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50화 (834/1,205)
  • <-- 5.5계층 -->

    "그런 끔찍한 지옥을 겪고 와서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봐. 그러니까 레이아랑 마틸다, 실비아한테만 맡길 게 아니라 너희도 얼른 나한테 달라붙어서 위로를…."

    "이 몸은 앞으로 아라크네 클랜을 자유롭게 풀어놔도 된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하네만. 자네 말대로라면 그 정체불명의 그림을 해석할 수 있어야만 6계층의 밑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디아나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네 낭군님이 정신 붕괴의 직전까지 몰렸다가 온 거라고! 너 내가 4계층에서 조난당했다가 구출되고 난 다음에는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거 아닌지 엄청 걱정했었잖아!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들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나한테 달라붙어서 멘탈 케어를…."

    "은근슬쩍 레이아양과 마틸다양의 가슴에 가져가려고 하는 그 손부터 멈추고 거짓말을 하게!"

    나는 그렇게 엄살 부리며 디아나도 내게 달라붙도록 하려 했지만, 디아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 주먹 쥔 손의 손바닥 부분으로 내 머리를 콩닥콩닥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크윽. 젠장! 들켰나. 잘만 엄살 부리면 지금보다 더 하렘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 지옥에서 돌아온 다음 이런 가슴이 팔에 닿고 있는 거라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 거잖아.

    "바보. 애초에 진짜 힘들면 말도 안 하는 성격이면서."

    그리고 사라도 차가운 눈으로 내게 핀잔을 줬다.

    야. 아무리 그래도 고생하고 온 건 사실이니까 조금은 어리광을 받아줘도 되지 않냐.

    "레이아하고 마틸다씨도…마틸다씨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레이아도 레이아에요. 레이아가 항상 그렇게 어리광을 받아주니까…."

    마틸다. 너 사라한테까지 저런 취급 당하고 있다고. 정말 괜찮은 거냐?

    아니. 뭐, 이 모습을 보면 저런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하지만…귀엽잖아요."

    "크흑. 천사니이임…."

    "꺅! 어머어머. 후훗."

    천사님의 너무도 상냥한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옆으로 향하고 푹 숙였다.

    물론 목표는 천사님의 가슴이다.

    "후우…훗."

    나는 천사님의 윗가슴에 얼굴을 한차례 비벼주고, 그대로 뺨을 댄 체 고개만 살짝 돌려서 사라와 디아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보여줬다.

    "이이…! 떨어지게! 떨어지게!"

    물론 그 대가로 디아나의 토닥토닥 러쉬를 받게 됐지만, 그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다!

    "이 변태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디아나, 비켜봐요."

    "으드드득…."

    어, 어라? 야. 잠깐만 타임. 간지럽지도 않은 건 어디까지나 디아나 얘기지, 네가 아니거든?!

    그리고 바넷사! 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으로 서 있는데 말이야, 너 지금 은근슬쩍 이갈지 않았냐?

    너도야?! 너한테도 도발이 들어간 거야?!

    "잠깐! 타임!"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너희 진지한 얘기 중에 지금 뭐하는 거야!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일단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아야!"

    완벽한 타이밍에 호흡을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사라한테 등짝 스매시를 한 대 맞을 수밖에 없었다.

    뭐, 천사님의 가슴에 대놓고 얼굴을 비벼대면서 자랑해놓고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아무튼 6계층의 주인이 있던 방으로 가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는 얘기네."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운 후, 우리는 드디어 진지하게 얘기를 하기로 했다.

    아, 참고로 여전히 실비아는 내 위에 있고, 레이아와 마틸다는 내 양옆에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치유가 필요한 때라서 말이야.

    사라와 디아나도 내가 아래에서 겪었던 얘기를 듣고 느끼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은 건지, 내가 아까처럼 노골적으로 어딜 만져대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적당히 눈감아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래. 아마 그렇겠지."

    사실 마틸다가 계속 던전에 다닐 수 있었다면 아래에서 마틸다의 스킬 레벨을 올려 여신 강림을 쓰는 게 더 빨랐겠지만, 마틸다가 던전에 다닐 수 없게 된 이상 그게 제일 빠르겠지.

    비록 이번에 발견한 그림에서는 계약에 관한 자세한 얘기가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 그림조차도 쓸데없이 긴 내용을 담고 있었던 거다.

    6계층 주인의 방에 있다는 그 그림은,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뿐 아니라 계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더 쓰여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설마 그게 뜻을 가진 문장이었을 줄이야. 이 몸은 그저 그들을 상징하는 문양이라고만 생각했었네만. 그러면 혹시 오크들이 가지고 다니던 깃발의 문양도 자네 눈에는 뭔가 다른 뜻이 내포한 것처럼 보였던 겐가?"

    "아니. 그건 그냥 그림이었어."

    그러고 보니 오크 부락에도 뭔가 깃발 같은 게 걸려있었지.

    주술사 놈은 몸에도 뭔가 문신 같은 게 있었고.

    과연. 보스 방에 그런 수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도 날고 기는 베테랑 모험가들이 다들 그 그림을 해석해보려 하지 않았던 것도, 선례가 있었기 때문인가.

    혹시 여신님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오크를 위쪽에 배치한 걸까?

    "그러면 자네, 혹시 그림이 어떤 모양인지는 기억하는가? 그림과 자네가 말한 해석을 대조해보면, 어쩌면 그 문자의 구조를 해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만."

    아무래도 우리 디아나는, 자기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문자의 등장에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 제일 크니까 가려지기 십상이지만, 우리 머리 좋은 디아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미지의 것에 호기심이 왕성하니까 말이야.

    "아니. 아마 그 그림 자체에 뜻은 없다고 생각해. 나 같은 사람이 보면 자연히 그런 문장으로 해석되게 마법적인 처리를 한 느낌이라고 할까."

    "오오! 그런 식의 마법 처리인가! 자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언제 시간 날 때 다시 한번 들러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냥 새로운 문자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형식의 마법 같다는 내 대답에, 디아나는 더욱 눈을 빛냈다.

    아니. 너 어차피 6계층 보스가 있는 방에서도 그림을 봤던 거잖아.

    그때도 마법적 처리 같은 걸 느끼지 못했으니, 거기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6계층에 간 다음에 그쪽에서라면."

    하지만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디아나에게 그런 매정한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나는 슬며시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미안. 디아나야. 네 바람은 나도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 근육빡빡이 소굴을 다시 지나갈 생각은 안 들어.

    아무리 땀내나는 남자팟이 아니라 너희랑 같이 간다고 해도, 아니. 너희랑 같이 가기 때문에 더더욱.

    내 여자들 눈에 그런 더러운 광경이 비치게 할 수는 없지.

    "그건 그렇고 데려갔다는 두 사람은 어때? 제대로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오, 웬일이야? 그렇게나 날 인정해주고."

    "…바보. 사람 보는 눈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사라는 눈으로 여기 있는 면면을 쭉 훑었다.

    하긴. 그것도 그런가. 내가 맨날 장난삼아서 내가 여자 보는 눈 하나는 최고라고 말하고 다니니까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거 진짜니까.

    사라도 그 점만큼은 완전히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훗. 내가 이렇게 내 여자들한테 인정받는 남자입니다.

    …아까 등짝 스매시 맞지 않았냐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원래 남자라는 생물은 자기 여자한테 등짝 스매시도 몇 대 맞으면서 사는 법이라고!

    "뭐, 괜찮을 거야."

    호랑이는 내 말이라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시늉이라도 할 정도로 날 추앙하고 있고, 정의 변태는 별명답게 진짜로 정의심 하나는 투철하니까 말이야.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이자 세계의 위기와 관련된 일이라고 못을 박아뒀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거다.

    물론 정의 바보 주제에 은근히 권위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고.

    권위로 밀어붙이는 걸 따지면 날 이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지도 의문이니까 말이야.

    나 자신은 성자고 대법사와 고위귀족 기사와 추기경을 애인으로 두고, 공주이자 여기 영주하고는 섹스 프렌드나 마찬가지인 사이니까.

    "하지만, 예행연습이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네요. 어떤 의미인 걸까요?"

    "글쎄? 기껏해야 우리가 잡아야 할 적이 잡기 공격을 주로 한다든가, 뭐 그런 거 아닐까? 그거랑 고추밭이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데랑 딱히 다른 점이…."

    "구원씨? 왜 그러세요?"

    내가 하던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천사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내 얼굴을 엿보셨다.

    그러면서 그 가슴이 내 팔에 더더욱 눌리기까지 했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도 못 쓸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육빡빡이들이 다른 몬스터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이 하나 더 있기는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인간과 흡사한 외견을 하고 있고, 비록 머슬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지만 무슨 뜻인지 내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구사한다는 점 말이다.

    아니. 그야 물론 내가 몬스터라고 규정하고 학살했을 만큼, 인간과 완벽히 똑같은 외모는 아니었다.

    피부는 인간의 피부색으로는 있을 수 없는 완벽한 검은색이었고, 머리에는 뿔도 달려있었고, 다 벗고 있는 주제에 주먹이나 팔꿈치, 무릎, 발과 같은 곳은 갑각으로 뒤덮여있었다. 피부의 질감 자체도 인간의 피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자마자 인간이랑 닮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인간과 흡사한 외견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지만.

    우리가 아래에 가서 처리해야 하는 건 마신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인 거 아닐까?

    아니. 물론 내가 같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질질 짜는 평범한 성장물 스토리의 주인공 같은 성격은 아니다.

    비록 사라의 원수라고는 하지만, 포츠 새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5.5계층은 고추밭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최종 목표의 상대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냄새나는 사내놈일 가능성이 컸다.

    솔직히 나는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애들은 다르다.

    사라는 그 포츠를 처리하고 나서도 뭔가 우울한 반응을 보였을 만큼 생각 외로 마음이 여리다.

    그리고 디아나도 예전 가출 사건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원래는 마법을 정립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할 만큼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가출한 건 마법사 협회 사람들이 너무 달라붙으니까 그랬던 거고 말이다.

    게다가 틈만 나면 빈민가로 봉사 활동을 가는 레이아나, 원래는 누구에게나 온화해서 누구보다 성녀가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마틸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애들인 만큼, 만약 우리의 최종 목표가 사람을 죽이는 거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실비아는 조금 괜찮으려나? 애초에 기사인 만큼 원래는 사람 상대로 싸우는 일이 주 업무였을 테니까.

    "아, 아니. 아무것도."

    "…구원씨."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레이아는 그렇게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저희한테 숨기는 건 없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나는 점점 마음이 약해져 갔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구원씨."

    "…어쩌면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건, 마신이나 강력한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했잖아. 5.5계층의 몬스터들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몬스터들보다도 인간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내 눈에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 말해줄 때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레이아의 태도에, 결국 나는 머릿속에 떠올랐던 가정을 바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 내 목덜미에 키스만 해대던 마틸다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내 가정을 부정해줬다.

    "여신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들이 지닌 가능성을 하나라도 더 많이 보고 싶어하시는 분이에요. 저희가 성행위를 신성시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