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52화 (83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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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앨리시아와 대면하고 있었다.

    앨리시아는 내 건강해진 얼굴을 보고 뭔가 북받쳐오는 듯,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만 내뱉고는 입을 시옷 모양으로 만들어서 뭔가를 꾸욱 참는 표정을 지었다.

    응. 미안해 죽을 것 같다.

    "약한 주제에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병아리 새끼야. 너 같은 새끼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거기서 위험했을 것 같아? 괜히 나서서 빌빌대기나 하고."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은 건지, 앨리시아는 평소처럼 행동하려는 것 같았다.

    다만 평소처럼 거친 말투로 말하는 그 목소리가 살짝 쉰 것처럼 갈라져 있어서, 괜히 내 죄책감만 더 자극했다.

    으아아! 그만둬! 진짜 얼굴 보기도 미안해 죽겠네!

    거기 만악의 근원 미리엘!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좀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보라고!

    당장 거북이 성기부터 내놓으라고 하든가 말이야!

    왜 뒤에서 팔짱 끼고 가만히 지켜보는 건데?!

    젠장. 차라리 우리 애들이라도 같이 있었더라면 뭔가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사라는 성에, 레이아와 마틸다는 신전에 보냈고, 실비아는 완전히 뻗어서 자기 방에 눕혀놨다.

    그리고 디아나 역시도, 그동안 환영 마법을 계속 써댔던 게 상당히 피곤했는지 지금은 팔자 좋게 자기 방에서 낮잠 중이었다.

    물론 레이첼 누님은 아직도 일하는 중이셨고.

    즉,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바넷사뿐.

    그마저도 문쪽에 자리 잡고 대화에 전혀 참가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나는 홀로 앨리시아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센 척하기는. 솔직히 위험은 했잖아. 뭘 아닌 것처럼 그러냐. 실은 내가 멋지게 구출해줘서 고마웠지? 응? 응?"

    조, 좋아. 우선은 이 울쩍지근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야겠어.

    그러기 위해, 나는 괜히 팔꿈치로 앨리시아를 쿡쿡 찌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앨리시아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거기서 왜 긍정하는 건데?!

    바넷사아! 도우움! 헤에엘프! 야! 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솔직히 내가 이상한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뭐, 뭐!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렇게 전원 무사한 거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아니.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네가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해진다니까?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찬 여자가 괜히 달라붙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운 거냐? 그런 거라면…."

    "꼭 갚아라!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앨리시아의 다짐을 부드럽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앨리시아의 말에 하던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크흑. 젠장. 어, 어쩔 수 없잖아!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 이후로 내가 자길 찬 얘기를 한 번도 안 꺼냈던 애가, 그 얘기까지 꺼낸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 안 어울리게 우울한 표정 짓고 있는 것 좀 어떻게 해봐라! 나 진짜 멀쩡하다니까?! 그냥 내 자랑스러운 아들로 막느라 정신적으로 지쳐서 오래 자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바꾸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억지를 부려봤지만, 그래도 앨리시아는 좀처럼 표정을 펴지 못했다.

    "아, 안 어울리게 우울한 표정이 뭐야?! 나도 미안하면 이런 표정 정도는 짓는다고! 넌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자기 얼굴을 못 봤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매일 그렇게 치료를 하는데도 볼 때마다 점점 더 수척해지기만…."

    그러니까 그게 전부 환영이었다고 이것아!

    디아나 걔는 진짜 얘한테 뭘 보여준 거야?!

    "결국 다시 팔팔해졌잖아! 그리고 어차피 빚은 갚을 거잖아? 그러면 네가 나한테 괜히 죄책감 느낄 필요 하나도 없잖아!"

    "아직 안 갚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배로 갚게 할 거니까 갚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때 가서 괜히 미안해했다고 후회하지 말고 얼굴 펴!"

    "이…멍청한 새끼가…."

    내 계속된 억지 논리에, 앨리시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앨리시아의 눈은 전과 같은 야생성을 되찾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니. 야생성을 되찾았다고 하니까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 내 말은 그냥….

    짝!

    그래. 이렇게 다시 폭력적인 느낌이 살아났다는 거였어.

    후끈후끈 거리는 등짝의 고통을 참으며,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앨리시아를 바라봤다.

    확실히 미안해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때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너, 나 2주 동안 기절해있다가 깨어난 건 알고 있는 거지?"

    "멀쩡하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야 그랬죠.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네가 말한 대로, 이제 안 미안해할 거니까."

    "…그래라."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착해 빠진 새끼."

    앨리시아가 조그만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주먹으로 은근슬쩍 자기 눈가를 훔치는 걸 봤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그러니까 나 착한 놈 아니라고! 오히려 쓰레기라니까?! 매번 스스로 쓰레기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왜 여기 애들은 하나같이 안 믿는 눈치지?!

    "아무튼, 깨어나서 다행이야."

    아무튼 그렇게 내가 분위기를 억지로 평소처럼 바꾸자, 한 발 뒤에 떨어져 있던 미리엘이 드디어 이쪽으로 나서면서 그런 말을 건네왔다.

    좀 빨리 끼어들라고!

    "이번 일은 우리도 책임을 느끼고 있어. 앨리시아를 구해준 것뿐만이 아니라, 너무 서두른 것도. 적어도 네가 거북이굴을 다닐 수 있을 수준은 된 다음에 부탁을 해야 했는데. 전에 와이번의 성기를 얻을 때도 제대로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는데, 우리 욕심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 녀석, 마신과 관련해서 뭘 꾸미려고 하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성격 자체는 진짜로 좋은 놈이다 보니까 뭐라고 하기 힘들단 말이지.

    내가 괜히 정통 무협지 주인공 상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고.

    "아니. 나도 다 감안하고 따라간 거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명백히 내 잘못이 크잖아. 너희도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였으니까 안 그래도 더 조심해야 했는데, 오히려 혼자 뭘 해보겠다고 나서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허리를 숙이고 제대로 사과하는 미리엘의 어깨를 적당히 토닥여주자, 미리엘은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줬다.

    그냥 이복 자매라는 인식이 박혔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미소를 보니까 또 미묘하게 사라랑 닮은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사과하고 나서 이런 말을 하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 그래. 열쇠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 사라랑 미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살짝 뺨을 상기시키며 말 꺼내기 힘들다는 듯 그렇게 운을 떼는 미리엘을 보며, 나는 내가 대신 그렇게 말하고는 인벤토리에서 거북이 성기를 꺼내 줬다.

    "고, 고맙다."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줄 줄은 몰랐는지, 미리엘은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기를 받아들었다.

    야. 다 좋은데 그거 그대로 들고갈 생각은 아니지? 제대로 아공간 주머니 같은 데에 넣어서 가라. 그 크기면 문밖으로 들고 나가지도 못한다.

    "뭘. 됐어. 원래부터 이걸 주려고 따라갔던 건데. 안 주면 내가 그렇게 고생한 보람도 없잖아. 그리고 그런 쓸데없이 부피만 차지하는 물건 오래 가지고 있고 싶지도 않고. 얼른 건네주는 게 나아."

    이걸 안 건네주려고 그 쇼를 한 주제에, 나는 태연하게 너스레까지 떨어줬다.

    어떠냐. 이 완벽한 연기.

    "…앨리시아 말대로, 넌 역시 좋은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사라랑 비슷한 미소 지으면서 쳐다보지 말라고. 정들어 이것아.

    그리고 모처럼 사람이 분위기 수습했는데 괜히 또 어색해지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미리엘!"

    "앗, 미안."

    그렇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 밀크 커피색 피부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볼을 빨갛게 붉힌 앨리시아가 황급히 미리엘을 다그쳤다.

    "기, 기어오르지 마. 별말 안 했어."

    그리고는 마치 날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부라리면서 그렇게 내뱉었다.

    …기어오르기도 전에 협박부터 하지 마라. 무서워서 어디 살겠냐.

    "그럼 우린 이만 갈게. 막 일어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 푹 쉬어."

    "일어났다고 바로 무리하지 말고 새끼야. 아직 환자니까 며칠은 침대에 누워있어. 아직도 혈색이 안 좋아 너."

    아니. 그러니까 나 딱히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니까.

    만약 진짜로 내 혈색이 안 좋다면, 그건 아마 아래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왔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까는 왜 등을 때렸…."

    "또 맞고 싶다고?"

    "아닙니다."

    이상하다. 앨리시아 쟤는 내 여자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맞아주고 있는 거지?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지만, 쟤랑 싸워도 어차피 내가 져서 참아주는 거 절대 아니니까 조용히 해라.

    난 그 쓰레온도 이긴 놈이거든? 성자 스킬을 쓰긴 했지만.

    아무튼 앨리시아한테 이렇게 맞아주는 건…뭐, 죄책감 때문이지. 미안하기는 엄청 미안하니까 말이야.

    "야. 바넷사."

    그렇게 미리엘과 앨리시아를 돌려보내고, 나는 곧장 바넷사를 불렀다.

    "…뭡니까."

    넌 그러니까 왜 내가 부르기만 해도 그렇게 경계하는 건데?

    그야 내가 그럴만한 짓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지금도 그럴 거고.

    "방금 쟤들이 한 말 들었냐?"

    "…잘됐군요. 착하단 말을 들어서.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내 질문에, 바넷사는 미묘하게 눈을 더 차갑게 만들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그거 말한 거 아니거든?! 그런 차가운 눈으로 보지 마!

    내가 고작 그런 칭찬 하나에 들뜨는 푼수 같잖아!

    "그거 말고! 혈색이 안 좋다는 말!"

    "…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바넷사는 겨우 눈에서 힘을 풀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얘는 사람을 뭐로 보고. 너 나 좋아하잖아. 좋아하면 좀 내가 그 정도로…아, 그런가. 혹시 날 푼수 취급한 게 아니라, 다른 여자 칭찬해 좋아하니까 질투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아까 그 차가운 시선도 예뻐 보이는데.

    "네 눈엔 어때? 네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

    "편찮으신 곳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기절한 것도 거짓말이지 않았습니까.

    마치 그렇게 말하듯 쳐다보는 바넷사였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아까 말해줬잖아. 아래에서 엄청 고생하고 왔다고. 그 영향으로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어때 보여? 가까이 와서 자세히 봐봐."

    "……."

    아무리 바넷사라도 안색을 봐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바넷사는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다가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내 얼굴을 빤히 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멋진 미소와 함께 윙크를 해줬다.

    "조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기는 하는군요."

    하지만 내 회심의 윙크에도 바넷사는 얼굴 근육 하나 꿈틀하지 않고, 완벽한 무표정으로 다시 허리를 펴고 그렇게 내뱉었다.

    …야. 상태가 안 좋다는 건, 당연히 내 혈색 말하는 거지?

    이번에는 살짝 마음이 꺾일뻔했지만, 내 굳건한 마음은 이번에도 굴하지 않았다.

    나는 그 지옥에서 제정신으로 살아 돌아온 멘탈의 소유자라고. 이런 일로 꺾일까 보냐.

    "그래? 역시 그런가? 역시 조금 치유가 필요한 모양이네. 도와줘."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곧장 바넷사의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침대 위로 눕혔다.

    "…역시 이럴 생각이셨군요."

    안 그래도 경계하고 있던 바넷사는, 침대에 누워서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는 무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며 예상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으면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전력을 다해서 재빨리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저항 안 해? 평소에는 지금은 집사라니까 안 됩니다. 일하는 중이니 방해하지 마십시오. 같은 말을 하면서 저항하잖아."

    "…치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사실이니까요."

    바넷사가 보여준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놀라서 살짝 떠봤지만, 바넷사는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럼 뭐야.

    "그러니까 지금은 내 여자가 아니라 집사지만, 내 치료를 위해 당해줄 뿐이다? 어디까지나 집사 일의 일환으로?"

    "그렇습니다."

    허허. 얘 봐라. 또 승부욕이 불타오르게 만드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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