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74화 >
오랜만에 넷이서만 있게 된 우리는, 떨어져 있었던 동안 있었던 얘기를 이 자리에서 전부 풀어낼 기세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뭐, 떨어져 있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던전에서 지옥을 경험한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돌아오자마자 모든 썰을 풀어버렸으니, 나는 기본적으로 들어주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없는 동안, 사라도 레이아도 기본적으로 자기 단련에 힘썼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전투에서의 맡은 역할이 전혀 다른 둘이 같이 단련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라는 실비아와 같이 정원에 있는 훈련장에서, 그리고 레이아는 마틸다와 같이 신전에 가서는 마틸다가 하고 있는 성기사 육성 훈련에 참가했다는 모양이다.
그나마 사라야 평소부터 할 일이 없으면 곧잘 혼자 훈련을 하고는 하니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레이아까지 단련에 힘썼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게······구원씨가 그러셨잖아요? 절 성녀로 만드실 거라고. 성녀는 대사제도 성기사도 될 수 있는 만큼,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미리 성기사로서의 전투법을 익혀두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마틸다 추기경님이."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레이아가 조금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런 대답을 해줬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전에 마틸다하고 미리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고.
하지만 레이아가 빈민가에서 행하는 봉사 활동도 줄이면서까지 자기 단련에 힘쓴 이유가 과연 그것뿐일지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면, 사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야 사라는 누가 용사님 아니랄까 봐 평소부터 남는 시간에 훈련하는 일이 많으니 레이아만큼 이상하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레이아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다.
사라 역시도 평소와 조금 느낌이 다른 건 마찬가지였다.
활 연습은 물론 혹시 모를 위기 상황을 대비해 실비아에게 기초적인 검술까지 배웠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평소에는 다른 애들이랑 쇼핑도 가고 하는데, 이번에는 그랬다는 말도 전혀 없고.
"너희 혹시 자기가 더 강했으면 나 혼자 던전에 보낼 일 없었다든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지?"
"······."
"그, 그게······."
그걸 깨달은 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추궁하자, 사라는 픽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고, 거짓말을 못 하는 레이아는 사실을 시인하듯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들 말이야······. 나한테는 혼자서 무리하지 말라고 그런 주제에."
"······별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을 뿐이야."
배다른 동생 대사 따라 하지 마라 이것아.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있어.
"넌 내가 그렇게 좋냐."
"······혼자 최하층에 내려갈 생각까지 했던 구원만큼은 아니거든."
아, 좋아한다는 건 부정 안 하는구나.
새침한 표정으로 귀여운 짓 하기는.
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라의 뺨에 내 뺨을 비비면서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지만, 사라는 살짝 짜증 난다는 표정만 지을 뿐 내 부비부비를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표정을 짓는다 이거지?
"하긴. 내가 더 좋아하기는 하지."
"읏! 아니거든?!"
내가 사라가 했던 말의 허를 찌르자, 사라가 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서 날 노려봤다.
야. 그런 표정 지어봤자 자기가 날 더 좋아한다고 화내는 시점에서 전혀 안 무섭거든.
"방금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더······!"
"······자네들. 이 몸을 사이에 두고 애정 행각은 그만두게나."
그리고 그런 나와 사라의 옆에서 보면 닭살밖에 안 돋을 말싸움을 멈춘 건 바로 디아나였다.
확실히 사이에 껴있는 디아나 입장에선 죽을 맛이겠지.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거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사이에 낀 건 아니지만.
아무튼 아까 발동걸리려고 했던 게 진정될 만큼 짜증 났는지, 디아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바보같은 말싸움을 멈췄다.
"애, 애정 행각이······!"
"애정 행각이지 않나. 그냥 이 몸이 더 낭군님을 좋아한다고 치고 그만하게."
아, 멈추려고 끼어든 게 아니라 참전하려고 끼어든 거였구나.
"제가 더 좋아하거든요!?"
물론, 걸려온 싸움을 피할 사라가 아니었다.
둘은 곧바로 내 앞과 옆에서 투닥투닥 말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른 쪽 옆에서 레이아가 쿡쿡하고 내 귓가를 간질이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셨다.
"두 분이 이렇게 다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두 분 다 구원씨가 안 계시면 기운이 없으신지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시니까요."
천사님. 둘한테 안 들리게 하려고 이러는 건 알겠지만, 너무 그렇게 귀에 입을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이시면 녹아내릴 것 같아요.
"레이아는 안 그랬고?"
"저도······기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저한테 기운을 채워넣어 주세요."
레이아는 내 질문에 살포시 얼굴을 붉히더니, 내 팔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줘서 자신의 커다란 가슴 사이에 내 팔을 포옥하고 파묻었다.
천사님. 기운은 오히려 제가 받고 있는 것 같은데요.
특히 제 특정 부위가 유독 건강해······.
"전 구원한테 조금이라도 도움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단련했다고요! 디아나는 할 일도 없으면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요! 제가 더 구원을 좋아한다고요!"
"후흥······. 이 몸이 할 일 없이 그냥 돌아다녔······흐야아앙?!"
그리고 내 특정 부위가 건강해진 걸 제일 먼저 캐치한 건 역시나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디아나였다.
사라와 말싸움을 하면서 뭔가 자랑스럽게 말하려고 했던 디아나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위로 펄쩍 튀어 오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돌려봤다.
먼저 자신의 엉덩이로 시선을 돌려서 진짜 내 물건이 커진 건지 확인하고, 그렁그렁 거리는 눈망울로 날 올려다봤다.
야. 안 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서 발동 걸리면 안 된다? 너 발동걸리면 진짜 뒷감당이 안 된다고.
내가 필사적으로 그런 의미를 담아 레이아의 가슴 쪽에 시선을 보내자, 디아나도 그에 맞춰서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내 두꺼운 팔이 반쯤 안 보일 정도로 파묻어 버린 레이아의 거대한 가슴을 보고, 디아나의 그렁그렁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질투로 불타올랐다.
"자네라는 남자는! 자네라는 남자는! 이 몸이 열심히 자네와의 사랑을 쟁취하고 있었건만!"
"아니. 쟁취는 무슨······굳이 안 그래도 난 널 사랑하니까."
"그런 문제가 아닐세!"
일단 디아나를 다독여 봤지만, 디아나의 화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폭발해서 내 머리를 주먹 쥔 손의 손바닥 부분으로 토닥토닥 때려댔다.
야. 괜히 나한테 화내지 마라. 그런다고 해서 없는 가슴이 생기냐.
"레이아도 치사해요!"
게다가 억울한 건 사라도 마찬가지였는지, 아까까지 디아나와 싸우던 사라도 디아나의 말에 동조하면서 우리 천사님을 비난했다.
"야. 사라. 아무리 너라도 내 천사님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못 참으면 어쩔 건데?"
"······."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봤네. 그냥 갑자기 멋있는 척이 하고 싶어져서 해본 말이었어. 미안.
"아, 아무튼! 디아나가 밖을 돌아다녔다고? 밖에서 뭘 했는데? 얘기하는 걸 봐선 뭔가 중요한 걸 한 것 같은데."
이럴 때는 역시 말을 돌리는 게 최고지!
"······."
야. 디아나야. 우리 천사님 가슴만 노려보고 있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줄래?
알았어. 알았다고. 빼면 되잖아. 빼면.
내가 슬쩍 레이아의 가슴 사이에서 팔을 빼자, 디아나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코홈. 음. 다른 게 아니라 던전의 마나 말일세. 앨리시아양 덕분에 성직자의 신성력과 던전의 마나가 상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아, 응."
"그걸로 생각한 걸세. 마틸다양이 던전같이 던전에 다닐 수 있는, 아니. 던전에서의 위협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일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 예전에 1계층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러 갔을 때를 기억하는가?"
"아, 응."
그야 기억 못 할 수가 없지.
그것 덕분에 지금도 우리가 돈에 여유가 있는 거니까.
아니. 디아나야 원래 돈이 썩어 넘칠 만큼 있을 테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내가라고 해야겠지만.
굳이 던전에 가지 않더라도 날 기둥서방으로는 만들어주지 않는 고마운 자금줄이다.
"그러면 그때 텔레포트 마법진 이외에 커다란 기계를 같이 가져갔던 것도 기억하겠구먼."
그랬지.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그게 바로 텔레포트 마법진 주변의 마나를 안정시키는 기계였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 얘는 내가 아직도 이 세계에 막 와서 상식도 뭣도 없는 풋내기인 줄 아나.
"사실 지금까지 마나 변환 장치를 같이 설치한 이유는 그것을 설치하지 않으면 몬스터가 너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네."
어차피 던전의 마나라고 해서 마법구를 작동시킬 수 없는 건 아니니, 원래는 그냥 텔레포트 마법진만을 설치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자 텔레포트 마법진을 기동하는 순간, 노도와 같이 몬스터들이 밀려왔다는 거다.
예전에 2계층에서 내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던 그때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 원인을 텔레포트 마법진이 작동할 때 마나가 밀집하는 현상에 있다고 봤다.
아무래도 그런 마법진을 작동시키려면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마을 밖에서는 마을 안의 마나 유동이 잘 느껴지지 않게 하는 마법구를 만들어냈고, 그 덕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발동할 때마다 몬스터가 밀려오는 현상은 사라지게 됐다.
하지만 여기에 디아나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던전 밖에서 만들어진 그 기계는 주변 마나를 안정시키며 던전의 마나 성질을 밖의 마나와 비슷하게 바꿔버린다는 점이었다.
물론 문제 될 게 없었기에 디아나도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그 특징이 다시금 주목하게 됐다는 거다.
성직자가 던전의 마나에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말이다.
그 기계가 마나의 성질을 바꿔주기 때문에 마틸다가 던전에 내려가더라도 마을 안에서는 멀쩡하게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디아나가 눈치챈 것이, 고위 성직자일수록 던전의 마나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강한 몬스터일수록 위쪽의 마나. 그러니까 여신님의 특성이 담긴 마나를 견디기 힘들어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마을에의 대규모 습격을 2계층에서만 겪었던 것으로만 봐도 알 수 있듯, 아래로 내려갈수록 몬스터가 대규모로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적어졌다.
지금까지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디아나의 가설이 맞는다면 그 이유가 전부 설명이 된다.
마을 주변을 감싸는 여신님의 특징을 가진 마나 때문에 오히려 수준 높은 몬스터일수록 다가오지 않았던 거다.
물론 그래도 가끔가다가 마을로 쳐들어오는 몬스터는 있고, 그런 경우가 생기면 더 미쳐서 날뛰어 댄다는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몬스터가 내 성자 스킬에 맞으면 나 하나만 죽일 듯이 노리고 덤벼드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내 마나는 조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성자 스킬에 한 번 당하면 내게 직접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 몸 안에 남아있으니까.
여신님의 마나에 거부감을 느끼는 몬스터들에겐 이만한 재앙도 없겠지.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지금까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점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1계층에서는 내 스킬에 당하면 자위부터 하고 보는 놈들도 있었는데, 아래로 갈수록 그런 놈들도 없어졌지.
윗계층의 약한 놈들은 오히려 여신님의 마나에 거부감이 적고, 강한 놈들은 거부감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건가.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얘기를 다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왔다.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나 성질 변환 장치만 만들면, 마틸다 같은 고위 성직자도 얼마든지 던전에 같이 다닐 수 있고, 강한 몬스터일수록 조우할 확률도 낮아진다는 얘기네!"
"······."
내가 기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외치자,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설명하던 디아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못 만드는 거냐."
"이, 이 몸에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백······시, 십······오······이, 일 년?"
야. 귀여운 척하면서 올려다봐도 안 통하거든? 물론 귀엽기는 하지만.
일 년이라니. 그것도 너 지금 엄청 줄여서 말한 거지? 처음에 백 년까지 말하려고 했지?
그야 백 년도 네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조금 더 수준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7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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