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14화 (79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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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정체불명의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뭐, 정체불명이라는 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은 그 불안감의 정체가 뭔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지만.

    결국 어젯밤에, 사라가 안 왔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제는 분명 사라 차례가 맞았다. 절대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이런 걸 잘못 생각하겠어? 착각했다가 어떤 참사를 맞이하려고.

    만에 하나 내가 착각을 했어도 밤의 차례는 사라 디아나 레이아 셋이서 번갈아 가며 돌아가는 거니, 적어도 레이첼 누님의 차례일 리는 절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왜? 왜 안 온 거지?

    실은 우리가 열중하는 사이에 왔었는데, 우리 모습을 보고 그냥 가버렸다?

    아니. 사라 걔 성격에 그럴 리가 없는데.

    흥분해서 덮치러 들어왔든, 화나서 욕하거나 때리러 들어왔든, 어느 쪽이든 우리 모습을 봤으면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을 거다.

    아니면 진짜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안으로 들어오면 날 때려 죽여버릴까 봐 마지막 이성을 짜내서 일단 돌아갔다든가?

    …잠깐만. 진짜로 있을 법해서 무섭잖아.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나는 자연스레 손이 덜덜 떨릴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일순 손바닥 가득 잡고 있던 레이첼 누님의 가슴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 가슴으로도 날 진정시킬 수 없는 수준의 공포라니. 사라, 이 무서운 아이.

    어차피 만져도 진정 안 되는 거라면 손 떼라고? 어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럴 때일수록 더 집중해서 공포를 이겨내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라고.

    하아. 말랑말랑 기분 좋아.

    "으흣…."

    그렇게 누님의 가슴을 만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진심으로 자극을 해버렸던 모양이다.

    고이 잠들어있던 누님은 가벼운 콧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이더니, 이윽고 살며시 눈을 떴다.

    "……읏?! …아, 자, 잘 잤니?"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바로 눈앞에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잠깐 멍하니 있던 누님은, 몸을 움찔거리면서 번쩍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자기가 어떤 상황에서 잠들었는지 깨달은 듯,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해왔다.

    과연 누님. 이번에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응. 레이첼도. 잘 잤어?"

    "후훗. 응. 살짝 노곤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나른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는 레이첼 누님.

    딱히 불평하는 건 아닐 거다. 그 증거로 표정도 무척 밝았고.

    "미안. 일도 있는데 너무 무리하게 했나?"

    "아, 으응. 괜찮아. 그…기분 좋았고…."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가 일부러 사과하자, 우리 레이첼 누님은 역시나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셨다.

    "과연 욕구불만 안내원님."

    "저, 정마알. 그거 아직도 하는 거니?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연기니까? 알고 있지?"

    "네."

    그리고 그걸 꼬투리 잡아서 내가 장난을 치자, 누님은 이번엔 당황하는 일 없이 부드럽게 받아치셨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눈은 꽤나 진심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놀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시간은 괜찮아?"

    전에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허겁지겁 나갔었던 누님이, 오늘은 나보다도 늦게 일어난 거다.

    사실 아까 내가 사과한 것도, 누님이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걸 보고 누님에게 너무 부담을 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냥 장난만 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

    "응. 괜찮아. 근무 시간을 조정했으니까. 그렇게 여유 있는 건 아니지만, 전처럼 다급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우리 커리어 우먼 누님께서는 이런 점에는 완벽하신 분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어제 아침도 같이 먹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럼 조금 더 알콩달콩하고 있어도 되겠네."

    "후훗. 알콩달콩 이라니. 그게 대체 뭐니?"

    "지금부터 할 거."

    "꺄악!"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누님의 몸을 끌어안아 침대에 다시 눕히고는 곧장 키스를 했다.

    그리고 누님도 귀여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내 키스를 받아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바넷사가 부르러 올 때까지 알콩달콩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물론 바넷사가 찾아온 다음에는 그 뒤를 따라 식사를 하러 내려가게 됐지만, 식당에 향하면 향할수록 내 발걸음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아까는 누님과 알콩달콩하면서 살짝 현실 도피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현실 도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진짜로. 사라가 어떤 반응을 할지 예상이 안 돼서 더 무서운데.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말이야.

    화낼 때 화끈하게 화내고 뒤끝 없는 사라가, 분명히 화냈어야 할 타이밍을 그냥 지나치다니.

    "왜 그래?"

    내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던 건지, 레이첼 누님이 내 얼굴을 엿보며 걱정해주셨다.

    부럽다. 무지하다는 건, 때론 행복한 거구나. 누님. 우리 이제 큰일 났어요.

    아니. 적어도 레이첼 누님만큼은 내가 지키지 않으면.

    사라의 분노는 내 한 몸 바쳐서 온전히 다 받아내자.

    누님은 모르고 한 거니까.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식당에 도착해있었다.

    이제 저 문만 지나가면 지옥이 펼쳐지는 건가.

    젠장. 빌어먹을 과거의 구원. 진짜 내가 언제 한 번 잡아서 족쳐야 했는데. 맨날 문젯거리는 나한테 떠넘기고 말이야. 그 빌어먹을 자식.

    식당에 들어가기 무척 두려웠지만,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바넷사는 무정하게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역시나 사라가 먼저 와 있어서.

    "어머, 좋은 아침. 레이첼씨도 좋은 아침이에요."

    사라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인사를 해줬다.

    …뭐,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일단 안심시킨 다음에 쥐어패려는 공명의 함정인가?

    아니면 실은 전부 기획된 개꿀잼 몰카…아니. 나로서는 전혀 재미없지만.

    "그, 그래. 너도 좋은 아침…이지?"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사라의 눈치를 보면서 내가 그렇게 물어보는 순간, 사라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히이이익! 역시 일단 안심시키고 쥐어패려는 속셈이었어!

    "뭐야?"

    "뭐, 뭐가?!"

    "아침부터 태도가 이상하잖아. 왜 그렇게 쭈뼛거리는 거야?"

    하지만 사라는 화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 태도가 너무 의심스러워서 살짝 미간에 주름을 만든 것뿐이었다.

    휴우. 괜히 쫄았네. 아, 아니. 안심할 때가 아니지.

    대체 뭐지? 아니, 진짜로. 진짜로 대체 뭐지? 얘 혹시 머리라도 다쳤나? 어제가 자기 차례였던 걸 모르는 거야?

    "음. 레이첼."

    "아, 네. 디아나님."

    "어떻게 한 건지 나중에 이 몸에게도 살짝 알려주게."

    "네? 뭐, 뭘요?"

    "그러니까 저 자를 어떻게 저렇게…."

    "야! 다 들리거든?! 그리고 나 레이첼 누님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거든?!"

    아니. 잠깐만. 뭐야. 그러고 보니 사라뿐만 아니라, 다들 나랑 레이첼이 같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심지어 그게 당연하다는 태도잖아.

    설마 어제 진짜로…?

    "으음…그럼 대체 왜 그러는가?"

    "아니. 잠깐. 그러니까, 어제 레이첼 누님 차례였다고?"

    "자네는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겐가? 하룻밤 같이 자고 왔을 것 아닌가."

    "아니. 그야 그렇지만!"

    "저…레이첼씨? 혹시, 제대로 설명 안 드리셨나요?"

    그리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내게, 구원의 손길을 건넨 건 이번에도 역시 우리 천사님이었다.

    크흑. 천사님. 역시 이 구원을 구원해주시는 건 천사님밖에 없으십니다.

    아, 참고로 지금 건 말장난 맞아.

    뭐? 왜? 딴 놈은 안 되지만 난 해도 괜찮아. 내 이름이니까.

    "아…죄, 죄송해요. 그게, 긴장해서 그만. 일단 제 차례라는 말은 했지만요."

    아니. 확실히 하긴 했지만요.

    그거 진짜로 모든 룰을 다 알고서 본인 차례라고 하셨던 게에요?! 난 또….

    "흠. 뭐, 그럴 수도 있네. 이해하네. 그럼 어쩔 수 없구먼. 이 몸이 설명해주겠네."

    그리고 천사님 덕분에 드디어 뭐가 문제였는지 파악되자, 우리 설명하기 좋아하는 대마법사님께서 나서주셨다.

    그리고 디아나는 엣헴하고 없는 가슴을 자랑스럽게 펴면서, 뭔가 칭찬해달라는 오라를 잔뜩 내뿜으며 상황을 설명해줬다.

    뭐,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내가 던전에 처박히며 수련하는 동안 실비아나 마틸다가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리고 나와 만나지 못하는 동안 쓸쓸해 하고 있는 바넷사와 레이첼의 얼굴을 매일 마주하게 되니, 자기들끼리 너무 욕심을 부리며 독점하려고만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특히 지금까지 빈말로도 성과가 좋았다고 하기는 힘들었던 마틸다의 저주가 빠르게 풀려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마틸다의 파티 이탈까지 발생하게 된 거다.

    이렇게 되면 안 그래도 밤을 독점하고 있는 삼인방이, 밤 이외의 시간에도 나랑 같이 있는 시간도 압도적으로 길어지게 된다.

    물론 실비아도 같이 던전을 다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틸다, 바넷사, 레이첼은 안 그래도 내가 던전에서 올라왔을 때밖에 날 볼 수 없는데, 심지어 요즘의 난 위에 있는 시간보다 던전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점점 더 길어질 예정이기까지 했다.

    과연 그 상황에서 자신들끼리만 밤을 독점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물론 욕심 같아서는 계속 그 체제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언젠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다.

    애초에 바람둥이 낭군님을 둔 것부터가 문제이니, 본처인 우리들이 아량을 베풀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머리를 맞대 얘기한 끝에, 앞으로는 전원이 번갈아 가면서 하루씩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처음을 연 것이, 바로 내가 던전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와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레이첼 누님이었던 거고.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디아나가 왜 이렇게 가슴을 펴고 칭찬해달라는 오라를 마구 내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내가 이룩한 하렘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셋이 양보를 한 거다.

    이 녀석들…그런 생각을….

    "…너희들…정말로 괜찮겠어?"

    "말해두지만, 정실은 이 몸일세. 그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 명심하도록 하게."

    내가 디아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하자, 디아나는 칭찬해달라는 티를 엄청 낸 주제에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야. 바보야. 그런 말을 하면 또 사라가….

    "잠깐! 디아나! 뭘 또 은근슬쩍 자기가 정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봐. 이런다니까. 디아나 너 이렇게 될 거 알고 일부러 그런 거지.

    "…라고 하고 싶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네요."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사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내 쪽을 바라봤다.

    뭐, 뭐지? 얘가 자기 차례까지 미루면서 양보하더니 진짜 성격이 바뀌었나?

    사라야. 어른이 된 거니? 크흑. 막내로서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우리 사라가 어느새 이렇게….

    "야. 구원."

    그렇게 감격하는 날 바라보며, 사라는 무지막지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감격에 젖어있던 나는, 그만 사라의 목소리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응. 왜 그러니 사라야?"

    "그러니까 어젯밤이 레이첼씨 차례였다는 걸, 구원은 몰랐던 거지?"

    "하하핫. 나도 참. 레이첼 누님이 말하기는 했는데, 난 또 누님이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아지 뭐야. 진짜 깜짝 놀랐잖아. 너희가 이런 마음씨 고운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내가 여자 보는 눈 하나는 완벽…."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사라를 칭찬하려 했지만, 사라는 내 말을 중간에 끊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즉, 내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레이첼씨랑 실컷 즐겼다는 거지?"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물론, 사라는 전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야. 너 진짜 죽을래?"

    사라는 내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턱 잡고는 그대로 손가락에 힘을 줘서 조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깨진다! 깨진다! 깨진다!

    진짜로! 진짜로 깨져요! 지금 쩌적하고! 쩌적하고 두개골에서 들리면 안 되는 소리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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