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덴 -->
19살이라니. 이 녀석, 보기보다 훨씬 어렸구나.
어쩐지 앨리시아가 우리 미리엘 우리 미리엘 하면서 은근히 애 취급하더라.
잠깐 그렇게 딴생각을 해버렸을 정도로, 미리엘의 스탯 창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애써봐도, 눈앞에 떠 있는 스탯 창의 글자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마인잖아. 이 녀석.
아니. 그야 용사는 아니지만, 마인이잖아!
마인이란 거 그런 거 아니었어?! 우리 여신님 쪽에 서큐버스가 있다면, 전쟁신 쪽에는 마인이 있다! 같은, 전쟁신 쪽의 왕족 같은 거 아니었어?!
왜 그 마인이 또 여기서 튀어나오는데?!
아니. 사실 추측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없는 건 아니지만, 괜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미리엘의 스탯 창에서 제일 충격적인 내용은 이 녀석의 종족이 마인이라는 게 아니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의 성. 아우덴이잖아. 우리 사라랑 똑같은.
아니. 확실히 말이죠. 디아나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어요.
사라의 아빠, 그러니까 사우론 아우덴은 20년 전쯤에 혜성같이 나타난 용사라고.
그리고 그런 용사의 씨를 얻으려고 무수히 많은 귀족이 달라붙었다고.
무엇보다 그 사우론씨는 분명 처음에는 고향에 연인이 있다면서 거절했다고 했으니, 그때 그 고향에 있는 연인이라는 분과의 사이에서 이미 사라가 태어난 상태였다고 한다면 시기적으로도 아귀는 딱딱 맞아떨어졌다. 우리 사라가 21살이니까.
게다가 결국 복상사했을 정도로 해댔다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그야 애가 하나둘쯤은 생겼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없지만, 디아나야. 적어도 우리랑 동맹 관계인 클랜의 클랜장이 우리 사라의 이복동생이라는 얘기 정도는 미리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응?!
아니. 그나마 사라한테 숨긴 건 이해가 돼.
안 그래도 사라는 아빠가 복상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아빠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었으니까.
그런 아빠가 다른 여자랑 애까지 가졌다고 하면, 오히려 기분 나빠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사라한테 숨긴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나 같아도 섣불리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말이지, 적어도 나한테는 얘기해 줬어야지!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닐 거 아니야! 뜬금없이 나타난 잘생긴 용사의 애라고! 태어나자마자 사방팔방에 소문이 다 났을 애라고!
지고의 대마법사님이 모르고 계셨다는 변명은 안 통하니까 말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디아나에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음? 후훙."
하지만 디아나는 그런 내 시선을 대체 어떤 의미로 착각한 건지,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우쭐해서는 없는 가슴을 쫙 폈다.
예뻐서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니거든?! 아니. 그야 예쁘지만!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뜨거운 시선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니거든 이것아?!
"식사는 벌써 끝난 건가? 보기보다 소식을 하는군. 좋은 태도다. 지금부터 던전에 들어가는데 괜히 배를 꽉꽉 채워두는 건 좋지 않지."
게다가 미리엘은 미리엘대로 내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걸 보고는 완전히 착각해서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착각한 건 좋은데 말이야. 앨리시아한테 눈치 주면서 갈구는 건 그만 좀 해라.
애 불쌍하지도 않냐? 안 그래도 만찬을 앞에 두고 억지로 깨작이는 척하는 것이 보기만 해도 불쌍해 죽겠는데.
"그럼 갈까."
그리고는 당장 출발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두근두근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19살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곧장 안 갈 거다."
"그, 그런가…."
하지만 내가 그 내밀어진 손에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하자, 미리엘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 털썩 자리에 다시 앉았다.
사람 밥 먹고 있는데 옆에서 대놓고 시무룩해 하지 마라! 정신 사납게! 안 그래도 지금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너희가 이렇게 일찍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말이야.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조금만 기다려줘."
"응.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 너무나도 시무룩한 표정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연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난 내 여자 말고는 차가운 도시 남자니까 평소 같으면 이렇게까지 신경을 안 썼겠지만, 얘가 사라 동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또 막대하기는 조금 그래서 말이지.
"그러면 바넷사. 준비한 음식 좀 한 곳에 쌓아두고 있어 줘. 이따가 가서 한 번에 넣을 테니까. 그리고 디아나. 잠깐 나 좀 보자."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곧장 디아나를 불러냈다.
"움?"
디아나는 내 부름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따라오더니, 방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앗, 자네. 야한 건 안 되네. 아침부터 이 몸에게 시선이 고정되어있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태도…으갹!"
그리고는 어째선지 식당에서 그대로 손에 들고 온 차를 한입 홀짝이더니, 곧바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이것아!"
"으, 으햐햐헤에에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디아나의 머리에 손을 턱 얹고 좌우로 마구 흔들자, 디아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며 팔을 바둥바둥거렸다.
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으햐햐헤?
실비아 때문에 이런 말의 해석은 익숙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모르겠다.
"햐흐…햐흐…."
내가 손을 멈추자, 디아나는 곧장 두 손을 자신의 입에 가져가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다만 손을 입에 완전히 대는 건 아니고, 입 근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혹시 혀 깨물었냐?"
"흐허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과연. 그럼 아까 으햐햐헤의 정체는 그만하게였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미안. 괜찮냐? 가서 레이아라도 불러올까?"
평소 같으면 힐링 섹스 얘기를 꺼내며 장는을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할 얘기가 할 얘기이니 자중해야지.
"우으으…."
하지만 고작 혀를 깨문 걸로 힐러까지 부르는 건 굴욕이라고 생각한 건지, 우리 대마법사님은 고통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맹렬히 저었다.
"후아…후…그래서 뭔가?!"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고통에서 해방된 디아나는, 살짝 울상을 지으며 내게 화내듯 외쳤다.
이상하다. 분명 들어올 때는 내가 디아나한테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아니. 내가 잘못한 게 맞기는 하지만.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너 왜 나한테까지 미리엘의 정체를 숨긴 거냐?"
"으음?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인가? 미리엘양의 정체?"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대놓고 그렇게 말한 나였지만, 디아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치미를 뚝 뗐다.
얘는 내가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이러네.
어차피 언젠간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닐 텐데.
"또 또 시치미 뗀다. 미리엘이 사라의 이복동생이라는 얘기 말이야. 왜 나한테까지 숨겼는데?"
"아뜨…푸후후후훕!"
그리고 내가 더욱 대놓고 말한 순간, 다친 혀에 따뜻한 차가 닿는 건 무서운지 조심스럽게 차에 입을 가져가던 디아나가 그대로 차를 성대하게 뿜어버렸다.
"켈록! 켈록! 지, 지금 뭐라고 했는가?! 누가 누구의 뭣이라고?!"
그리고는 내게 차를 뿜은 걸 신경도 못 쓸 정도로 당황해서는, 다급히 내게 달라붙으며 그렇게 외치는 디아나.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겨우 디아나가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냐. 진짜로 그냥 너도 몰랐단 거냐.
"아니. 그게 말이지. 방금 확인해봤는데. 미리엘 성이 아우덴이던데?"
"……미리엘 양 역시도 사우론 아우덴의 딸이었다는 말인가."
상황을 파악한 내가 침착하게 그렇게 말해주자, 디아나는 잠깐동안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디아나는 애써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과연 대마법사님. 그렇게 당황하고도 회복이 빠르셔.
"아마도…그렇게 되겠지? 디아나도 몰랐던 거야?"
"음. 전혀 없네.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레온군이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용사로 알려져 있다고. 그런데 사우론 아우덴이 실은 또 다른 자식을 낳았고, 그걸 이 몸이 모를 정도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건 뭔가 사정이 있을 것 같구먼. 심지어 실비아 양마저 모르는 눈치 아니었던가."
아, 그러고 보니.
온갖 귀족 집안에서 사우론 아우덴한테 들이밀었던 거니까, 만약 그중 한 명이라도 자식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면 고위 귀족인 실비아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예전에 사라의 과거 얘기를 잠깐 했을 때, 실비아는 우리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즉, 실비아도 모르는 얘기라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 거야?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았다니."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세. 당시 사우론 아우덴과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말일세. 수발을 들어주는 메이드부터, 고위 귀족까지. 심지어 따로 남편이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으니, 본인이 숨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걸세. 다만 용사의 피를 얻으려 한 건, 결국 가문을 더욱 부흥시키기 위한 것. 그렇게까지 해서 용사의 피를 얻으려고 했으면서 어째서 겨우 태어난 아이를 굳이 숨긴 것인지, 이 몸은 그것이 더 의문이구먼."
과연. 확실히 남편 있는 여자나 이름도 모르는 시녀가 임신한 거라면, 그게 사우론 아우덴의 자식이라고는 아무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겠지.
디아나의 말대로 본인이 숨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나는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거라면 나한테 짐작 가는 게 있어."
"음? 그런가? 대체 뭔가?"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용사라는 거…유전이지?"
"음? 음. 그렇게 알려져 있네. 유전이 아니면 플리투스 가문이 어떻게 대대로 용사였겠고, 어째서 사람들이 사우론 아우덴의 피를 얻으려고 아우성이었겠는가."
플리투스? 아, 그 쓰레…레온네 가문 말이지. 응.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머리 어디 한 구석쯤에서. 아마도.
"그 유전이라는 거…100%야? 용사가 자식을 낳으면 무조건 자식도 용사인 거야?"
"흠. 적어도 플리투스 가문의 직계 중 용사가 아닌 케이스는 들어본 적이 없네만…흐으음. 과연. 그런 얘기인 겐가."
그리고 내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를, 우리 머리 좋은 디아나도 금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응. 미리엘 그 녀석, 마인에 아우덴이면서 용사는 아니더라고."
"흐으으음…."
내 얘기를 듣고, 디아나는 턱에 손을 대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서 날 쳐다보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구먼.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구먼. 자신의 가문에 용사의 피를 섞고 싶어서 낳은 아이가, 용사가 아니었다. 어느 가문인지는 몰라도, 필요 없어진 사생아를 키워 줄 정도로 정 많은 가문은 아니었다는 얘기구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그리고, 미리엘양의 목적 또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구먼."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디아나에게 맞장구를 쳐준 나였지만, 우리 똑똑한 디아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미리엘 양이 미궁 심층을 향하는 이유 말일세. 어쩌면 미리엘 양은 용사가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
"뭐? 하지만 용사가 되려면…아."
"음. 마신의 축복을 받아야 하지. 미리엘양이 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 던전과 마신이 관련 있다는 정보를 알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되네만,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던전 탐험을 시작한 거라고 생각하면 전부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전부 맞아 떨어진다.
보통 아기 때 버려지면 자신의 출신도 모르고 그대로 고아로 떠돌다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 세계는 다르다.
이 세계는 간단한 마법으로 자신의 성과 종족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물론 레이아처럼 종족이나 성을 알아도 출신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아우덴 정도 되는 유명한 성을 가지고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리엘은 자신의 성을 보고 자신의 출신을 깨달아버린 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또 하나의 힌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미리엘 자신의 레벨이 더 높다고는 하지만, 쓰레…레온은 용사다. 전투력 하나만 놓고 보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용사.
그리고 그런 용사와 전투력이 호각이라는 건,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 절대 열등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하지만 레온과 자신의 실력이 호각이라고 말했을 당시의 미리엘은, 결코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었지만, 그게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게다가 용사가 되기 위해 던전 심층을 향한다고 가정하면, 더 강해지기 위해 던전에 내려간다는 말도,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니까.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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