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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865화 (849/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65화 >

아무튼 지금은 마틸다가 말한 대로, 내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를 위해 일부러 실비아에게 같이 가자는 말까지 안 하고 온 거니까 말이야.

마차를 타고 성에 도착하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마차 안에 혼자 있는데도 너무 조용한 내가 이상했는지, 마차를 몰던 바넷사가 드물게도 먼저 말을 걸어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왔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바넷사의 걱정까지 얼버무리면서 머리를 짜냈던 나였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동정심인지 냉정하게 분석하라니.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그리고 만약 방법을 안다고 쳐도, 애초에 나같이 감정적인 놈한테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젠장. 역시 직접 맞부딪혀보는 것밖에 방법은 없는 건가?

직접 펠리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면 분명 어제와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기는 할 거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하지 않더라도, 어제까지와는 달리 나 자신이 펠리시아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어머, 자기. 왔어?"

아무튼 그렇게 해서 대면하게 된 펠리시아는, 얼핏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날 맞이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나 그렇다는 얘기지만.

얘가 어떤 심경인지, 그리고 어제 내가 방을 나설 때 어떤 목소리를 냈었는지 똑똑히 알고 있는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이 장난기 많은 녀석이, 하루 만에 다시 찾아오게 된 날 보고 저런 짧은 인사로 맞이해주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어젯밤은 푹 자서 열심히 힘쓸 준비하고 왔지? 라든가. 오늘은 어제부터 늦게 왔네? 자기 사랑이 식었어. 라든가. 평소라면 분명 그런 농담이라도 하면서 날 맞이해줬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라고 할 때 아주 살짝이지만 눈빛이 변하는 게 똑똑하게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바넷사의 포커 페이스로 단련된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러고 보니 전에 은근슬쩍 찬 다음, 내가 억지로 자기라고 부르게 했었지.

그것 때문에 계속 자기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자괴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솔직히 막 차였을 때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차에서 혼자 계속 생각을 했었던 덕분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펠리시아는 나한테 차이고도 완벽히 차였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로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말이다.

"자, 자기? 오자마자 갑자기 왜 그래?"

아무튼 그렇게 펠리시아의 심정이 이해가 되자 뭔가 갑자기 울컥해져서,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실 지금 제일 슬퍼하고 있을 펠리시아가 오히려 날 걱정스럽게 쳐다볼 정도로 말이다.

젠장. 누구 생각이야? 얼굴 맞대고 직접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보자고 한 거.

나같이 감정적인 놈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괜히 더 감정적이 되어버려서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아, 혹시 어제 자기만 하다가 가버린 게 이제 와서 부끄러워져서 그래? 아하하핫. 자기도 덩치에 안 맞게 은근히 귀여운 점이 있네? 괜찮다니까.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쪽 방면으로 그렇게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신 성자님께서 넣자마자 한 번 찍 싸고 잠들어버렸다는 거,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넌 하나도 안 괜찮잖아!

전혀 안 괜찮은 주제에 괜히 무리해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하기나 하고!

그리고 마지막 말은 진짜지? 꼭 좀 비밀로 부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입을 열면 나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있는 안 해도 될 말까지 전부 튀어나와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 자기. 혹시 못 믿는 거야? 너무해. 나 이래 봬도 입은 꽤 무겁거든?"

그렇게 내가 계속해서 말이 없자 내 상태가 평소보다 많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펠리시아는 계속해서 웃으며 농담을 던져왔다.

아마 내가 이상한 만큼, 자기라도 더 평소처럼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펠리시아가 짓는 그 미소조차도 내게는 마냥 슬프게만 보여서, 내 안타까움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순간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해버리고 말았다.

"꺄아악!"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펠리시아에게 다가가, 그 얼굴을 베개로 막아버린 거다.

······응. 아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거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감정 컨트롤이 안 될 것 같은데.

새삼 다시 느끼는 거지만, 진짜 펠리시아 얘가 대단하기는 하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감정 컨트롤을 하고 있는 거지?

"읍! 으으읍! 읍!"

"아, 미안."

아무튼 감정적으로 행동한 탓에 생각보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버린 건지, 펠리시아는 얼굴을 짓눌러오는 베개에 숨도 쉬기 힘들어진 모양이었다.

당황해서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펠리시아에게 사과하며, 나는 황급히 베개를 치워줬다.

"하앗, 하앗······뭐, 뭐하는 거야?"

이번만큼은 제아무리 펠리시아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없었는지, 펠리시아는 당황한 티가 역력하게 드러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그 뭐냐······넌 어떻게 그렇게 숨 헐떡이는 모습도 섹시하냐."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던 나는, 일단 막무가내로 칭찬부터 해보기로 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닌가?

"뭐어? 자기,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이야? 그동안 내 헐떡이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봐놓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런 개떡같은 토스를 해도 그렇게 받아쳐 주냐.

"하아. 아무튼, 그럼 농담은 이쯤 하자. 자기도 싫어하는 것 같고. 그래서 자기, 안 벗을 거야?"

자기가 계속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게 듣기 싫어서 얼굴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그렇게 생각해주는 편이 나로서도 편하지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얼굴 마주 본 채로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원래 그럴 생각으로 왔던 거지만 말이야.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까 이거 감정 컨트롤이 너무 힘든데.

"그렇게 하고 싶은 거냐."

"······당연하잖아. 안 그래도 참기 힘들었는데 어제 그런 식으로 맛보기만 살짝 보여줘서 괜히 더 애만 태우고."

어제까지의 나라면 곧바로 눈치를 못 챘겠지만, 지금 이 대답에서도 나는 평소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얘 지금 대답할 때, 살짝 주저했지?

마치 자기를 너무 밝히기만 하는 여자로 보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펠리시아가 대놓고 밝히는 여자처럼 행동하지 않게 됐지.

예전에는 가만히 있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퇴폐적이라는 말이 제일 처음 떠오를 정도로 야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는데, 요즘은 섹스할 때나 야하게 행동하고 평범하게 대화할 때는 그런 분위기를 거의 안 풍기게 됐다.

"정말 딴 남자라도 불러서 해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니까? 자기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마도······꺄악!"

그리고 물론, 다른 남자와의 섹스를 암시하는 것 같은 말도 전혀 하지 않게 됐었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이번에는 갑자기 그런 말까지 해왔다.

뭐야? 어차피 자기는 차여서 가망이 없으니까? 이제는 나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으니까 막 나가겠다는 거야?

알고 있다. 저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나에게 화낼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펠리시아의 마음을 거절했던 건 다름 아닌 나니까.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젠장. 지금 잠깐 머릿속에 펠리시아가 다른 남자를 침대에 이끄는 장면이 떠올라버렸다고.

잠깐 그런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만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펠리시아의 옷을 거칠게 잡아서 벗겨버렸다.

"아하핫. 자기 너무 난폭한 거 아니야? 언제는 자기가 늦어서 참기 힘들 것 같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랑 해도 괜찮다고 했으면서. 역시 자기는 자기 여자가 아니라도 소유욕이······."

"시끄러워. 조용히 해."

그 난폭한 행동에 처음에는 비명을 질렀던 펠리시아였지만, 역시나 좀처럼 포커 페이스를 잃지 않는 펠리시아답게 이번에도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농담을 던져왔다.

하지만 이번 농담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농담 반 진담 반이라는 느낌이라서, 정곡을 제대로 찔린 나는 난폭한 말투로 그렇게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읏······!"

그런 내 반응까지는 예상을 못 했는지, 펠리시아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렇겠지. 얘는 내가 자기한테 아예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마음이 없는 사람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줄 리가 없으니까.

"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당황한 건지, 펠리시아는 좀처럼 표정을 다잡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덜덜 떨면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 자신도 내가 정말로 펠리시아를 사랑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에 펠리시아를 신경 쓰게 되다 보니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런 펠리시아의 중얼거림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얼굴 마주 보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본다는 계획은 없었던 걸로 치자.

이렇게 감정적이 되어서야 차분히 자기감정 분석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다.

차라리 자기 방에 처박혀서 혼자 머리나 쥐어뜯고 있는 게 더 효과적일 거다.

오늘은 그냥 빨리 할 일이나 하고 가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무 말 없이 난폭하게 펠리시아의 옷을 벗겨버리고는, 곧장 그 음부에 손을 뻗었다.

내 앞에서 최대한 야한 여자처럼 보이지 않으려 한다고 하더라도, 펠리시아의 선천적인 체질 자체가 변한 건 아니다.

때문에 언제나처럼 오늘도 역시 그 음부는 시작 전부터 흠뻑 젖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손끝에 만져진 펠리시아의 음부는 전혀 젖어있지 않았다.

참기 힘들 정도로 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왜 애액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건데.

설마 내게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달아오른 몸조차 신경이 안 쓰일 정도로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거야?

그러면 아까는 왜 그런 말을······그런가. 평범하게 얼굴 마주 보고 대화 나누기 힘드니 빨리 섹스나 해버리고 싶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아, 아하하. 어차피 자기가 성자 기술 한 번만 써주면 금방 해결되잖아?"

내가 여전히 인상을 펴지 못하고 펠리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펠리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변명했다.

웃었다고 해도 입으로만 웃고 있을 뿐, 그 눈은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지만.

물론, 나는 스킬을 쓸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니. 뭐가 물론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스킬을 써서 빠르게 젖게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는 하다. 지금처럼 빨리 할 일만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때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얘한테 스킬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다. 마치 우리 애들한테 스킬을 잘 안 쓰는 것처럼.

아직 얘에 대한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으응······자, 자기이······?"

난폭하게 옷을 벗겼던 행동과는 달리 이번에는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애무를 시작하는 내게, 펠리시아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 이상 내가 감정적이 되게 하지 마라.

"응······흐읏······으읏······."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자의 테크닉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내 부드러운 애무는 펠리시아의 성감을 정확하게 고조시켜 나갔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86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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