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45화 (82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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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로 저택에 오래 있어봤자 놀림감만 될 뿐이다.

    게다가 꾸미기까지 한 내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레이아한테 그 이상 붙잡혀있다가는, 저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슬슬 치마 앞이 위험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속옷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일념하에 필사적으로 마나를 돌려서 발기를 막기는 했지만, 여기저기 닿는 천사님의 감촉이 너무 황홀해서 집중력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인사도 대충 하고는 황급히 저택을 빠져나와 쓰레온의 저택으로 향했다.

    너무 무작정 나온 바람에, 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가문 사람들이 전부 죽는 바람에 예전보다 힘이 많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용사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고위 귀족이니까 말이야.

    그런 놈이 사는 저택에 아무나 막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어쩌지? 이 모습으로 성자라고 해도 믿을 리가 없고. 그냥 디아나네 메이드라고 하면 통과시켜 주려나?

    "텔루나님의 메이드님이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쓰레온의 저택으로 찾아간 나였지만, 역시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메이드복에 박혀있는 텔루나 가문의 문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는 얘기다.

    "텔루나님의 메이드…가 맞는 거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간단히 저택으로 들어간 나는 곧장 쓰레온과 얼굴을 대면하게 됐지만, 녀석은 어째선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날 관찰했다.

    "뭐 문제 있냐, 새끼야?"

    썩은 동태 같은 눈으로 전신을 훑는 게 상당히 기분 나빴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공격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아, 아니. 그냥 메이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품이…."

    아무리 디아나네 메이드라도 보통 메이드가 고위 귀족한테 이런 말투로 말하면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쓰레온은 그런 내 말투조차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날 관찰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응. 슬슬 진심으로 기분 나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 시선에 성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일까.

    예쁜 여자에게 향하는 경외심 같은 건 느껴졌지만 말이다.

    이런 쓰레기라도, 지켜야 할 선 정도는 알고 있다는 건가.

    하긴. 저 외모에 취향까지 그러면 답이 없지.

    "기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리고 눈 안 깔아? 어딜 더러운 시선으로 계속 보고 있어. 역시 쓰레온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놈이군."

    "무, 무슨…응? 그 말투…."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녀석은 겨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 녀석은 얼굴이 안되면 눈치라도 빠르던가.

    괜히 여자들이 피하는 게 아니다 이놈아.

    "후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고는, 그대로 옷을 벗어 던졌다.

    옷을 입고 있는 채로 팔찌를 풀어버리면 찢어질 테니까 말이야.

    일단 돌아오고 나서도 입고 가야 할 테니, 찢을 수는 없지.

    "왜, 왜 벗는 거야?!"

    하지만 내가 옷을 벗어 던지자, 쓰레온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아예 몸을 뒤로 돌려버리며 식겁했다.

    응. 쓸데없이 매너 지키려고 하는 게 더 기분 나쁘다.

    "아? 더 입고 있을 필요 없잖아."

    "그, 그게 무슨…테, 텔루나님의 메이드 중에 어떻게 이런 치녀가!"

    "치녀는 무슨! 너 눈치챈 거 아니었냐!? 나야 새끼야!"

    속옷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어 던진 나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섰다.

    "응? 으아아악! 씨발!"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서 이쪽을 엿본 쓰레온은,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나 싶더니 못 볼 걸 봤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씨발…말도 안 돼…. 저 몸집에 어떻게 팬티 밖으로 삐져나올 크기가…씨발…세상은 불공평해…씨발…씨발…."

    그리고는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서, 방금 본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박박 긁어댔다.

    말해두지만, 딱히 세우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세우지 않아도 팬티 밑으로 삐져나올 크기인 것뿐이야.

    뭐, 다시는 그런 기분 나쁜 눈으로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보여준 건 맞지만.

    다만 저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도 일단 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야. 괜찮냐?"

    "으아악! 다가오지 마!"

    음. 레이아의 가슴을 보는 디아나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반응이군.

    뭐, 디아나는 자기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지만, 얘는 그것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였지만, 너무 이러니까 미안한 마음도 사라지고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다.

    너무하지 않냐고? 뭘 새삼스럽게. 난 원래 그런 놈이야.

    "진정했냐?"

    "……."

    결국 놈이 진정한 건, 내가 팔찌를 풀고 갑옷까지 갖춰 입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아직도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 듯 눈이 퀭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는 건 멈췄으니까 많이 나아진 거지.

    "그럼 슬슬 가자. 안 그래도 한시가 급한데 괜히 시간 잡아먹었네."

    "그…."

    그렇게 말하며 저택을 나서려고 한 나였지만, 쓰레온은 아직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응?"

    "그 모습으로 가려는 거냐…?"

    그럼 뭐? 어떤 모습으로 가라고? 이 새끼 설마 아까 그 모습이 또 보고 싶어서….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쓰레온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괜히 말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오해는 금방 풀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 어려진 모습에 상당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모양이다.

    그게 몸집에 맞춰서 작아진 거였다고 알려주면 진심으로 우는 거 아니야?

    뭐, 나도 악마는 아니니까 말하지 않을 거지만.

    아무튼 역시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 모습으로 그냥 가도 되는지 조금 고민하기는 했다.

    여기까지 아라크네 클랜이 감시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길드에 가게 되면 또 얘기가 다르다.

    클랜원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대규모 클랜이니만큼, 길드에 가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아라크네 클랜원이 있겠지.

    만에 하나 아라크네 클랜원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 같은 유명인이 모습을 보이면 소문은 금방 퍼질 거고.

    젠장. 역시 길드에 갈 때까지도 변신하고 갈 수밖에 없나.

    "혹시 어린애가 입을 만한 사이즈의 옷 없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기다려. 지금 사람을 시켜서 구해올 테니까."

    뭐, 그래도 변신만 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메이드복까지 입을 필요는 없겠지.

    텔루나 가문의 문장을 달고 길드에 가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띄고.

    그렇게 해서, 나는 팔찌의 마석을 갈아끼고 다시 어린 모습으로 변한 다음 쓰레온이 구해온 편한 옷을 입고 길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레온씨. 길드의 의뢰를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어머, 오늘은 귀여운 여자 아이도 함께 시네요."

    그리고 우리를 맞이한 레이첼 누님은,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렇게 연기를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에 그런 식으로 내가 절망하는 것을 보시고도, 여전히 이 모습의 내가 귀엽기는 귀여운 모양이다.

    누님. 다 좋은데요. 너무 그렇게 만지시면 가발 벗겨져요.

    참고로 말하자면, 가발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냥 단순히 이 세계에서 남자 둘이서만 다니는 파티만큼 드문 게 없으니까, 괜히 시선 끌지 않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뿐이다.

    어차피 쓰레온도 유명인이니까 의미 없는 짓 아니냐고?

    괜찮아. 이 녀석은 생긴 게 이래서 엄청 눈에 안 띄거든.

    어지간히 주의 깊게 안 보면 그냥 1계층이나 다니면서 푼돈이나 버는 초보 모험가로밖에 안 보일 정도야.

    "네. 심층 의뢰인만큼 도우미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레이첼 누님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쓰레온도 일단 말을 맞춰서 연기를 해줬다.

    "그러면 여기 마스터 카드입니다. 동행분도 이걸로 같이 이용할 수 있으실 거에요."

    쓰레온은 모험가가 아닌 만큼 모험가 카드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텔레포트도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

    그러니 길드의 의뢰를 받고 던전에 갈 때는 이런 식으로 길드 직원에게 마스터 카드를 받아서 이용한다는 모양이다.

    내 모험가 카드로 쓰레온을 데려갈 수도 있었지만, 이번 일은 보안이 중요하니까 말이야.

    텔레포트 마법진을 관리하는 길드 직원에게도 내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절차를 밟아서 가는 거다.

    "그러면, 레온씨 잘 부탁할게요. 무사히 돌아와야 돼?"

    "걱정 마."

    "응. 믿을게."

    귓속말로 누님과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우리는 마스터 카드를 이용해서 4계층으로 향했다.

    자, 그럼 곧장 거북이굴로 가볼까.

    얼마 전에도 갔다 왔지만, 여기서 거북이굴까지 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문제는 5.5계층을 얼마나 빨리 답파할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내가 기절해있다는 핑계도 그리 오래 댈 수 있는 핑계는 아니니, 최대한 빨리 다녀오지 않으면.

    "가자."

    "그 모습으로 가려고? 이제 그만 벗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려고 한 나였지만, 아무래도 쓰레온은 이 모습의 나와 같이 다니는 게 엄청나게 싫은 모양이었다.

    내 팔찌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쓰레온이었지만, 물론 나는 아직 팔찌를 풀 생각이 없었다.

    누군 좋아서 가발 같은 거 뒤집어쓰고 있는 줄 아냐.

    "이왕 하는 거 철저하게 해야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테니까 걱정…."

    "거기 불한당! 당장 그 가련한 아가씨에게서 떨어져라!"

    쓰레온의 말에 대답하려고 한 순간, 우리 뒤에서 갑자기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런 일이 진짜로 일어나기는 하는구나.

    아니. 판타지 세계의 클리셰라면 클리셰인 일이지만, 이 세계는 보통의 판타지 세계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말이야.

    여기까지 내려올 수 있는 남자 모험가는, 기본적으로 여자에 곤란하지 않은 녀석들뿐이다.

    게다가 남자 모험가는 그 수가 적은 만큼 기본적으로 동료 의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여자를 억지로 희롱하는 남자 따윈 볼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아무래도 그런 희귀한 일이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뭐, 우리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

    "크윽. 저걸 강제로 벗길 수도 없고. 얼마나 걸리는데?"

    "조금만 참아. 기껏해야 하루…."

    "거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그 추잡한 시선으로 아름다운 아가씨를 더럽히지 마라!"

    거 참 시끄러워 죽겠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와 쓰레온의 사이에 어떤 그림자가 난입해왔다.

    …응? 잠깐만. 그러니까 즉, 아까부터 들렸던 시끄러운 목소리가 향했던 곳이 바로….

    "괜찮으십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심한 짓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반짝이는 미소를 내게 보내며 그런 질문을 던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한 일이라고 해놓고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뭐 그때는 던전 안도 아니었고, 내가 희롱하는 쪽이었지만.

    "너 아직도 그런 짓 하고 다니냐. 이 진성 로리타 콤플렉스 새끼야."

    그래. 우리 사이에 끼어든 녀석은 바로 듀크였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실비아를 희롱하는 날 보고 정의감에 넘쳐서 나섰던, 그리고 황제 펭귄이 있는 곳에서 괜히 얼쩡거리면서 우리를 방해했던 그 정의감 넘치는 진성 로리타 콜플렉스 말이다.

    "네? 아, 아니. 그게 무슨…혹시 저희 구면입니까? 그럴 리가. 제가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를 기억하니 못할 리가…."

    녀석은 갑작스러운 내 폭언에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새기며 나와 어디서 만난 적 없는지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전에도 농담으로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었지만 말이야, 진짜냐.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취향이었던 거냐.

    "나 남자다."

    "아, 아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름다운 도련님! 그래서, 저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을까요?"

    …야. 나 남자라니까? 왜 날 보는 시선이 변하지가 않냐 이 진성 로리…아니지. 남자라고 말해도 시선이 변하지 않으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해?

    이 녀석, 취향은 조금 이상해도 정의감 넘치는 호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녀석인 거 아니야?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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