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69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라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게 맞았다.
아니. 사라뿐만이 아니라, 실은 모두가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렇게 만든 범인은 마틸다가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마틸다가 아침에 있었던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나와 펠리시아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 건 마틸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알게 됐냐고? 그건 바로.
"설마 자기가 실토했을 줄이야."
"제셩합니댜아아······."
지금 내 무릎 위에서 부비부비형에 처해 있는 실비아 때문이었다.
그 왜 예전에 있었잖아? 실비아가 펠리시아와 나를 이어주기 위해 몰래 뒷공작을 펼치다가 나한테 걸려서 사과했던 사건이.
그때도 딱히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닌데 얘도 참 양심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이야.
설마 양심의 가책을 너무 느낀 나머지 스스로 다른 애들한테 자기가 해온 일을 실토해버렸을 줄이야.
그 때문에 펠리시아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모두가 알게 됐고, 다들 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야 우리 애들이 내 얼굴만 보고 내 심정을 읽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많이 심했으니까 말이야.
결국 아침에 마틸다가 갑자기 펠리시아 얘기를 꺼낸 것도, 그리고 아까 사라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것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바로 실비아한테 축하의 말부터 건넨 것도 전부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었던 우리 애들의 행동들까지도 전부.
사라가 펠리시아를 위해 성까지 가줬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니. 실토한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러고도 나한테 말도 안 해?"
"햐으응?! 제, 제셩······흐잇?!"
"괜히 애꿎은 실비아만 괴롭히지 마. 이 바보야. 우리가 구원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거니까."
내가 실비아의 찰떡같이 말랑말랑한 볼때기에 자신의 뺨을 마구 비벼대자, 사라가 실비아를 지키기 위해 막아섰다.
하지만 사라야. 이번만큼은 네가 나선다고 해서 내가 물러설 것 같아?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오히려 너까지 같이 날 속인 대가를 지금 톡톡히······."
"그래서. 또 새로 여자를 들였다고?"
"죄송합니다······."
큭. 비겁한 녀석. 사람의 약점을 찌르다니. 네가 그러고도 용사냐.
물론 그렇게 말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원래부터 정에 약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설마 설마 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이렇게 되다니."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사라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놓고 나보고 보라는 듯이.
"야. 아무리 그래도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면 처음부터 안 믿고 있었던 것 같잖아."
"그야 그렇게도 되지. 지금까지 자기가 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봐."
돌이켜 생각해 보라니.
그래도 최근에는 그런 평가를 받을 짓은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펠리시아 직전에 있었던 다른 여자와의 일이라고 한다면.
"앨리시아를 단호하게 찼······."
"강제로 자기 동정을 뺏어간 나쁜 추억밖에 없는, 만나는 것도 가끔 길드나 던전에서 지나가다가 얼굴 볼 때가 전부였던 여자를 찼을 때도 한동안 혼자 끙끙거리면서 우울해했지."
"······아니. 그건 제가 여자를 차는 게 처음이라서 말이죠. 그리고 솔직히 동정 뗀 게 나쁜 추억은······."
아니. 솔직히 생각을 해 봐.
앨리시아 걔가 성격이 털털하고 남자다운 구석이 있어서 그나마 여자로 잘 안 느껴지는 거지, 고레벨 모험가답게 생긴 건 참 예뻐요.
그런 눈 돌아가게 예쁜 여자가 말이죠. 섹스의 섹자만 들어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동정 놈을 침대 위로 끌고 가서 여자의 맛을 알려준 거에요.
솔직히 싫어할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동정이 꿈꾸는 이상적인 동정 떼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는 나였다.
"뭐?!"
"죄송합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는 사라에게, 나는 또다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서워 이것아. 아니. 그야 네가 나랑 처음 할 때 서로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얼마나 아까워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후우······아무튼 그 여자한테도 그랬으니, 매번 정기적으로 만나는 그 여자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바람둥이. 내가 그렇게 방해까지 했는데."
응? 방해라니? 그런 거 했었던가?
아, 아아. 그러고 보니 전에 내가 펠리시아를 은근슬쩍 찬 걸 깨닫고 잘한 거라고 했던가.
그거, 다 알고 방해한 거였구나.
진상을 알고 나니까, 그동안의 행동들이 전부 하나로 이어져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사라를 책망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바람둥이인 것도 맞고, 사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방해할만한 일이었다.
오히려 고작 그걸로 방해했다고 말하는 게 귀여운 수준일 정도로.
"아,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 그냥 매번 만나서 정들었다고 불쌍해서 받아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사라가 저렇게 내가 정에 휩쓸려서 펠리시아를 받아줬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틸다의 신신당부를 듣고 많이 고민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렇게 생각해버리면 내가 앞으로도 고백하는 여자를 못 찰 것 같다고 생각할 것 같잖아.
"야. 구원. 지금 나한테 자기가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말을 시작하는 방식이 그다지 좋지 못했는지 사라가 다시 눈에 불을 켜서 날 노려봤다.
"아니. 그러니까 나중에 또 내가 정에 휩쓸려 새 여자를 만든다든가 하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줬으면 한다는 거지."
이번에는 나도 꽤 진지한 얘기였기 때문에, 아까처럼 장난식으로 쭈그러들지 않고 정면으로 그 눈빛을 받으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뭐, 지금 막 새 여자를 만들고 온 놈이 이런 말 해봤자 설득력은 없겠지만 말이야."
"······정말이야. 하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바보를······."
그리고 나서 마지막은 살짝 농담조로 마무리하자, 사라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야. 그렇다고 대놓고 한숨 쉬지 마라. 그러면 날 좋아하게 된 걸 후회하는 것 같잖아."
"후회······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 바보야."
그리고 그런 사라에게 내가 태클을 걸자, 사라는 별생각 없이 맞대꾸하려다가 내 눈을 보고 자신이 하려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도 못하는 사라였다.
하여간 귀여워 죽겠다니까.
"안 하지?"
"시, 시끄러워!"
내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물어보자, 사라는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덮듯이 가볍게 찰싹 올리고는 뒤로 밀어버렸다.
"아무튼 그 여자하고의 관계는 모두에게 말해서 다 허락받은 다음에야 인정해줄 테니까!"
"물론이지. 나도 알고 있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이 바보야."
그야 최종 관문인 널 제일 먼저 뛰어넘었으니까 그렇지.
나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키스를 하기 위해, 사라의 목에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사라는 목과 허리를 꼿꼿이 세워서 힘을 주고, 내 쪽으로 끌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응?"
"이제 진짜로 실비아는 놔 줘. 슬슬 진심으로 위험해 보이니까."
"흐냐······구어······페이시야······자, 잘 대······엄먀아아······."
"으앗?! 실비아! 죽으면 안 돼!"
몸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진동이라 그만 올려놓고 있는 거 깜빡했다!
절친인 펠리시아의 마음이 받아들여진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실비아는 더는 생에 미련이 없다는 표정으로 성불하려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로비에서 마주친 사라에게 제일 먼저 들통 나고 나서, 나는 레이첼 누님이 퇴근하고 오신 다음 저녁에 다 같이 모였을 때 다시 한번 펠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다들 표현하는 방식만 다를 뿐 결국에는 사라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즉, 복잡 미묘한 심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해줬다는 거다.
뭐, 실비아가 언제 실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전부터 펠리시아의 마음을 알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테고, 오늘 아침에 마틸다와 나눴던 대화도 마틸다가 대충 얘기해줬다는 모양이니까.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하게 있었고, 그만큼 충격도 적었다는 거다.
"아, 그렇다고 해서 마틸다 탓은 하지 말아줘. 마틸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분명 마틸다가 아침에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어도, 결국 이렇게 됐을 거야. 그러니까······."
"그 정도는 이 몸들도 잘 알고 있으니 자네가 얼마나 펠리시아양을 사랑하는지 이 자리에서 굳이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네."
또 사라 때와 비슷한 실수를 할뻔한 내 입을 가볍게 막아버리고, 디아나는 조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해줬다.
"자네와 펠리시아양의 마음이 그렇다면 이 몸도 더 할 말은 없네."
사실 할 말이 없을 리가 없겠지만.
디아나야. 사랑한다.
"솔직히 말해서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잘 됐다고는 생각해요. 정말이에요. 전 공주님과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요."
특히 천사님은 솔직히 기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투로 저런 말까지 해주셨다.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는데. 오히려 천사님이 너무 천사님이셔서 내가 미안해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지금까지 대로인가. 펠리시아양도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구먼."
"그렇죠. 제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응? 마틸다의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다니?
그야 마틸다도 추기경이기는 하지만······아. 그런가. 교황님의 손녀니까, 굳이 따지고 보면 마틸다는 종교판 공주님이라고 볼 수 있는 위치인 건가.
그나마 교황은 세습제가 아니고, 실감은 안 나지만 나도 일단 종교 쪽에서 엄청 높은 사람 취급이니까 첩이니 뭐니 하면서 들어와도 크게 문제가 안 생기는 거라는 얘기로군.
······그런가. 마틸다도 따지고 보면 공주 같은 거라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구나.
아니. 그렇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생각인 걸까요?"
"이 몸도 잘 모르겠구먼. 예전부터 엉뚱한 짓을 많이 하는 아이이니, 괜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만······."
"괘, 괜찮습니다! 아, 아마······."
실비아야. 친구를 두둔해 줄 거면 끝까지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자고.
뭐, 그러는 나도 내 여자가 된 펠리시아를 두둔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 녀석 하는 짓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공주님이 여기에 와서 살거나 네가 성에 가서 살거나 하지는 않는 거니?"
"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아니. 대놓고 펠리시아하고의 사이를 공표해도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공주이자 영주인 애가 성을 버리고 여기 와서 사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에 들어가 사는 것도 뭔가 좀······.
"생각이 없구먼."
"야. 너 지금 은근슬쩍 내가 생각 없다고 디스한 거지?"
"음? 무슨 소리인가. 대놓고 한 걸세."
"이, 이 쪼끄만 게······!"
태연스러운 얼굴로 맞받아치다니!
이 녀석의 엉덩이나 가슴이라도 한 번 만져서 곤란하게 해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나는 충동을 억누르고 꾹 참기로 했다.
참자 참아. 아무리 펠리시아와의 관계를 허락해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화는 나는 게 당연한 거야.
이 수모는 내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라는 거지.
"으음?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아니. 그냥 받아주기만 한 게 아니라 펠리시아의 입장을 생각까지 해주다니, 우리 디아나는 어쩜 그렇게 마음이 넓을까 해서."
"후흐응. 그렇구먼. 그렇구먼. 좀 더 칭찬해도 되네."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고 마음도 넓고······."
"자네. 이 몸을 너무 좋아하는구먼."
······아니. 그야 그렇지만 말이야.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정했다. 떡밥을 미리 던져놓은 만큼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기는 했지만, 지금 더욱 확고히 마음을 굳혔다.
다음 디아나의 차례에는 아주 제대로 해주겠어.
뭐,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아무튼 다들 고마워."
우리 애들한테 감사 인사부터 하는 게 먼저겠지.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 끝난 거 아니야."
하지만 고개를 숙여 감사하는 내게, 사라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으, 응?"
"구원. 잠깐 뒤돌아봐."
뒤? 갑자기 왜? 너희끼리 뭔가 토론할 거라도 있어서?
아니. 그런 거라면 뒤를 돌 게 아니라 잠깐 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순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직후.
짜악!
"끄아아아아악!"
사라의 불꽃 스매시가 내 등에 작렬했다.
"후우. 이 바람둥이는 진짜. 이제 좀 후련하네. 다들 안 할래요?"
다른 사람한테까지 권유하지 마, 이 사악한 마신의 용사야!
아니. 그야 등짝 스매시 한 방으로 끝나면 다행인 일이지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6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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