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60화 (84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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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잠깐만 들어봐. 사라가 어디까지 설명해줬는지 모르겠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아까는 펠리시아 가면을 벗기고 싶어서 이것저것 해봤던 나였지만, 그래도 이런 이유로 이런 표정을 짓는 게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내 여자도 아닌 애한테 이렇게 변명을 하자니 조금 묘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애초에 지금 우리 관계부터가 묘한 관계니까.

    그렇게 나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나는 2주 동안 던전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설명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펠리시아는 내 말에서 뭔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어디까지 설명하라고 보낸 게 아니었어?"

    "응? 아, 응. 걔가 웬일로 자기가 스스로 오겠다고 하더라고. 너 은근히 사라랑 친해지고 싶어했잖아.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이 성자님의 눈은 못 속인다고. 잘 됐잖아? 좀 친해졌냐?"

    "…그렇구나."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굴러 온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지.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펠리시아를 놀려봤지만, 펠리시아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할 뿐 내 장난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조금 치사하지 않냐? 난 매번 귀찮다고 하면서도 네가 해주는 장난을 대부분 받아주는 편인데.

    뭐, 아무튼 이걸로 표정이 펴지지 않는다면, 처음 예정대로 사정 설명이나 하자.

    나는 내가 그 지옥에서 겪었던 일을 펠리시아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크흑. 돌이켜보기도 싫은 이 악몽을 두 번이나 생생하게 묘사해야 하는 처지가 되다니.

    "그렇게 된 거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지옥이었지만, 그래도 얘기만 들어도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조금은 알겠지? 그래서 엄청 피곤했던 거라고."

    "……."

    하지만 내 변명을 다 듣고 나서도, 펠리시아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얘가 장난이 심해서 귀찮기는 해도 속이 좁은 애는 아니니까, 사정만 설명하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내 여자도 아닌 애가 계속 이런 반응을 보이면 슬슬 변명하기도 귀찮아져서 ‘난 사정 설명 다 했으니까 나머진 너 알아서 해라.’라는 태도로 나갔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완전히 내 잘못으로 프라이드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주님의 프라이드를 철저하게 짓밟아버린 거니까 말이야.

    아무리 쓰레기인 나라도 귀찮다고 대충 넘어갈 생각은 안 든다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고통받았는데, 심지어 잠까지 못 자고 온 거라고. 진짜 성자가 되고 처음으로 물건도 제대로 안 설정도로 피곤했어. 결코, 네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네 매력은 세계 최고의 미녀들을 끼고 있는 내가 보증해 줄 수 있어. 그리고 너도 내가 넣자마자 싸는 거 봤잖아? 너 설마 내가 제 컨디션에도 그렇게 찍 싸버릴 조루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잖아? 너도 내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그러니까 그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솔직히 나도 얼마 전에 차버린 주제에 이렇게 매력적이라고 띄워 주는 게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괜히 헛된 희망을 불어넣게 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입에 발린 말로 들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러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안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농담까지 섞어가면서 변명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펠리시아는 내가 예상과는 다른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잠을 못 잤어?"

    "그래! 실…."

    잠깐만. 이거 안 좋은 흐름 아니야?

    아무리 실비아가 얘랑 절친한 사이라고 해도, 실비아랑 날밤을 새우느라 못 자고 여기서 잤다고 하는 건….

    "아아…실비아 때문에 못 잤구나. 실비아도 그래서 안 데려온 거였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안 건지, 펠리시아는 곧장 이해했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 실까지만 말하고 멈췄잖아?! 그것만 듣고 어떻게 나머지 말을 다 파악하는 건데?!

    진짜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이런 애들이 많아?!

    …실은 우리 애들이 내 마음을 잘 읽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알기 쉬운 놈이었던 거 아니야?

    "하아아아…."

    펠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 얼굴에 우울한 기색은 사라져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우울한 기분이 사라진 건 아니고, 가면을 뒤집어쓸 여력은 생겼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알았어, 자기. 그러면 우리 내일 다시 보기야?"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 갑자기라니. 전혀 갑자기가 아니거든? 자기 잊었어? 자기가 내 침대에서 쿨쿨 자느라, 나도 성욕 해소 전혀 못 했다니까? 괜히 더 달아오르게만 만들어놓고. 자기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책임져야지. 아니면, 내일이 아니라 오늘 책임질래?"

    그렇게 말하면서, 펠리시아는 손가락으로 방 한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창문 쪽을.

    그리고 그제야 나는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난 보통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다 보니,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

    위험해. 대체 얼마나 잔 거야? 내가 아침 일찍 찾아왔으니까…진짜 망했다.

    그냥 자고만 왔다고 하면 믿어줄까?

    "아하하하. 자기 오늘 돌아가서 또 혼나겠네?"

    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옆에서 펠리시아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이, 이 녀석…그냥 가면 쓴 건 줄 알았더니. 아예 눈가에 눈물까지 맺히면서 웃는 거 봐.

    혹시 내 생각보다 훨씬 대인배라서, 실비아 때문에 못 자고 여기 와서 잤다는 설명을 듣고 진짜 기분이 풀린 건가?

    "야이…이게 웃을 일이냐 지금?!"

    "아하, 그치만, 자기 지금 너무 웃긴걸."

    "난 하나도 안 웃기거든!? 나 간다!"

    "잠깐!"

    내가 황급히 옷을 주워입으려고 하자, 펠리시아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 진지하게 날 멈춰 세웠다.

    "뭐, 뭐야?"

    "그래서 대답은?"

    "뭐? 무슨 대답?"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대답. 설마 조루처럼 한 번 찍 싸고 그걸로 이번에는 끝이라는 소리 안 할 거지?"

    아니. 그야 물론 그걸로 성욕이 해소됐을 리가 없고, 나도 일단 책임감은 느끼고 있으니까 내팽개치지는 않을 거지만 말이야.

    "…알았어. 내일 다시 찾아오면 되잖아. 단."

    "단?"

    하지만 아까까지 그렇게 폭소해댄 애한테 그냥 알았다고 해주기에는 억울해서, 나도 펠리시아가 한 것처럼 잠깐 진지한 척을 해봤다.

    "내일까지 내가 살아있으면."

    "아하하하하핫!"

    뭐, 그래 봤자 다시 한번 펠리시아의 폭소만 만들어낼 뿐이었지만.

    "그러니까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것아! 내가 살아남지 못하면 너도 위험해지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웃지 말고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명복이나 빌어!"

    "아하하하핫. 명복은 죽은 사람한테 비는 거 아니야? 자기, 죽어?"

    "시끄러워!"

    "아하하하핫!"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재빨리 벗어 던졌던 옷을 주워입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솔직히 내심 안도하고 있기도 했다.

    겨우 얘랑 평소 같은 분위기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쟤 장난에 내가 안도할 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혹시 내가 장난칠 때 우리 애들도 이런 기분일까?

    "아무튼 그럼 간다! 내일 봐!"

    "…응. 잘 가. 난 여기서 명복을 빌고 있을게."

    "빌지 마! 안 죽어!"

    "아하하핫!"

    끝까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펠리시아를 뒤로 하고 나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아하하하…하아…정말."

    뒤에서 얼핏 들린 것 같은 한숨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

    "아하하하…하아…정말. 울고 싶다."

    구원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 펠리시아는 한숨과 함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고운 손가락으로 훔쳤다.

    "정말, 혼자 들뜨기나 하고. 바보 같아."

    조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로, 펠리시아는 전부 깨닫고 말았다.

    깨닫고 말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지막까지 기대하던 자신이 있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구원이 역시 오늘 책임지겠다면서 남아주지 않을까?

    지금까지 봐온 구원은, 할 일이 생기면 최대한 당장 해결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기대는 펠리시아의 허황된 꿈이었고, 구원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펠리시아는 자기가 얼마나 허황된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저번에 만났을 때, 구원은 펠리시아의 감정을 눈치채고는 거절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펠리시아는 오히려 희망을 품었다.

    사람을 보는 눈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펠리시아는, 그동안 구원과 알고 지내면서 구원의 성격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기본적으로 자기 여자가 아니면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성격이다.

    은근히 정에 약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닐 땐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는 단호함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이, 자신의 감정을 눈치챈 거다.

    그야 펠리시아로서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보니, 조금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가끔 내색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펠리시아가 파악한 구원의 성격이라면, 관심 없는 여자가 고작 그 정도 내색을 한 것 정도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알아채지는 못했을 거다.

    심지어 상대는 바로 얼마 전까지 연애도 사랑도 관심 없고, 그저 쾌락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던 펠리시아 자신이니까 더더욱.

    구원한테 차였다는 앨리시아라는 여자하고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 여자의 감정은 남의 입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고 한다.

    심지어 알게 된 그날 곧바로 찾아가서 대놓고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구원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눈치챘고, 거절할 때도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대놓고 찬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까지 했다.

    그걸 보면서 펠리시아는 구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이어질 여지를 남겨두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고작 그걸로 끝이었으면, 제아무리 펠리시아도 이렇게 긍정적이 되지는 못했을 거다.

    실제로 간접적이나마 차였을 때는 상당히 우울했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구원은 자신에게 이런 명령까지 했다. 계속 자기라고 부르라고.

    자기가 찼다는 자각이 있으면서도, 그런 억지 주장을 부린 거다.

    심지어 그렇게 말할 때의 구원은, 자기가 말하고도 자기가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펠리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거절의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구원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 분명 구원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에 대한 감정이 싹을 트고 있다.

    섹스에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매번 주장하는 구원이니, 아마 자신과도 오랫동안 살을 맞대면서 정이 붙어버린 거겠지.

    어차피 사랑 같은 건 평생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니, 이제 와서 로맨틱한 사랑의 시작까지 꿈꿀 생각은 없었다.

    정이 붙은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 사랑에 승산이 있다는 거였다.

    물론 구원과 자신의 관계는, 서로의 감정만이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었다.

    자신과 구원이 상사상애하는 사이가 되더라도, 자신의 신분상 첩으로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구원과 맺어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비아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본처 셋과만 보내던 밤을 이제는 첩들도 돌아가면서 보낸다는 것 아닌가?

    즉, 처와 첩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펠리시아는 여신님이 자신의 이 사랑을 도와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온세계가 이 사랑을 축복해주고 있는 건지도 몰라.

    나는 구원과 맺어질 수 있어.

    그런 꿈을 꾸다가 갑자기 구원이 의식불명의 중상을 입었다고 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절망했지만, 자신에게만 특별히 사라까지 보내서 사정을 설명했을 때 그 절망은 반대로 희망이 됐다.

    역시 구원은 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다음 날 자기가 곧장 찾아올 거면서,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날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사람을 보낸 거니까.

    하지만, 결국 그건 그저 사랑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진 여자가 꾸는 몽상에 불과했다.

    오늘 일로 확실히 알았다.

    구원은 자신을 전혀 여자로서 봐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서, 사랑 같은 건 하면 안 됐는데."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펠리시아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패배감을, 그리고 실연의 기분을 맛봐야 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전 리시아라는 이름에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앨리시아와 펠리시아가 같은 리시아 돌림이라는 것도 댓글에서 독자님들이 지적해주신 다음에야 알았어요.

    절대 이름 때문에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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