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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늦으셨군요."
황급히 펠리시아의 방에서 벗어난 내가 처음 맞이한 관문은, 바로 우리 무표정의 집사님이었다.
문자 그대로 온종일 날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인지, 툰드라같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 눈동자는 활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하게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미안. 자고 왔어."
으득.
…야. 지, 지금 이 간 거 아니지?
그리고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어떻게 화나면 이마에 힘줄 솟는 것까지 디아나랑 꼭 닮았냐.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습니다."
말 끊어서 하지 마. 무서워 이것아.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더 화난 표정을…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바넷사에게 어떤 식으로 들렸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의미로 들릴 만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여기서 네 염장을 더 지르겠냐? 안 그래도 화난 게 뻔히 보이는데.
내가 아무리 장난을 좋아해도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진짜 순수하게 말 그대로 자고 왔다고. 쿨쿨."
"…하?"
이렇게까지 말해주자 바넷사도 그제야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이번에는 황당하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기 시작했다.
야. 그게 네가 그런 눈을 할 정도로 황당한 일이냐?
…응. 말해놓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황당한 일 맞네.
성에 공주랑 섹스하러 가서 잠만 자다 왔다니.
펠리시아가 마음만 먹으면 처형할 수 있는 수준 아니야? 왕족 모욕죄라든가 하는 걸로.
그렇게 따지고 보면, 펠리시아 걔가 은근히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좋단 말이야.
뭐, 난 그런 애를 매몰차게 차버리고 온 거지만.
마지막에 얼핏 들린 목소리, 그거 역시….
"구원님?"
"으, 응? 아, 응. 아무튼, 늦었으니까 빨리 가자."
또 다시 펠리시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려고 했지만, 나는 애써 생각을 멈추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걸 더 생각해봤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 참. 그리고."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될 수 있으면 내가 변명할 때 옆에서 거들어 줘.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바로 얼마 전에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 나는 곧장 말을 멈췄다.
디아나한테 했던 것처럼 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짝 비틀어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진짜 한 글자도 말 안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역시 내가 그냥 알기 쉬운 놈이었던 거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당장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내가 깨어났을 때부터 밖은 어둑어둑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서둘러도 우리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원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로비에 모여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다녀왔어요? 어땠나요? 일은 잘 치르고 오셨나요?"
사라야. 무섭다. 우리 반말로 하자. 반말로.
크윽. 이렇게 된 이상! 이 금단의 수법은 리스크가 너무 커서 쓰고 싶지 않았는데!
바넷사 누님! 잘 부탁합니다! 지금 쟤들한테 내가 사실을 말해봤자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거예요!
내가 그렇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자, 바넷사는 덤덤하게 앞으로 한 발 더 나갔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네, 네? 바넷사씨가요?"
설마 바넷사가 날 옹호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바넷사가 나서자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던 사라의 기세도 살짝 죽었다.
후우. 다행이다. 진짜 누가 용사님 아니랄까 봐 살기 내뿜는 거 무서워 죽겠네.
"네. 오늘 이렇게 늦은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 가라! 바넷사!
돌아오는 동안, 나는 바넷사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서 내가 왜 잠들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실 바넷사가 대신 변명해주기를 바라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마차 안에서 혼자 가만히 앉아있어 봐야 펠리시아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바넷사는 내 사정을 잘 알게 됐으니, 분명 변명도 잘해줄 거다.
…그렇지? 이번에는 장난 안 칠 거지?
내 설명을 듣고 나서 "구원님의 몸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말까지 했었잖아.
물론 바넷사의 잘못은 전혀 아니었고, 나도 아니라고 해줬지만, 그래도 바넷사가 느끼는 책임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테니까.
아무리 내가 온종일 기다리게 했다고 해도, 장난은 안 칠 거지?
"구원님은 오늘 공주님과 시간 가는 줄 모르…흐앗! …윽크읏!"
야!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믿었는데! 이번만큼은 안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
장난기 하나 없이 언제나 진지했던 우리 집사님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돌려줘! 우리 집사님을 돌려…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게 나쁜 변화는 아니니까 돌려줄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그래도 지금은 장난칠 타이밍이 아니잖아!
나는 분노를 담아서 바넷사를 공격했다.
엉덩이 쪽에 손을 뻗어서, 바지 위로 그 음부를 꽉 눌러주는 것으로.
아니. 그렇다고 진짜 때릴 수는 없고, 입을 틀어막아 버리면 괜히 오해만 더 살 테니까.
우리 애들한테 안 들키게 바넷사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내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심코 귀여운 소리를 내버리며 까치발까지 든 바넷사는, 이내 표정을 다잡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아, 아니. 야. 나도 경황 중에 너무 대담한 짓을 해버린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네가 먼저 장난쳤잖아.
"후우…. 구원님은 오늘 공주님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느라 늦은 것이 아닙니다."
눈빛만으로 날 제압한 바넷사는 한숨을 내뱉어서 숨을 고르고는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하고는, 다시 찌릿하고 날 노려봤다.
…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데 진짜 착각할만한…어, 엉덩이에서 손 떼면 되죠?
내가 슬그머니 엉덩이에서 손을 떼자, 바넷사는 다시 정면을 쳐다보고 우리 애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줬다.
"…그래서, 그 여자랑 제대로 하지도 않고 잠만 자다가 왔다고?"
"제대로 안 했다고 할까, 전혀 안 했다고 할까…실은 그래서 내일 다시 가야 돼."
"진짜 바보 아니야?"
크윽. 젠장. 뭔가 반박을 해주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라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사라도 말만 저렇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구원씨.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요? 피곤하시면 꼭 내일 성에 가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물론 걱정을 해주는 건 사라뿐만이 아니었다.
걱정하면서도 은근히 아닌 척하는 사라와 달리, 우리 천사님은 아예 대놓고 걱정스럽다는 듯 내 팔을 껴안으셨다.
이거 여기서 조금만 더 약한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침대에 눕혀놓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할 기세네.
"아니. 이미 약속했으니까."
"펠리시아양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자네가 쓰러져버리면 다 소용없는 일 아닌가. 사람을 보내서 며칠 더 참으라고 전하겠네. 자네는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아, 아니! 정말로 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에 잠을 못 자고 너무 힘써서 그런 것뿐이고, 온종일 잔 덕분에 이제 멀쩡하니까. 오히려 너무 자 버려서 밤에 못 잘까 봐 걱정될 수준이야. 아, 말해두지만, 내가 펠리시아를 만나러 가고 싶어서 이러는 게 절대 아니니까."
오히려 얼굴 보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한동안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야.
"당신, 그렇게 말하면 괜히 안 하던 의심도 하게 되어요."
뭐, 내 마지막 발언은 괜한 사족이었는지, 마틸다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니. 하지만 진짠데. 그럼 내 말을 증명해줄 사람은….
"실비아, 와서 좀 말해 봐. 어젯밤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아우으으으…."
물론 실비아가 내 부름에 응답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실비아는 바넷사의 설명이 시작됐을 때부터 저기 구석에 가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부끄러움에 떨고 있었으니까.
"저거 봐!"
"보긴 뭘 봐. 이 바보야! 하아…진짜 이 바보는. 아무튼, 사정은 알겠어."
"믿어주는 거야?!"
그야 물론 바넷사까지 동참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너무 믿기 힘든 변명이었는데.
만약 반대 입장이었으면 난 절대 못 믿었을 거다.
"이런 걸로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이 정도도 못 믿으면 그 여자한테 그런 짓 하라고 보내지도 않아."
"크흑. 사, 사라야…."
중간에 말이 많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렇다니까.
역시 우리 사라야. 오빠도 널 사랑한다 사라야. 동네 사람들, 이게 바로 우리 사라에요.
"변명도 너무 바보 같은 게 오히려 구원이 할만한 행동이라 수긍되고."
야. 방금 그 사족은 필요했냐? 사람이 모처럼 감동하고 있는데.
"아무튼 사정을 대충 알았으니, 나머지 얘기는 내일 마저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세."
아무튼 얘기가 대충 정리되자 디아나가 나서서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뭐, 그야 그렇지. 밤이 너무 늦기도 했고, 푹 쉬고 온 나만 멀쩡하지 바넷사는 온종일 날 기다리느라 지쳤을 테니까. 다른 애들도 언제부터 이렇게 로비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노릇이고.
"그럼 구원씨.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은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추기경님…."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디아나의 말에 따라, 다들 내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모두가 하나같이 마틸다에게 날 맡긴다는 느낌으로 아이 컨택트를 하는 것이, 상당히 신경 쓰였지만.
진짜로 내 몸 상태는 괜찮은데 말이야.
"바넷사도 오늘은 미안. 가서 푹 쉬어. 괜히 내일도 마차 몰아야 하니까 오늘 밀린 일이랑 내일 할 일 모두 처리한다면서 무리하지 말고. 마차라면 꼭 네가 몰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이 녀석, 내가 말 안 하면 분명 무리할 생각이었겠지.
"당신, 가죠."
그리고 모두가 자리를 벗어나고 나자, 마틸다도 내 팔을 끌어안아서 가볍게 팔짱을 끼고는 방으로 날 이끌었다.
"미안. 늦어서."
마틸다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비누 향과, 그럼에도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머리카락을 보고 나는 다시금 마틸다에게 미안해졌다.
마틸다는 이렇게 머리가 다 마를 정도로 일찍부터 씻고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나는 잠이나 자느라 모처럼 같이 보내는 밤에 늦어버리다니.
"괜찮아요. 어차피 밤에 잘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푹 자고 오신 거잖아요?"
게다가 우리 사람 좋은 추기경님은, 내 사과를 오히려 장난스럽게 받아주기까지 하셨다.
진짜로. 핑크빛 모드만 아니면 이렇게 어른스럽고 완벽한 여자란 말이지.
아니. 물론 핑크빛 모드가 되는 것도 귀엽지만 말이야. 오히려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섭섭할 정도로.
"물론! 밤새 못 자게 해줄 테니까 각오해."
뭐, 아무튼 마틸다의 노력을 헛되이 할 수도 없었으니, 나는 안 어울리게 진지한 분위기를 잡는 건 집어치우고 같이 장난스럽게 가기로 했다.
"후훗.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마틸다. 이런 때에는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 달라붙어도 된다고?
헤어질 때 우리 애들한테 부탁받기도 했으니, 괜히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 달라붙으면 내가 무리할까 봐 자제하고 있는 걸까?
"자, 그럼 당신. 와주세요."
방에 도착하자마자, 마틸다는 침대에 다리를 쭉 뻗고 비스듬하게 앉아서 상의를 살짝 풀어헤쳤다. 자신의 새하얀 한쪽 어깨와, 속옷에 감싸인 풍만한 가슴 윗부분만 살짝 보이도록.
무척이나 흥분되는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위화감도 조금 느껴졌다.
일을 치르려고 하는데도 핑크빛 모드가 안 되다니. 진짜 일부러 자제하고 있는 건가?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자제심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몰아붙여서 강제로 핑크빛 모드가 되도록 할 수밖에.
"진짜로 밤새 괴롭힐 테니까 각오…."
그런 각오를 다지면서 당장 옷을 벗어 던진 나였지만, 도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 안 씻고 그냥 왔잖아.
워낙 정신이 없어서, 물의 정령조차 부르지 않고 그냥 옷을 입고 와버렸다.
젠장. 아까 마틸다의 비누 냄새를 맡았을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왜 이게 이제야 생각이 나는 거야.
"당신? 왜 그러시나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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