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35화 (819/1,205)
  • <-- 아우덴 -->

    "그러면 레이첼. 부탁할게."

    "…응. 맡겨줘."

    식사를 마치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누님은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듯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너무 그렇게 각 잡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야.

    사라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해줘도, 누님께서는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다.

    아무튼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눈 끝에, 길드에서 정보를 캐내는 과정은 이렇게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디아나는 저택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 협회의 누님 중 한 명으로 변신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애들은 하나 같이 눈에 안 띄는 애들이 없고, 애초에 내가 기절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리 애들이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수상하다. 레이첼 누님처럼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쯤 되면 길드장과도 만날 일이 종종 있으니까 어색하지도 않다.

    애초에 마법사 협회는 개미굴에 있는 거대 마석 조사에도 힘을 쏟고 있으니 더더욱.

    게다가 아무리 디아나를 추종하는 마법사 협회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디아나가 성자의 사명과도 관계있는 던전의 비밀을 전부 공유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아라크네 클랜의 눈을 속이고 길드장과 접촉하기에는 최고의 인재였다.

    아무튼 그렇게 변신한 디아나가 출근하는 레이첼 누님과 같이 길드로 가서, 길드장에게 정보를 얻어낸다.

    물론 아무리 디아나가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신님의 사명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드장이 그냥 정보를 내놓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딸인 레이첼 누님도 옆에서 도와줄 테고, 여차하면 우리 쪽 정보도 어느 정도 털어놓고 사정을 설명하면 되겠지.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살짝 꺼려지기는 하지만, 어차피 내 사명은 던전을 다니는 게 기본 전제니까. 그 던전을 관리하는 기관의 장에게 협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든든한 일도 없지.

    게다가 레이첼 누님의 어머니에 디아나의 오랜 친구라는 것으로, 신용도도 확실하니까 말이야.

    아, 그동안 나는 뭘 하냐고? 나야 물론 디아나가 말했던 대로…말해두지만, 기둥서방이 아니니까.

    이건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한 교란 작전일 뿐이니까.

    젠장. 분명 더 활약하기 위해서 특훈까지 한 몸인데, 어째서 특훈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된 거지?

    아, 아니야. 분명 언젠가 내가 크게 활약할 순간이 올 거야. 여신님이 괜히 날 불러서 사명인지 뭔지를 떠맡긴 거겠어?

    "음.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게. 이 몸은…."

    그렇게 얘기가 끝난 후,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 몸은 그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오겠네. 이 몸이 변장하고 있는 동안 밖으로 나가버리면 곤란하니 말일세. 하아…누구로 변신할지 다툴 것이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구먼."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일어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렇게만 놓고 보면 그냥 마법사 협회의 누님들을 만나러 가기 싫어서 잠깐 다시 앉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그 짧은 순간에 디아나가 한 손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누른 것을.

    보아하니 그곳이 젖어있었는데, 진지한 얘기를 하는 사이에 잠깐 잊고 있었다든가 그런 거겠지.

    아마 원인은, 아까 내 물건을 만졌기 때문에?

    하지만 저렇게 아무렇지도 일어난 걸 보면, 그 짧은 시간에 마법으로 처리를 했다는 건가? 과연 대마법사님이야.

    뭐, 변태 대마법사님이지만.

    "도와줄까?"

    "아닐세. 차라리 이 몸이 혼자 진압하는 것이 빠를 걸세."

    아무튼 나도 그런 디아나를 따라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디아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어 내 도움을 거절했다.

    "에이.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지. 어차피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이런 일이라도 도움을…."

    "괘,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가려고 하자, 디아나는 절대 따라오지 말라는 듯 손바닥으로 날 팡팡 밀치며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쳇. 들켰나.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마법으로 처리를 했어도 안쪽에 남아있는 물기까지 처리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살짝 확인해보고 놀려주려고 했는데.

    "구원. 뭐 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같이 있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그나저나…."

    사라의 날카로운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넘기고, 나는 식탁을 한 바퀴 둘러봤다.

    디아나하고 레이첼 누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나랑 같이 저택에 묶여 있어야 하는 거잖아.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내가 기절해있는 거니까 밖에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디아나가 돌아올 동안 얘들이랑 뭘 하는 게 좋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떠오르는 게 야한 생각밖에 없는데.

    아니. 그도 그럴 것이 말이야, 밖에 못 나가니까 할 수 있는 게 한정되어있잖아.

    나도 나갈 수만 있으면 무기를 개조하거나 하고 싶다고.

    안 그래도 특훈하면서 무기 개조할 생각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러시나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자, 레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부터 내 얼굴을 빤히 엿봤다.

    아름다우시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출렁이는 새하얀 가슴이 황홀하다.

    "아니. 밖에 못 나가니까 뭘 하면서 기다리는 게 좋을까 싶어서."

    "어차피 평소에도 밖에는 잘 안 나가잖아. 던전 갈 때나 여자 만나러 갈 때 빼고는. 맨날 집에서…."

    사라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사실로 때리지 마라. 괜히 더 아프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이렇게 쾌활한 나이스 가이이다 보니 믿기지는 않겠지만, 이래 봬도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는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이나 하는 게 낙이었던 놈이라고!

    그리고 전부 너희가 너무 예쁜 게 잘못이야!

    눈 앞에서 이렇게 예쁜 애들이 계속 보이니까 내가 계속 그런 생각만 하게 되고 어디 나가지를 못하겠잖아!

    평소라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나는 이번엔 살짝 비틀어 보기로 했다.

    "하고 싶다고?"

    "아, 아니거든 이 변태야?!"

    훗. 봤냐. 이게 바로 상대방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다.

    "일단 마틸다는 신전에 오늘은 못 가겠다고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내가 기절해있다는 설정이니까."

    "아…괜찮아요. 어차피 신전에서 사람이 오니까요. 그때 말하면 되죠."

    내가 신경 써준 게 기쁜 건지, 마틸다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그런다고 했었지. 그럼 따로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는 건가.

    "그러니까…당시인…."

    하지만 마틸다의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내 눈앞까지 다가온 마틸다는, 핑크빛 시선을 내게 던지며 두 팔을 뻗어 내 목 뒤로 감았다.

    그리고는 내 입술에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혀로 할짝할짝 내 앞니 쪽을 핥았다.

    …아니. 야. 조금 있으면 신전에서 사람이 온다면서.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저주를 해제 작업을 하자는 어필을 하는 건데.

    오늘은 진짜 아무 할 일도 없으니까, 네가 아무리 이렇게 핑크빛 모드로 달라붙어도 당황해서 떼어놓으려고 하거나 하지 않을 거거든? 오히려 엄청 환영이거든?

    그만 안 하면 신전에서 사람이 오든 말든 진짜 이대로….

    "그, 그 이상은 안 돼요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이아가 나와 마틸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뭐, 뭐지? 설마 천사님이 질투해주시는 건가?

    "그, 그게…추기경님! 성직자로서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레이아는 일단 우리를 떨어뜨려 놓고는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바라보더니, 꼬리까지 위로 치켜세우고는 있는 힘껏 화났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틸다를 꾸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냥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분위기처럼 보여서 비집고 들어왔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뭐, 아까 전에 우리 사이에 비집고 들어왔을 때의 그 표정은, 그런 게 전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우리 천사님도 조금은 질투를 할 줄 알게 되신 건가?

    아니. 물론 천사님은 언제나 자기도 사람이고 질투도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대놓고 질투하시는 천사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지만,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내게 등지고 마틸다를 꾸중하고 있는 레이아의 그 위로 치켜세워진 꼬리가, 끝부분만 부자연스럽게 꺾여있는 것을.

    마치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꼬리가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용사님이 엄청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계셨다.

    아, 천사님. 질투심이 폭발해서 그런 게 아니셨구나. 어쩐지.

    구석에 있는 실비아마저 그런 사라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정도로, 사라의 표정은 엄청났다.

    하지만 나는 둘만큼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들 진정해. 쟤 지금 화난 게 아니라…아니. 질투로 화도 조금 났겠지만 그것보다는 성벽이 자극받아서 저런 표정인 것뿐이니까.

    나는 사라에게 다가가서, 그 귀에 살며시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여줬다.

    "야. 뭘 이 정도로 흥분을 하고 그러냐. 하여간 대체 누가 변트아아아악!?"

    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너무하지 않냐!?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갑자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우리 집사님이었다.

    "아, 신전에서 보낸 사람이 온 모양이네요."

    일반 성직자한테 성직자의 교리를 어긴다는 이유로 혼난다는 상당히 드문 체험을 하고 있던 추기경님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바넷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앨리시아님입니다."

    "뭐?! 또?!"

    앨리시아씨.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티 내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 나름 잘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으면서…아니. 내가 아프다고 알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래. 한 번 차버린 몸으로서, 앨리시아의 걱정하는 마음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럼 일단 난 내 방에서 기절한 척을…."

    내가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천사님이 내 손목을 잡아서 세웠다.

    응? 천사님? 왜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천사님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대신, 더욱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다.

    "어, 어쩌죠? 저나 추기경님은…아, 아예 안 되는 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니. 천사님.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건데요?

    "저, 저도 갑자기 그렇게는…시, 실비아씨! 부탁할게요!"

    하지만 그런 영문 모를 말을, 사라는 또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뭔데? 실비아한테 뭘 부탁한다는 건데?

    "느, 느헷?!"

    그나마 다행히도 못 알아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갑작스러운 사라의 말에 실비아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아. 이걸로 겨우 설명을 들을 수 있겠어.

    "자, 빨리요! 바넷사씨! 조금만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렇게 기대했던 나였지만, 사라와 레이아와 마틸다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와 실비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역시나 내 방이었다.

    "그럼 그 사람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까 하고 있어!"

    "아니 뭘…."

    쾅!

    "뭘 하라는지 말이라도 해주고 문을 닫으라고…. 그렇지 실비아?"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쉰 후, 실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실비아로 말하자면.

    "아우…아아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에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였냐.

    "우…자, 잘 부탁드립니다아아앙…."

    아니. 야. 당황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울지는 말자.

    어쩔 수 없잖아. 이미 디아나가 해버린 거니까.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날 살리기 위해서, 계속 번갈아 가면서 힐링 섹스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티는 내야 하지 않겠어?

    물론 디아나처럼 대놓고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앨리시아가 들어왔을 때 밤새 엄청나게 해댔다는 티를 내야지.

    식사하고 온 사이에 이미 간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다시 그런 분위기로 연출해내려면, 우리 실비아가 제일 제격이기는 했다.

    솔직히, 그냥 앨리시아를 방에 안 들이면 그만 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방 안에서 힐링 섹스 중이라고 변명만 하면, 안 들여보낼 이유도 충분하고.

    다들 갑작스러운 앨리시아의 방문에 그런 생각을 못 해낸 건지, 아니면 병문안 온 사람을 얼굴도 못 보게 하고 내쫓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833화에서 디아나가 마차를 가장 소박한 것으로 준비하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아예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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