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48화 (83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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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6계층의 주인이 있는 장소에도 이와 같은 문양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듀크가 가리킨 곳의 벽에는, 작지만 확실히 무언가 그림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계층 사이를 오가는 통로에 뭔가가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쳤지만, 듀크는 베테랑 모험가답게 통로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다른 곳도 아니고 6계층의 주인이 있는 장소에 있던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그런 거겠지. 여기가 뭔가 다음 계층으로 내려가는 실마리라는 거다.

    즉, 특별한 수컷 개체를 찾으려고 그 지옥에서 다시 고생할 필요가 없다!

    "새끼! 잘했…!"

    생각지도 못하게 희망을 되찾은 나는, 문양을 살펴보기에 앞서 일단 듀크를 끌어안아 감격을 표하려고 했다.

    평소의 나라면 더러운 사내새끼 몸을 끌어안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턱.

    하지만 듀크는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는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턱 막고는, 아녀자를 희롱하는 변질자의 앞에 나설 때보다 더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 몸으로는 그만두십시오."

    그 표정이 마치 외계인 아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폭풍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만큼이나 엄숙해서, 나는 쓸데없이 더 열이 받았다.

    빡!

    "끄어어어…."

    후우. 이러니까 속이 조금 후련하네.

    아까까지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함부로 이럴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던전에서 몇 없는 완벽한 안전지대에 있는 거니 얼마든지 응징을 가할 수 있었다.

    녀석의 턱에 주먹을 클린 히트시켜주고, 나는 벽에 있는 문양이나 살펴보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6계층의 영향인지 우리가 있는 통로 속은 유난히 더 어두웠다.

    맨눈으로는 문양이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살펴보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다.

    듀크 이놈은 잘도 이런 걸 발견했네. 뭐, 이게 바로 베테랑 모험가라는 건가.

    일단 나도 지나온 계층만 보면 베테랑 모험가 축에 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파티는 압도적인 능력치를 토대로 쑥쑥 성장하며 내려온 만큼, 일반적으로 던전을 다니며 차근차근 내려온 모험가들에 비하면 이런 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맨눈으로는 문양을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마석을 하나 꺼내서 그 마석이 발하는 빛에 의지하여 벽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살펴봤다.

    뭘 그린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뭔가 화려하다는 건 알겠다.

    날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음각으로 새겨진 그 문양을 보고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여신님께 받은 게임 능력이 있는 나는, 그 그림의 정체를 한 눈에 꿰뚫어볼 수 있었다.

    이거, 그림이 아니라 글자잖아.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연히 이 세계의 말과 글은 내가 원래 있던 세계의 말이나 글과 다르다.

    이런 세계에서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을 쓰는 것도 뭔가 어색하잖아?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냐하면, 그건 바로 게임에 내장된 기능 덕분이었다.

    원래 있던 세계의 게임기는, 뇌파로 모든 것을 조종하고 보여주는 가상현실 게임기였다.

    그렇다 보니, 모르는 글자를 읽거나 말을 듣더라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뇌파로 쏘아 보내는 것 역시 간단…한 건지는 문외한인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능한 기술이었다.

    즉, 완벽에 가까운 통역 시스템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아무 지장 없이 대화하는 걸로 알 수 있듯, 그 시스템은 내 게임 능력으로 여전히 살아있었다.

    뭐, 게임 능력이 없는 다른 사람들도 내 말을 이해하는 걸로 보아, 단순히 나만 통역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여신님이 뭔가 더 힘을 쓰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나는 벽에 보이는 처음 보는 문양도 전부 글자로 인식하고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서브 계층 올 클리어 축하합니다!

    메인 계층을 클리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셨는데 굳이 이렇게 서브 계층까지 전부 클리어하시다니, 당신은 진정한 모험가이시군요.

    당신 같은 분들이 있는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이런 숨겨진 요소를 만드는 보람을 느낍니다.

    "개발자 코멘터리였냐?!"

    여신님! 던전에다가 뭘 새겨놓으신 거예요!

    아무리 게임이랑 똑같은 세계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하시잖아요!

    진지하게 세계의 위기 때문에 굳이 절 소환해서 던전을 답파시키려는 거 아니었어요?!

    아직 끝까지 읽지도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하늘을 향해 중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후우. 그래도 일단 읽자.

    어떤가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기분이 가벼워지시나요?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저와의 계약을 통해 던전을 답파하고 있는 분이라는 얘기니까요.

    당신이 저와 얘기할 수 있었던 건 처음 이 세계에 올 때 주고받았던 짧은 계약서뿐.

    아무래도 우리 여신님은, 나 말고도 다른 이방인들 역시 전부 날 납치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하셨던 모양이다.

    뭐, 나는 그 계약서마저도 안 읽고 그냥 넘겨버렸지만.

    만약 당신이 성녀를 동료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신 강림을 통해 저와 만날 수 있는 건 한 달에 한 번뿐.

    …응? 잠깐만.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분명…아, 그런가. 레이아가 여신 강림을 쓸 수 있었던 건 내가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서 강제로 배우게 해서 그런 거고, 정식으로 성녀가 되고 할 수 있게 되는 여신 강림은 쿨 타임이 짧은 건가.

    그러고 보니 성녀는 한 달에 한 번 여신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던전을 내려올수록 늘어났을 당신의 부담감을 그런 한정된 대화로 전부 덜어줄 수는 없었을 테니, 던전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조금이나마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조금 장난을 쳐봤습니다.

    물론 이 짧은 문구가 당신의 부담감을 전부 덜어 드릴 수는 없었겠지만요.

    당신이 지나온 서브 계층들은 다음 메인 계층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 되어 당신의 모험에 도움이 되셨겠지요.

    당신이 방금 막 지나온, 마지막 서브 계층만을 제외하고요.

    그곳을 지나온 당신이라면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마지막 서브 계층만큼은 다음 계층이 아닌, 저희의 마지막 목표를 위한 예행연습이었습니다.

    부디 그곳에서의 경험이 당신이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기를, 그리고 던전의 마지막에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벽에 쓰인 글은 마무리됐다.

    엄청나게 긴 내용이었지만, 벽에 그려진 건 그림 같은 문양뿐. 절대 이런 긴 내용의 글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응. 그야 이건 해석을 하려야 할 수가 없겠지. 애초에 글자인지도 모를 거고.

    6계층의 주인이 있는 방에 비슷한 문양이 있다면 디아나도 분명 그 문양을 봤겠지만, 그러고도 디아나가 그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던 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뭐,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그러니까 여신님. 저는 그 저희 계약이 뭔지, 제가 던전의 마지막에서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른다니까요? 각오고 뭐고 없다니까요?

    아니. 그야 나 하나만 보라고 쓴 글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결국 이 긴 글을 읽고 알 수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뭔가 알 것 같은 거냐?"

    뭘 그린 건지도 알 수 없는 그림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멍하니 있는 날 향해, 쓰레온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뭣?! 저, 정말이냐? 대체 뭘 알아낸 건데?!"

    "지금까지 아무도 이해 못 한 그림을 보고?! 과연 여신님의 사자라는 거군요."

    "오오! 역시 성자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건지, 쓰레온은 격한 반응을 보여줬다.

    그리고 천생 모험가인 듀크와 그렉 역시도,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내 대답을 듣고도 그런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가 헛수고했다는 거."

    "…무, 뭐?!"

    "씨발! 헛수고했다고!"

    으아아아! 젠장! 어쩐지 이상하게 거기만 소계층 주제에 남탕이라더니!

    처음에 고추밭인 걸 확인한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통로고 자시고 없었던 거잖아!

    여기가 소계층의 마지막이라고 여신님이 확인사살까지 해줬고!

    결국 던전의 마지막은 6계층을 통해 가라는 거냐!

    그럼 여기는 왜 만든 건데!? 다른 소계층이랑 달리 6계층에서의 전투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이유라도 제대로 알았으면 화라도 덜 났을 텐데!

    계약이니 마지막 일이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기만 하고!

    이 세계에 와서, 여신님한테 이 정도로 분노의 감정을 품은 건 처음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애들이랑 만날 수 있었던 건 전부 여신님 덕분이니까 지금까지 살짝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는 와중에도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는데.

    애초에 미리엘 고것도 문제야.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 고추밭이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헛소리를 해서 날 개고생 시켜?!

    다음에 만나기만 해봐라 콱 그냥 엉덩이를…!

    하아. 여기서 혼자 이러고 열불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냐.

    "…돌아가자."

    "잠깐만. 이 그림이 무슨 뜻이었는데? 설명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 지옥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한 나였지만, 쓰레온은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헛수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글자야 글자. 우리 여신님이 써놓으신. 소계층 전부 통과한 거 수고했대."

    "…거짓말. 진짜 그게 다라고?"

    "정말입니까?!"

    쓰레온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지만, 호랑이 놈은 어째선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표정 짓고 있는 거 아니겠냐. 아, 그리고 거기 두 놈.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이런 글자를 발견했다는 것도, 이게 글자라는 것도 비밀이다."

    6계층 주인이 있는 곳에도 비슷한 문양이 있다고 했으니, 거기에도 뭔가 다른 글이 쓰여 있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 그 글이야말로, 던전의 마지막으로 가기 위한 힌트일 거다.

    그게 글자라는 걸 아라크네 애들이 알아봤자 어차피 해석도 못 하겠지만, 괜히 알려줘서 골치 아파질 필요는 없지.

    "…그렇습니까. 지금 머릿속에 여신님의 시련을 통과한 성자님과 삼 인의 종자에 대한 멋진 노래가 떠올랐습니다만."

    "부르면 죽여버린다."

    진심으로.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어. 지금 이 분노에 몸을 맡기면 사람 따윈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릴 수 있는 기분이야.

    특히 그게 땀내나는 사내새끼라면 더욱더.

    "하지만 이 노래가 이대로 제 머릿속에만 남는 것은 세계의 손실입니다! 하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시는 성자님을 곤란하게 할 수도 없는 일. 어쩔 수 없군요. 이 노래는 5.5계층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만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너 새끼야 방금 내 말 못 들었냐?! 죽여버린다니까?!"

    이 새끼는 진짜로 날 존경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거야?!

    "하하핫. 성자님도 참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이거든?!

    여신님. 지금 여기서 제가 무고한 여신님의 아이를 하나 죽이는 것을 부디 용서해주십…무고하지도 않잖아. 그냥 죽이자.

    "차, 참으십시오!"

    내 눈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듀크가 황급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날 뜯어말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최대한 내 몸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그 행동에 조금 전에 내 포옹을 막던 그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이 오버랩되어서, 안 그래도 활활 불타는 내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고 보니, 비밀을 유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살인멸구였지."

    "…도와줄까? 아니. 돕게 해줘. 저놈들만 없으면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쓰레온 역시도 살인멸구 작전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모양이었다.

    "으, 으아악! 내분은 안 됩니다! 제 노래를 듣고 진정하십시오! 오오~성자님의 손길이 그 검게 빛나는 근육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네놈의 피는 무슨 색이냐아아!"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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