님이 무슨 섹스의 여신님도 아니고.

    ······뭐,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할 때도 없지는 않지······여신님? 듣고 계시면 천벌은 내리지 말아 주세요.

    "음.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자네의 성자 스킬에 반응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신님의 마나이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구먼."

    "역시 성적으로 흥분한다는 게 제일 큰 거 아니야?"

    "아마 아니라고 생각하네. 아래로 내려갈수록 몬스터들이 자네의 스킬에 성적으로 흥분하기보다는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는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

    솔직히 그런 생각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아서 신경 끄고 있었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윗 계층에서는 내 스킬에 당하면 날 공격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성적 흥분을 해결해보려고 자위까지 하는 놈마저 있었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런 것보다는 그냥 어떻게든 날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경우가 많아졌지. 그런 와중에도 물건은 세웠지만.

    윽. 젠장. 괜히 떠올려버렸잖아.

    "그럼 디아나는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흐으음······. 그렇구먼. 성자 스킬이 아니더라도 일단 자네가 사용하는 마나는 같지 않은가? 그런데도 다른 스킬에는 반응하지 않고 성자 스킬에만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역시 여신님께서 자네의 사명을 위해 성자 스킬에만 특수한 효과를 더 부여하신 것일지도 모르겠구먼."

    그런 건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데 말이야.

    응? 잠깐만. 그럼 다시 말해서, 여신님은 처음부터 내가 성자 스킬을 몬스터에 쓸 걸 상정하고 성자 스킬을 만들었다는 말이잖아?

    처음에 디아나한테 성자 스킬을 몬스터에게 쓰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획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신님은 그마저도 상정하고 있었다니.

    대체 머리가 얼마나 섹······아, 아니! 여신님! 아직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아무튼 일단 몬스터가 있을 때 이걸 꺼내도 이게 집중적으로 노려질 일은 없다는 거네. 뭐, 그래도 흉포해지니까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만."

    "음. 이 몸으로서는 몬스터가 이 장치에 달려들기를 원했었네만."

    "응? 왜? 이거 꽤 비싼 거 아니야?"

    "아무리 비싸도 자네 목숨 값만 하겠는가. 이 장치로 몬스터의 이목을 잠시나마 끌 수 있다면 이 장치를 던져줄 수 있지 않겠는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네가 무리할 필요도 없이 말일세."

    "······크흑. 디아나 누님······."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반응은 너무하지 않냐?

    뭐, 이해는 하지만 말이야. 이걸 귀엽게 봐주는 몇몇 애들이 이상한 거지.

    아니. 디아나도 포함인가. 지금은 저런 반응을 보였지만, 저건 아마 부끄러워서 일부러 저러는 것일 테니까.

    원래라면 가슴을 쫙 펴면서 ‘후훙. 이 몸의 상냥함을 알겠는가.’ 라는 말이나 하면서 미소를 지었을 텐데, 이번에는 진짜로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아, 그럼 혹시 아래에서 차례차례 단계적으로 내려온 것도, 만약 몬스터가 여기에 달려들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였어?"

    "······딱히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닐세.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디아나는 전부 날 생각해서 그랬다는 게 들킨 게 부끄러운지 아예 눈까지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새삼스럽게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냐. 우리 사이에."

    "자네가 너무 뻔뻔한 것일······으야아아! 달라붙지 말게에! 햐응?! 어, 어딜 만지는 겐가아!"

    나는 그런 디아나를 끌어안고 그 말랑말랑한 뺨에 내 뺨을 마구 비벼댔고, 디아나는 그런 내게 앙탈을 부리며 내 얼굴을 밀어내려고 했다.

    물론, 무시하고 마구 비벼줬지만.

    "흐엑······흐엑······우으······혼란을 틈타 어딜 만지는 겐가······."

    그 잠깐의 발버둥만으로 진이 빠진 디아나는, 결국 축 늘어져서 가만히 내 품에 안겨 내가 만족할 때까지 부비부비를 당하는 신세가 됐다.

    "자꾸 발버둥치니까 그렇지. 일부러 만진 것도 아니다 뭐. 내가 일부러 만졌으면 디아나 너는 지금쯤······."

    "······으읏?! 다, 다음! 다음으로 가세! 다음! 자, 빨리 안게!"

    디아나야. 이 상황에서도 나한테 안겨 가려고 하는구나.

    뭐, 그게 제일 빠르기는 하지만 말이야.

    "가면서 엉덩이 만져도 돼?"

    "안 되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는 겐가!?"

    "쳇. 자기도······."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말을 멈췄다.

    사실 할 말이야 더 있기는 했지만, 지금 여기서 이 다음 말을 내뱉어 버리면 진짜로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어차피 2계층의 몬스터의 공격 따위 스쳐도 상처 하나 안 나고, 마음만 먹으면 풀파워 성역 선포만으로도 다가오기도 전에 끝장내버릴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던전 안에서의 노출 플레이이라는 거대한 유혹이 날 집어삼키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유혹을 떨쳐냈다.

    여기서 진짜로 그런 분위기가 되면 수습에 곤란해지는 건 나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적당히 알콩달콩한 데이트 같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 이 몸도 뭔가······?"

    "아니. 만져달라고 안기는 건 줄 알았다고."

    그래서 나는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대충 디아나가 가볍게 넘길 수 있을만한 말을 대신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제정신인가?!"

    "아닐지도······."

    "아니면 곤란하지 않은가?!"

    디아나야. 너무 격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어도 그렇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아, 아니지? 그, 그야 내가 평소에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디아나는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아니지?

    "하긴. 아직 정식으로 결혼도 안 했는데. 그지?"

    살짝. 아주 살짝 동요할 뻔했지만, 나는 멘탈을 단단히 잡고 계속해서 장난을 이어나갔다.

    "음! 이 몸의 낭군니이이임?! 이, 이 몸에게 무슨 말을 하게 하는 겐가아아!"

    "핫핫핫. 하여간 우리 디아나는. 자, 낭군님 여기 있어요."

    "어서 가기나 하게!"

    디아나는 손으로 내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하지만 낭군님이라는 말을 부정은 하지 않으면서 날 재촉했다.

    하여간 귀여워 죽겠다니까.

    그렇게 주변에 몬스터의 피를 흩뿌리면서도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제삼자가 보기엔 제법 살벌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우리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오가며 4계층까지 마나 성질 변환 장치의 실험을 마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사할 때나 잘 때. 주변의 몬스터를 전부 정리하고 나서 꺼내면 쓸만한 기계였다.

    그리고 되도록 몬스터가 범위 안에 있을 땐 꺼내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재인식했다.

    3계층에서부터 그런 조짐을 보이더니, 4계층에서부터는 장치의 영향을 받으면 확실히 흉포해지더라고.

    괜히 몬스터를 흉포하게 만들고 싸워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

    "······시간에는 맞춰 왔네. 늦으면 가만 안 두려고 했더니."

    그리고 저택에 돌아온 우리에게, 사라가 팔짱을 끼고는 살짝 삐진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맞이해줬다.

    반응을 보아하니, 사라도 오늘 나랑 지내기 위해 간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디아나에게 선수를 뺏겼다는 느낌인가.

    "치사하게 디아나만······데이트는 잘하고 왔어요?"

    "우음. 데이트가 아니니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오늘은 잠시 실험을 하고 온 걸세. 그렇지 않은가."

    사라는 디아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지만, 하루종일 나와 알콩달콩 지내고 와서 기분이 좋은 디아나는 어른스럽게 그런 사라를 다독여줬다.

    "훗. 그냥 데이트만 하고 왔을 리가 없잖아? 여기서만 하는 말인데, 실은 진하게······."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자네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왜 괜한 도발을 하는 겐가!"

    "아니. 몬스터들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고 왔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디아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건데?"

    "무, 물론 몬스터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고 왔다는 말을 하려는 걸 지적한 걸세! 그게 대체 뭔가?!"

    "그러게."

    "자기도 모르는 말을 왜 하는 겐가?!"

    아니. 디아나가 그렇게 받아칠 줄 몰랐지.

    쳇. 당황해서 야한 생각 했다고 실토라도 하면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7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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