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39화 (823/1,205)
  • <-- 아우덴 -->

    레벨업에 몰두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나였지만, 아쉽게도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말해두지만, 우리 애들의 반대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조금 전 그건 그냥 내 장난에 맞춰서 앙탈을 부린 것에 불과하고, 우리 애들이 진짜로 나랑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레벨업에 몰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조금 더 단순한 이유였다.

    디아나가 전령을 보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쓰레온이 저택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협력적이네. 그래도 일단 용사에 고위 귀족이잖아? 하루 정도는 늑장 부리면서 와도 괜찮았는데. 욕은 했겠지만.

    뭐, 여신님을 강림시키면 동석시켜서 걸린 저주에 관한 얘기도 물어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나한테 최대한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조금 전까지 얘랑했던 약속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 비밀이다.

    "미리엘이 그 사우론 아우덴의…사정은 알겠다. 나도 여신님의 독실한 신자로서, 마신을 증오하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력은 하고 싶다. 하고 싶지만…."

    아무튼 저택으로 찾아온 쓰레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려 했던 우리였지만, 얘기를 다 들은 녀석은 어쩐지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뭐, 자기 가문 사람들이 사우론 아우덴에 대한 열등감으로 죽어나갔으니, 미리엘이 아우덴이라는 말에 동요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마지막에 말을 흐린 건 대체 무슨 의미지?

    "뭔가 문제라도?"

    "너도 알고 있을…텔루나님이라면 알고 계시겠지만."

    내 질문에, 녀석은 설명하기 위해 운을 뗐다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나는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예전에도 이 녀석이랑 한창 싸우면서도 이름도 모르고 있다가, 결투가 끝나고 나서야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그 생각이 난 거겠지.

    훗. 정답이다. 용사. 생긴 거랑 다르게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건 아닌 모양이군. 생긴 거랑 다르게. 중요한 말이니까 두 번 말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험가가 아니다. 던전에 가는 것도 길드에서 협력을 요청했을 때만. 그것도 이미 지도가 완성된 장소를, 지도를 보며 다녀오는 게 전부였지. 하지만 이건 문제가 달라."

    "야. 쓰레온. 넌 명색이 용사면서 던전에 잠깐 다녀올 용기도 없는 거냐. 너 6계층도 많이 다녀왔다면서. 이번에는 5.5계층이니까, 난이도는 훨씬 낮을 거라고."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쓰레온의 의견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의견이었다.

    던전행을 모험하는 파티에서 제일 중요한 멤버는 강력한 어태커도, 든든한 탱커도, 뛰어난 힐러도 아닌 맵퍼라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야.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는 데에는, 그만큼이나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난 멤버의 역할이 중요했다.

    제대로 된 모험가도 아닌 이 녀석이 그런 공간지각능력을 갖추고 있을 리도 없으니, 혼자 던전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는 건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뭐냐? 그 쓰레온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턱에 손을 괴고 생각하고 있자니,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상관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넌 이상 찌푸리지 마라. 안 그래도 혼자서 이 방의 미적 수준을 왕창 떨어뜨리고 있는데, 인상까지 찌푸리면 더 보기 싫잖아.

    "응? 쓰레기 레온."

    "무, 뭣…!"

    내 대답에 녀석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충격받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아니. 생각을 해 봐. 너도 나한테 그랬겠지만, 나도 네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실은 지금도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나는 상냥하니까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아 주기로 했다.

    전처럼 혼자 엉엉 울기라도 하면 귀찮기도 하고.

    응. 알고 있겠지만 실은 뒷말이 본심이다.

    "그래서 속으로 널 부를 때는 쓰레기라고 부르고 있었거든. 뭐 결투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그런 인식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한 번 입에 붙은 말은 좀처럼 떼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레온이라고 부르려고 해도, 꼭 앞에 쓰레기가 먼저 붙게 되더라고. 아무리 쓰레기부터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되길래, 그냥 포기했어."

    "그런 걸 간단히 포기하지 마, 새끼야! 너 명색이 여신님의 사자잖아! 왜 그렇게 포기가 빠른 건데!"

    "훗. 포기가 빠른 게 아니라 판단력이 뛰어난 거라고 해주실까.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보다 중요한 건 없지."

    "뭘 멋진 말 했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 거야! 이 미치…크윽! 하나도 멋없다!"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 녀석 귀족치고 은근히 말에 품위가 없다고 해야 할지, 까놓고 말해서 입이 더럽지 않냐?

    지금도 디아나만 없으면 욕하려고 했지?

    아니. 뭐,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그야 가정 교육은 제대로 못 받았겠지만.

    아, 참고로 말하자면 지금건 순수하게 사실을 말한 것뿐으로, 결코 부모 욕을 할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다.

    나도 일단 동방예의지국의 사람으로 그 정도 선은 지킬 줄 알거든.

    "아니. 난 멋있거든."

    "크, 크으으으윽!"

    아무튼 녀석의 말에 내가 뻔뻔하게 돌려주자, 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분하기 그지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훗. 반박할 수 없는 모양이군. 하여간 적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멋짐이 나 스스로도 두렵….

    "적당히 하게나."

    쓰레온과의 승리에 도취해있자니, 디아나가 지팡이 끝으로 내 머리를 콩닥 하고 가볍게 때렸다.

    "미안하네. 레온군. 이 몸이 대신 사과할 테니 자네가 이해해주게. 이 이가 동성 동년배의 친구와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말일세. 신나서 이러는 거네."

    아니. 디아나야. 그건 아니거든. 그러면 마치 나랑 이 녀석이 친구 사이인 것 같잖아.

    나 얘 성도 모른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디아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특히나 우리 천사님에 이르러서는,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표정까지 짓고 계셨다.

    마치 같이 싸우면서 크는 친구를 보는 느낌으로 말이다.

    어쩐지 내가 이렇게 할 때까지도 우리 천사님이 한 마디도 주의를 안 하시더라니.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타이밍에 쓰레온을 더 놀릴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디아나가 마무리 일격을 가한 상황이었거든.

    "네 녀석은 그렇게나 매일같이…크흑…네에…."

    저거 봐. 저 녀석 부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잖아.

    이렇게 미인들한테 둘러 쌓여있는 놈을 두고 동성 동년배의 친구와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다고 하는 건, 바꿔 말하자면 매일같이 이성하고만 노느라 시간이 없다는 거니까.

    안 그래도 외모가 떨어지고 여자와 만족스럽게 하지도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가득한 녀석인데…아,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이 녀석이랑 결투할 때 그 자리에 없었던가.

    나도 모르게 연민의 감정이 우러나왔던 그때의 그 혼의 외침을 들었다면, 디아나도 결코 저런 말은 함부로 못했을 텐데.

    그때 생각을 하니까 괜히 또 이 녀석이 불쌍해져서, 나는 더 이상 놀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튼 길을 잃을 게 문제인 거지 맵퍼만 붙여주면 5.5계층을 조사하고 오는 건 문제가 없다?"

    "그렇다! 난 용사로서 전투라면 그 미리엘조차 능가하는…!"

    "아니. 네 자랑은 됐으니까."

    뭐가 미리엘을 능가해. 얘기 들어보면 호각인 것 같더만. 자기도 전에 그렇게 말해놓고.

    하여간 조금 동정을 해주려고 하면 이래요.

    "하지만 맵퍼를 붙이다니…구원씨, 그런 사람이 있나요?"

    애초에 맵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든데, 지금은 조건까지 많이 붙는 상황이다.

    비밀도 제대로 엄수할 수 있어야 하고, 쓰레온과 5.5계층에 같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도 있어야 한다.

    쓰레온이 아무리 날고 기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도, 5.5계층 정도의 수준에서 사람 하나를 완벽하게 보호해내면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을, 나는 딱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레이아의 머릿속에도 딱 한 명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은 거겠지.

    저렇게 모르는 척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레이아는 내게 다가와서는 내 팔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끼우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가지 말라고 말하듯이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사님. 그렇게 해주시면 저도 행복하고 다 좋은데요, 쓰레온이 보면서 부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어요.

    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레이아. 어쩔 수 없잖아. 내가 같이 갈 수밖에 없어."

    쓰레온이 부러워하든 말든 나는 레이아의 뺨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맵퍼 능력을 놓고 보면, 아예 가는 곳마다 지도가 만들어져 보이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

    게다가 나라면 비밀 유지 면에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전투력 면에서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괜찮으니까. 요즘 내가 던전에서 성자 스킬을 봉인하고 있어서 잊어버린 모양인데, 성자 스킬만 쓰면 나는 생명체 상대로 무적이라니까? 어차피 5.5계층이라고 해봤자 5계층의 연장선. 몬스터는 전부 성욕을 가진 생명체일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어. 그리고 정 위험하면, 저 녀석을 방패로 던져주고 나 혼자 그림자 이동으로 빠져나오면 그만이고. 너도 봤지? 내 그림자 이동이 얼마나 뛰어난 스킬인지."

    뭐, 마지막으로 쓴 게 혼자서 다치러 들어갈 때 쓴 거라 이런 말을 하는 건 역효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야!"

    앞쪽에서 뭔가 잡음이 들려왔지만, 나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레이아만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

    그러면서 다시 레이아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자, 레이아의 귀가 아래로 축 처져서는 바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응? 괜찮으니까. 전처럼 나 혼자 짊어지겠다는 바보 같은 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내 사명이야. 이 정도 역할은 할 수 있게 해줘."

    "네…."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레이아는 결국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하지만 그러면 아라크네의 눈은 어떻게 속이려고? 구원 지금 기절한 척하는 중이잖아."

    그리고 지금 말로 설득된 건 레이아뿐만이 아니었다.

    레이아가 달라붙어서 말리니 레이아를 바라보며 말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방금 말은 우리 애들 모두에게 한 말이었으니까.

    레이아만 바라보며 말한 게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듯 살짝 질투심 섞인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납득은 했다는 듯 사라가 그런 말을 해왔다.

    "그거라면 문제없어. 이걸로…."

    물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제대로 생각하고 내가 가겠다고 한 거였다.

    그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인벤토리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 팔목에 찼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과 함께 내 눈높이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절대 보낼 수 없어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누나 말 잘 들어야죠?! 던전은 위험하니까요! 그런 위험한 곳에 혼자 가다니! 안 되니까요! 절대! 안 되니까요!"

    "아니. 저기, 저도 일단 같이…."

    "안 되니까요!"

    그리고 내 시야가 안정되자마자, 레이아가 아까보다 더 내게 달라붙어 왔다.

    아예 자신의 가슴에 내 얼굴을 파묻듯이 꽉 끌어안고 흔들면서, 레이아는 필사적으로 내 던전행을 막으려고 했다.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우리 천사님이 남이 하는 말을 도중에 끊고, 아니. 아예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할 정도였다.

    쓰레온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까 괜히 놀려서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굳이 내가 놀리지 않아도 넌 이미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구나.

    작아진 손으로 레이아의 폭신폭신한 가슴을 밀어내서 겨우 숨구멍만 확보하면서, 나는 쓰레온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이아."

    "누나에요!"

    "레이아 누나."

    "안 돼요!"

    아니. 천사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뭐, 할 말은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가늘고 높아진 내 목소리에 심장을 직격당한 듯, 레이아는 날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면서 한사코 날 던전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용아랑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이대로 하지 않을까요?

    자세한 내용이 정해지면 공지에 관련 내용을 추가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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