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51화 (835/1,205)
  • <-- 5.5계층 -->

    "아, 그런가."

    내 직업도 그렇고 그런 쪽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우리 여신님은 딱히 섹스의 신 같은 게 아니다.

    우리 여신님은 바로 대지의 여신.

    그리고 만물의 어머니인 우리 여신님이 성행위를 적극 권장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즉, 쉽게 말해서 여러 종족끼리 다양한 아이를 많이 가지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여신님이, 아무리 전쟁신 쪽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을 할까?

    여신님 식으로 말하자면, 그쪽 사람들도 그 나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건데 말이다.

    아니. 애초에 던전 아래에 전쟁신 쪽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내 망상이지만.

    "그래요. 그리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마신의 정체는 전쟁신이라고. 그것만 봐도, 여신님과 마신이 대립하는 이유는 명백하지 않나요? 전쟁은 사람들 사이에 피를 흘리게 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가능성을 지워버리게 하는 행위니까요. 그런 이유로 전쟁신과 대립하는 여신님께서, 사람을 해치게 하려고 당신을 보내셨을 리가 없어요."

    오, 오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마신의 정체가 전쟁신이라는 걸 알고도 딱히 그 점에 대해선 곰곰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마틸다의 얘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우리 여신님이 전쟁신과 대립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이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전문가는 다르다고 할까?

    조금 전까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안 쓰고 내 목덜미에 키스하는 것만 집중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통찰력이었다.

    "당신은 여신님의 사자라는 사람이 가끔 보면 여신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가끔은 저와 같이 신전에 다니면서 예배라도 드리는 게 어떠신가요?"

    "끝나고는 같이 연습실에 가서 진하게 성교육 실습도 하고?"

    이렇게 말하면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 다시 찰싹찰싹 달라붙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잘록한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농담을 던져봤지만, 의외로 마틸다는 오히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날 꾸짖었다.

    "당신. 전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뭐, 다시 생각해보면 그야 이렇게 나오겠지. 추기경님이시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여신님 얘기를 하는데 핑크빛 모드가 될 리는 없지.

    "뭐, 아무튼 적어도 내 사명이 그런 건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 다행이네. 고마워. 마틸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었어."

    "아뇨…저도 사랑해요…."

    저도라니. 난 딱히 사랑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 그야 물론 사랑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니. 그보다 너, 결국 다시 핑크빛 모드로 돌아가는 거냐. 또 모처럼 추기경님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더니.

    "후훗."

    레이아도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 모습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그 미소가 마치 ‘어때요? 얘기하니 편해졌죠?’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마지막 소계층에서의 경험이 무엇에 대한 예행연습이었는지는 의문으로 남게 되는구먼."

    "그러네. 뭐, 마지막에 있는 적이 잡기 공격을 주로 한다든가. 그런 거 아닐까?"

    "흐음. 확실히 그런 식의 공격을 하는 몬스터가 거의 없기는 하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디아나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쟤가 또 은근히 저런 건 궁금해서 못 참는 성격이니까 말이야.

    "뭐, 그것도 아래로 내려가면 확실해지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지옥에서의 경험이 내게 뭔가 도움이 됐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지만.

    그래도 여신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아래로 내려가면 알게 되겠지.

    "아무튼 그럼 이 얘기는 이쯤하고, 우선은 아라크네에 사람부터 보내야지."

    아래에서 며칠이 지났는지 세보지를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꽤나 오래 걸렸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소계층이라고는 하지만 계층 하나를 완전히 답파하고 온 거니까.

    그런 만큼, 아라크네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최대한 서두르지 않으면.

    솔직히 내가 고작 그걸로 며칠 동안 기절해있다고 거짓말한 것도 억지가 심했으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라크네에서는 별말 없었어?"

    "왜 없었겠는가? 앨리시아양뿐만 아니라 미리엘양이나 다른 간부들까지 자네의 병문안을 왔었다네."

    진짜냐. 하긴 미리엘 걔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그 무협지 주인공 성격 같은 녀석이라면 며칠 동안 기절해있는 내가 순수하게 걱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어? 설마 전처럼 섹스로 치료하는 척하고 돌려보냈어?"

    "디아나씨의 마법으로 환영을 보여 드렸어요."

    아, 그런가. 역시 우리 대마법사님.

    이런 판타지 세계에서 자주 쓰이는 말 중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지만, 마력이 충분한 우리 대마법사님의 마법이라면 정말 만능인 게 아닐까?

    "정말 큰 일이었다니까."

    "드, 들키지 않았으니 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감탄한 나와 달리, 어째선지 사라는 살짝 한숨 섞인 투정을 부렸다.

    디아나도 그 태도를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하는 눈치였고.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조금 자네가 아파 보이도록 환영을 만들었을 뿐이네."

    "덕분에 구원 모습이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안 좋아졌다면서 그 여자는 대성통곡을 했고."

    "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주일이 넘도록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걸세! 안색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나 그 지옥에서 이주 넘게 있었던 거구나.

    장하다, 나. 아주 잘 버텼어.

    "덕분에 성자가 죽어간다는 소문이 퍼져서, 성에서 그 여자까지 병문안을 오고. 며칠만 더 늦었으면 교황청에서 교황님까지 찾아왔을걸?"

    사라야. 아까부터 그 여자 그 여자 해서 헷갈리는데, 처음 말한 대성통곡했다는 그 여자는 앨리시아고, 나중에 말한 성에서 왔다는 그 여자는 펠리시아라고 해석하면 되는 거지?

    나한테 차였을 때도 일단 내 앞에서는 안 울었던 그 앨리시아가 대성통곡을 했다고?

    그리고 뭐? 그 펠리시아가 굳이 성 밖으로 나와서 병문안까지 왔다고?

    "…그리고 펠리시아도 내 아픈 모습을 봤고?"

    "이, 이 몸은 잘못한 것 없네."

    아니. 나도 딱히 탓할 생각은 없어. 정말로 잘못한 건 없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진짜냐. 너희는 모르겠지만, 펠리시아 걔도 날 좋아한단 말이야.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차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동까지 한 다음인데.

    그러고 나서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봤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느낌이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펠리시아의 성욕을 달래주러, 나는 멀쩡한 모습으로 성에 가야 하고.

    물론, 가자마자 아픈 건 거짓말이었다는 말까지 덤으로 해주면서.

    ……나 너무 쓰레기 되는 거 아니야?

    "실비아. 실비아."

    "네헤에에…."

    나는 내 허벅지 위에서 거의 천국에 끌려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노곤 노곤해져 있는 실비아의 몸을 잡아 흔들었다.

    얘는 또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네.

    실비아야. 지금 죽어갈 때가 아니라니까?

    "혹시 펠리시아한테 몰래 귀띔해주지 않았어? 나 사실 아픈 거 연기라고."

    제발 그렇다고 해줘.

    만약 그마저도 안 해줬으면, 나 나중에 펠리시아 걔 얼굴 볼 때 어색해서 대체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모르게 되잖아!

    "비, 비밀은…."

    "비밀은?"

    "아는 샤람이 져글 슈록…효가가아…."

    으아아아아아! 그야 당연히 그렇지만! 진짜냐?!

    너 남몰래 펠리시아의 사랑을 응원하고 도와줄 정도로 걔랑 친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하필 이럴 때만…그야 내가 농담조로 말해서 그렇지 일단 진짜로 세계의 위기와도 관련된 일이니까 중요한 일인 게 맞기는 하지만!

    "쥬이에 샤라미 너무…."

    …그것도 그렇겠지.

    공주님이니까. 그야 사람들 엄청 대동하고 왔겠지.

    아무리 소꿉친구이자 호위기사 출신이라도 단둘이 얘기할 틈 따위 없었겠지.

    "실비아아아아!"

    "햐으으으읏!? 아, 아, 아으햐아…."

    아무도 탓할 건 없다. 없지만….

    뭐라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서 실비아의 정수리에 뺨을 격하게 비벼대자, 몸을 떨 기력도 없어서 노곤하게 늘어져 있던 실비아가 한차례 몸을 격렬하게 떠는가 싶더니 갑자기 전원이 끊어진 것처럼 축하고 늘어졌다.

    말해두지만, 죽은 거 아니니까.

    나중에 애들 몰래 속옷이나 갈아입혀 줘야지.

    "아무튼, 그럼 바넷사. 아라크네 클랜에 사람이나 보내줘. 그리고 교황님 쪽은…마틸다, 부탁해도 될까? 뭔가 소동이 커진 것 같은데."

    "네에?"

    아, 이 녀석 다시 핑크빛 모드로 돌아와 있었지.

    잠깐. 얘 지금 손을 어디에 넣고 있는 거야?! 그것도 다른 애들은 안 보이는 각도로!

    그런 상태인 주제에 너무 용의주도한 거 아니냐?!

    너 진짜 저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러는 거지?!

    "레이아. 부탁 좀 해도 될까?"

    나는 은근슬쩍 마틸다의 손을 내 옷 안에서 빼면서, 레이아에게 부탁했다.

    어차피 마틸다 얘가 신전에 가려면 누구 하나 붙어있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럴 땐 우리 천사님이 제격이었다.

    천사님의 가슴이 팔에서 떨어지는 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네. 추기경님. 같이 가요."

    "아, 자, 잠깐! 당시인!"

    "마틸다. 부탁해."

    "아아…네에…당신을 위해서라면…."

    물론 마틸다는 세상 서글픈 목소리로 내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항을 했지만, 저 상태가 되면 또 내 말은 잘 듣는단 말이지.

    핑크빛 모드인 채로 끌려나가는 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내가 없으면 아마 곧장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그렇겠지?

    "그 여자 쪽에는 아무도 안 보내?"

    사라야. 그러니까 그 여자라고 하면 헷갈린다니까.

    뭐, 아라크네 클랜이랑 신전에 사람을 보냈으니, 남은 건 성뿐이지만.

    "어차피 나도 성에 가야 하니까, 그때 직접 말하려고. 오해를 풀려면 우리 중 누가 직접 가서 얘기해야 하는데, 실비아는 지금 이 상태고."

    그렇게 되면 펠리시아만 내가 깨어났다는 정보를 조금 늦게 접하게 되는 거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런 내 대답에, 사라는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그러면 내가 다녀올까?"

    "어, 어?"

    "…왜 그렇게 놀라는데?"

    "아니. 그야 너 펠리시아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일단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혼자 구원이 멀쩡한 것도 모르고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으면 불쌍하잖아."

    …진짜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라가 펠리시아를 저렇게 신경 써 준다고?

    혹시 앨리시아만 그런 게 아니라, 펠리시아 걔도 내 아픈 몸 끌어안고 대성통곡이라도 했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펠리시아 걔 이미지상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러면 대체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사라가 저렇게 동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속으로 머리를 쥐어 잡는 내게, 사라가 추격타를 날려왔다.

    "안 그래도 구원한테 차여서 머릿속이 복잡할 텐데."

    "무, 뭐?!"

    "역시."

    핫?! 서, 설마 떠본 거였어!? 아니. 애초에 떠볼 정도로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대체 어떻게 안 건데?! 얘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내 마음 읽는 거 아니야?!

    "으아아! 그 이상 내 속마음을 엿보지 마!"

    "바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정도는, 그 여자 반응을 보면 누구나 안다고. 그렇죠, 디아나?"

    "으음. 처음부터 이이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였는데, 그런 반응이었으니 말일세."

    그런 반응이라니 대체 뭔데!?

    "이 바보는 찼으면 찼다고 얘기라도 하지. 그 여자 때처럼 또 그냥 넘어가려고."

    그러니까 사라야! 그 여자라고 하면 헷갈린다니까!

    물론 내가 펠리시아 말고 찬 여자라고는 한 명밖에 더 없지만!

    아니. 애초에 펠리시아는 찼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니까?

    아니. 그보다.

    "다 눈치챘으면서 펠리시아랑 계속 관계를 맺게 해준다고?"

    "…어쩔 수 없잖아. 마음이랑은 별개로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 체질 같으니까. 그 여자, 여기 왔을 때도 엄청 위험해 보이는 상태였는 걸."

    …하긴. 생각해 보니 그야 그렇겠지.

    걔 성욕을 풀어준 것도 벌써 이주나 넘게 지났으니까.

    게다가 사라는 폭주한 펠리시아의 기운을 마신 적도 있는 만큼, 펠리시아가 싫은 것과는 별개로 걔가 얼마나 힘들지는 이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착해 빠졌다니까.

    "너 그러다가 언젠가 다른 여자한테 나 뺏긴…."

    "그러면 그 여자도 죽이고 구원도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아직 말도 안 끝났거든!? 무서워 이것아!"

    "농담이야. 안 그럴 거라고 믿어."

    "거짓말 하지 마! 눈이 완전 진심이었거든?!"

    하여간 누가 전쟁신의 가호를 받은 용사 아니랄까 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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