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46화 (830/1,205)
  • <-- 5.5계층 -->

    "듀크씨,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뛰쳐나가시고."

    눈앞에 있는 녀석의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력에 말문이 막혀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그런 말을 건넸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역시나 또 안면이 있는 얼굴이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넌 또 여기 왜 있어?! 너 이 변태랑 아무 접점도 없었잖아! 그…! …그레고리? 크랙? 쟤 이름 뭐였더라?

    아무튼 호랑이 가죽 뒤집어쓰고 근육 빵빵한 주제에 음유시인이나 하고 있는 귀찮은 놈아!

    그래. 이 정의감 넘치는 변태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 놈은, 바로 언젠가 3계층에서 구조요청을 받고 레이첼 누님과 함께 구해준 적 있는 그 호인족 음유시인이었다.

    "네. 그렉씨. 여기 아름다운 도련님을 희롱하는 변태가 있어 정의의 철퇴를…."

    아, 그래. 쟤 이름 그렉이었지.

    뭐, 또 십 분만 지나면 까먹겠지만.

    "응? 그분은…용사 레온님이군요."

    아무튼 이 정의 변태와 다르게, 그렉은 쓰레온의 얼굴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상 영웅담 같은 걸 자주 부를 테니까, 유명인들 얼굴 정도는 알고 있겠지.

    쓰레온이 영웅담을 부를 정도의 인물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엑…."

    그리고 그제야 쓰레온의 정체를 깨달은 정의 변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 순식간에 기가 죽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내가 성자라는 걸 안 순간 순식간에 기가 죽었지.

    정의감 넘치는 주제에 의외로 권력에는 약한 성격인 모양이다.

    "하, 하지만 설령 용사님이라 할지라도! 가련한 도련님을…."

    "으드득.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개소리도 정도껏 해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념을 굽힐 수는 없다는 듯, 정의 변태는 떨리는 목소리로 쓰레온에게 도전장을 던지듯 그런 말을 외쳤다.

    야. 용감한 건 좋은데, 슬슬 쓰레온이 폭발하려고 하는데.

    얘 고위귀족답지 않게 성격 더럽고, 생긴 거랑 다르게 의외로 강하다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

    "드물게 동행자가 계셨군요. 실례합니다. 제 동료가 뭔가 오해를…응? 으으응?"

    그리고 그렉은 그 말에 겨우 내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내게 시선을 돌리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너도 혹시 저 정의 변태랑 비슷한 과였냐?

    아니. 전에 3계층에서 같이 구해줬던 동료들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잠깐 그런 의심을 했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그보다 더 심각한 말을 내뱉었지만.

    "오, 오오오! 오랜만입니다! 성즈아압!"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얘 뭐야? 어떻게 안 거야?!

    나는 녀석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는, 살짝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 무슨 소리인지? 나 성자 아닌데?"

    "하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성자님을 몰라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시치미를 떼봤지만, 녀석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웃지 마! 그게 웃을 일이야?! 무서워 새끼야! 레이첼 누님도 처음 봤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넌 어떻게 눈치챈 거야?! 이 스토커 새끼!

    전부터 달라붙는 게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서, 성…으윽! 하지만 저 외모라면 문제 없…!"

    옆에 있던 정의 변태도 내 정체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는지 눈동자를 떨었지만, 이내 멘탈을 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을 주시했다.

    멘탈 잡지 마! 빤히 보지 마! 문제없기는 뭐가 문제없어 이 변태 새끼야! 오히려 문제가 아닌 게 없는 수준이잖아!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일단 어디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하자."

    아무튼 정체가 들켜버린 이상, 이것들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다.

    나는 일단 녀석들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4계층은 물로 뒤덮여있는 만큼, 은밀히 얘기를 나누기에는 거기보다 안전한 곳도 없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마을을 빠져나가 바닥의 그늘진 곳까지 내려와서, 우리는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려오자마자 먼저 팔찌부터 풀었다.

    정의 변태가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과연.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놈들한테까지 우리 사정을 곧이곧대로 다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냥 간단하게 여신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둘러댄 것뿐이다.

    그리고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이 녀석들이 같이 뭉쳐있는 이유도 듣게 됐다.

    그렉이 여느 때처럼 술집에서 날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동료를 모집하고 있자, 마침 동료가 없었던 듀크가 자기도 나와 모험을 한 적 있다면서 말을 걸어왔다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저 남자 모험가들 사이의 강한 동료 의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던 둘은,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 서로 그보다 더 강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둘 다 그 희귀한 고레벨 남자 모험가 주제에 동료도 모으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 말이다.

    둘은 곧장 의기투합했고, 이렇게 같이 던전을 다니게 됐다고 한다.

    응. 엄청나게 태클 걸고 싶은 부분이 많은 과거사였다. 귀찮아서 안 할 거지만.

    아무튼 남자 모험가 둘이서 맺는 파티 따윈 보기 드물다고 생각해서 굳이 가발까지 썼는데, 던전에 내려오자마자 그 희귀한 파티를 만나버리다니.

    그것도 이런 끔찍한 조합으로.

    "그런 사정이라면 알겠습니다. 저희도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 드리도록 하죠."

    "아니! 미력하면 그냥 남들한테 비밀로 하고 꺼지라고! 돕기는 뭘 도와! 우리 5계층에 갈 거거든?!"

    "하핫.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뒤에서 보조만 하는 음유시인이고, 여기 듀크씨는 6계층에도 발을 디딘 적이 있는 강력한 창사시니까요."

    "…뭐? 6계층? 너 전에 얼음 동굴에 있었잖아."

    그것도 그때는 동료를 둘이나 데리고.

    아니. 잠깐만. 이 정의 변태는, 남 도와주기 좋아하는 변태 로리 쇼타 콤플렉스다.

    그렇다는 말은 즉.

    "설마 너 그때 키잡하고 있었던 거냐?!"

    "아, 아하. 하하하!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전 그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힘들게 던전을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

    맞다는 얘기잖아 새끼야!

    휴우, 다행이다! 이 녀석이 동료를 못 모으다가 그렉과 만났다는 소리를 듣고서, 사실 미약하게나마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부터 만날 때마다 점점 동료가 줄어드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전에 내가 이 녀석 동료들 앞에서 어린 여자 좋아하는 변태로 몰아가는 발언을 상당히 많이 했었으니까 말이야.

    혹시 그것 때문에 이 녀석이 동료를 못 모으게 된 건 아닐까 하고 미안했는데,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었어.

    내가 그러지 않았어도, 분명히 이 녀석은 언젠가 이렇게 됐을 거야.

    "아무튼 실력이 되더라도 도움은 필요 없어. 비밀 임무라고 했잖아. 자세한 내용을 알려줄 수 없는 건 너희도 예외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흰 그냥 여기서 날 봤다는 얘기만 하지 말고…."

    "괜찮습니다! 제 입은 그 어떤 바위보다도 무겁습니다! 그러니 제발!"

    "놔 새끼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녀석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그렉은 내 소매를 단단히 붙잡고 날 놔주려 하지 않았다.

    이건 전에도 은근슬쩍 나랑 같이 다니고 싶다고 매달리더니 또 이러네!

    "듀크씨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정의감 넘치는 듀크씨라면, 역시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을 돕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야 물론, 세상을 위해 이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은 같습니다. 하지만 전 모험가. 보수 없이 힘을 쓸 수 없는 몸이죠. 하지만 세상을 위하는 일인데 큰 보수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 제 보수는, 그저 같이 다니는 동안 성자님께서 아까 그 팔찌를 차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

    이 변태 새끼가 진지한 말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만!

    "데려간다고 얘기도 안 했거든 새끼야! 다시 한 번만 그딴 눈으로 봐라! 콱 눈을 뽑아 버릴 테니까!"

    "그것도 될 수 있으면 팔찌를 차시고…."

    아오오오! 이 새끼들이 진짜!

    옛날 성격 나오게 만드네!

    "야! 쓰레온! 너도 한마디 해 봐!"

    "으, 응? 아니. 난 재미있는데. 계속해."

    저 쓰레기 새끼가! 아무리 이번 일을 위해서 맺은 임시 파티라지만, 넌 동료 의식도 없냐?!

    게다가 아까 자기가 변질자 취급 당할 때는 이까지 갈면서 화냈던 주제에!

    그러니까 네가 쓰레온인 거야 이 쓰레기야!

    아오, 여신님! 왜 제가 이런 시련을! 내가 어쩌자고 땀내나는 사내새끼랑 던전에 올 생각을 했을까!

    얘들아. 오늘따라 너희 얼굴이 너무 그립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앞으로 이딴 놈들이랑…아니. 정의 변태랑 스토커는 빼더라도 저 쓰레온이랑 며칠을 더 같이 보내야 한다니.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꼭 그러라는 법도…없지 않나?

    "야. 너희들."

    "아, 넵."

    "둘이서 다녔다는 건, 둘 중 하나는 맵퍼라는 소리지?"

    "네. 성자님! 제가 맵퍼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 질문에, 그렉이 희망에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으으으으!

    크크큭. 야 쓰레온. 아까는 잘도 재미있으니 계속하라는 헛소리를 지껄였겠다?

    "너희들, 정말로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여신님의 사명이자 세계의 위기와도 관련된 문제야."

    "물론입니다!"

    "그야…."

    내가 엄숙한 목소리로 질문하자, 그렉은 눈을 빛내면서, 듀크는 혹시 내가 팔찌를 차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 일은 너희에게 맡긴다! 쓰레온! 맵퍼만 있으면 충분한 거지?! 난 이만…."

    "이런 미친! 어딜 혼자 도망가려고!"

    하지만 내가 도망가는 것보다 먼저, 쓰레온이 내 팔을 잡아 세웠다.

    이 쓰레기 녀석. 쓸데없이 반응 속도만 좋아서는!

    "이거 놔! 난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안 돼! 집이 그립다고!"

    "못 놔! 혼자 도망가게 둘까 보냐!"

    너 왜 나랑 결투할 때보다 더 투지에 불타고 있는 건데!?

    아니. 이 둘이랑 같이 다닐 생각 하면 그렇게 되는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성자님, 저희와 같이 새로운 전설을 써내려가시죠! 함께하겠습니다!"

    "적어도 팔찌는 주고…아니. 역시 같이 가시죠!"

    게다가 그렉과 듀크 역시도, 내가 없으면 쓰레온과 같이 임무를 수행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듀크는 처음에는 팔찌만 있으면 괜찮다는 태도였지만, 옆에 있는 게 쓰레온과 그렉이라는 걸 확인하고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는 변태지만, 못생기거나 얼굴까지 아예 동물인 수인은 수비 범위 밖이라는 건가.

    아무튼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결국 스토커와 정의 변태를 떼어놓는 데 실패한 나는 둘까지 대동하고 거북이굴로 향하게 됐다.

    말싸움하기도 지쳤고, 이 스토커는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올 기세고.

    이유야 어찌 됐든 둘 다 비밀 엄수는 철저히 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서 이 둘의 힘을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북이굴에 도착할 때까지는, 변태 둘의 뜨거운 시선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쓰레온은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가 성자 스킬을 쓸 필요도 없이 몬스터들을 처리했고, 저번보다 인원수가 적은 만큼 이동 속도도 빨라서 우리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거북이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참고로 열쇠는 레이아의 스태프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걸 사용했다.

    "이, 이런 곳이…."

    "말해두지만, 진짜 비밀이다. 농담이 아니라.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지면 범인은 너희 둘밖에 없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내가 교황청이나 왕가 쪽에도 연줄이 있는 건 알지?"

    "걱정 마십시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렉은 날 추종하고 있으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듀크는 정의감이 넘친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때문에 권력에 약한 점을 노려서 나는 그렇게 다시 한번 주의를 하고, 인벤토리에서 거북이의 성기를 꺼냈다.

    수컷 거북이도 며칠 전에 저번에 처리한 만큼 아직 부활하지 않아서 텅 비어있는 그 장소에서, 이 성기를 꽂을 장소는 굳이 힘들게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물건이 큰 만큼 넣을 곳도 당연히 컸으니까.

    이거, 나중에 스태프에 합성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커다란 구멍에 스태프를 톡 가져다 대면 열리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5.5계층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지옥은,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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