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01화 (78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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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다."

    앨리시아도 이 이상 얘기해봤자 밑천만 드러날 거라는 것 정도는 예감했는지, 내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뭔가를 펼치고, 앨리시아는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에 따라 앨리시아의 꽤나 커다란 가슴이 두 팔 위로 얹어지고 모이는 형태가 됐다.

    게다가 그 예쁜 커피색 피부가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보니, 그 모아진 가슴의 윗부분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이 녀석, 혹시 아직도 날 유혹해 보려고 그러는 건…아니. 이 녀석이 그런 재주 좋은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나.

    태도를 보아하니 애초에 드레스를 입고 온 것부터가 자기 의지가 아닌 모양이고.

    아마 자기가 드레스를 입고 저렇게 팔짱을 끼면 어떻게 보일지 생각을 못 하는 거겠지.

    진짜 여러모로 위험한 녀석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슴에 쏠리려고 하는 시선을 억지로 내려서, 테이블에 펼쳐진 천에 집중했다.

    그 천의 정체는 바로 지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건, 아마 거북이굴의 지도겠지.

    지도는 넓은 천을 가득 메울 정도로 꼼꼼하게 작성되어있어서, 대충 둘러본 바로는 어디 하나 빈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그사이에 완성한 거야?"

    상당히 빠르잖아.

    단순하게 5.5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찾는 거라면 그사이에 완성했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게 없었지만, 보아하니 아예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전부 지도를 작성한 모양이니까.

    그야 물론 6계층을 전전하고 다니는 실력자인 앨리시아가 붙어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삼인방의 실력도 날이 갈수록 급상승하고 있다는 건가. 응? 잠깐만.

    뭔가를 깨달은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던 순간, 앨리시아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철저하게. 하지만 비밀의 방 같은 건 찾지 못했어."

    아무래도 앨리시아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 그냥 아까 전의 대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네가 아니니까 거북이의 성별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네가 그랬잖냐? 수컷은 보통 숨겨진 방에 있다고. 그래서 원래는 숨겨진 방 정도는 찾아내고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시아는 얼버무리듯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원래 다니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계층에서 이렇게 길이 막혀버리고 그걸 우리한테 얘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꽤나 무안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로선 다음 소계층의 통로를 찾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 또 네 그 성자님의 힘으로만 찾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고 말이야."

    "지금까지의 패턴을 생각해보면, 아마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사실 짐작 가는 게 있거든."

    미안한 말투로 말하는 앨리시아에게, 나는 별거 아닌 말투로 가볍게 그렇게 대답해줬다.

    실은 거북이굴에서 거북이를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이번 트릭은 대충 짐작이 됐거든.

    "거북이 등껍질이 벽으로 위장해서 숨겨진 방을 막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틀렸어."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앨리시아가 너 바보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녀석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면 괜히 더 열 받는단 말이야.

    하지만 사실 앨리시아가 말한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딱히 돌려줄 말이 없었다.

    "무슨 뜻이야?"

    "새끼야. 네가 우리도 발견 못 한 던전의 비밀을 파헤쳐낸 건 맞지만, 그건 성자의 힘 때문이고. 내가 너랑 던전 다닌 짬이 얼마나 차이 나는데, 그 정도 생각은 당연히 해보지 않았겠냐?"

    그렇게 말하고, 앨리시아는 다시 팔짱을 끼고는 마치 보란 듯이 턱하고 등을 소파에 기댔다.

    야. 그러니까 괜히 가슴 강조하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갈 때마다 우리 디아나가 죽일 듯이 쳐다보잖아?

    원망받는 건 나뿐만이 아니란 거 알지? 너도 원망을 산다니까?

    대마법사님한테 원망 사면 앞으로의 인생이 고달파질걸?

    "당연히 전부 쳐봤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앨리시아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황당한 말을 해왔다.

    "뭐, 뭘?"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너무 황당해서 나는 재차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뭐긴 새끼야. 너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벽 말이야. 벽. 전부 쳐봤다고. 거기 5계층으로 이어진 통로 보이지? 그것도 벽을 쳐서 위장하고 있던 계층의 주인을 처치하고 발견해낸 거니까."

    …여, 역시나. 너, 그게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할 말이냐?

    여러 의미로 대단하기는 하다만.

    4계층에서 얼음굴로 갈 때도,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뭐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던전을 조사하는 거지?

    아니. 거북이가 벽으로 위장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바로 생각해낸 것을 보면, 적어도 던전에 관련된 일에서 만큼은 머리가 나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그러십니까."

    앨리시아의 말에, 나는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다음 소계층으로 가는 통로는 네가 발견해줘야 할 것 같아. 너라면 간단히 찾을 수 있잖아?"

    "아니. 나도 구석구석 뒤져봐야 하는데."

    뭐, 나한테는 맵 기능이 있으니 훨씬 찾기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걸 앨리시아한테 말할 수도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성자 스킬을 쓰면 금방이잖아?"

    하지만 앨리시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범위기가 있잖아? 네가 2계층에서 밀크…."

    "아! 네! 있죠! 있고요 말고요! 네!"

    이 녀석! 왜 또 그런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는 거야!

    사람이 모처럼 잊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걸 쓰면서 다니면 금방이잖아?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쪽에서 오게 하면 되잖아. 설마 그런 생각도 못 한 거냐? 역시 병아리…."

    "코홈."

    "아, 죄, 죄송함다."

    기가 살아서 날 놀리려고 했던 앨리시아였지만, 디아나의 헛기침 한 방에 바로 사과를 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역시 이 녀석을 억제하는 역할은 디아나가 최고네.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앨리시아라도 디아나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방금 전 앨리시아가 했던 말은, 나뿐만이 아니라 같이 다니던 디아나까지 놀리는 말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뭐, 애초에 생각을 못 했던 게 아니니까 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성역선포는 계속 쓰고 다니기엔 마력 소모가 너무 크고, 무엇보다도 파티원들 전원한테도 계속 영향을 주니까 못 쓰는 거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바로 해내다니. 역시 던전에 관한 일에선 머리가 돌아가기는 하는데 말이야.

    "뭐, 아무튼 결론은 내가 가야 한다는 거네."

    하지만 앨리시아한테 그런 내 스킬의 약점을 전부 말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래. 그리고 이왕이면 갈 때 우리도 같이 데려가 줘. 곧바로 탐색을 시작하고 싶으니까."

    "우리라니. 너랑 삼인방?"

    앨리시아는 항상 삼인방과 다녔으니 별생각 없이 그렇게 물어봤지만, 앨리시아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니. 전에 너랑 5계층에 갔던 멤버다."

    "응? 그럼 너희 간부진 전원이잖아?"

    "거북이굴의 다음이면 5.5계층. 5계층보다 탐색 난이도가 올라가는 거니까. 당연하잖아?"

    "하긴 그런가."

    삼인방의 실력이 아무리 급상승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5.5계층에 끌고 갈 수는 없겠지.

    애초에 거북이 굴을 돌파했다는 건 이제 5계층에 다닐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거니, 이제 앨리시아가 뒤를 봐줄 필요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좋아. 그럼…아, 그 전에. 으음…."

    앨리시아의 얘기를 듣고 흔쾌히 승낙하려고 했던 나였지만, 그 전에 먼저 처리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뭐야? 왜 그래?"

    "아니. 그게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마틸다를 쳐다봤다.

    역시 앨리시아한테 조언을 구하는 게 좋을까?

    어쩌면 아라크네 클랜은,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던전에 관한 거라면 디아나보다도 자세한 아라크네 클랜이라면.

    "조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희 사제는 어떻게 밑으로 보내고 있는 거야?"

    아까 삼인방이 급성장했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건 바로 삼인방 중 하나인 에이미는 사제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실력이 급상승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던전을 다닐 수 있는 거지?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라도 추측되는 레이아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라크네 클랜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있다면 클랜 안에서만 전해지는 비책일 테니, 함부로 말해주지는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그냥 지나치기엔 이쪽의 사정이 너무 급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앨리시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뭐야 그건.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을 정돈데."

    하지만 앨리시아에게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응?"

    "아니. 너희 파티는 밑에서는 금보다 귀하다는 성직자를 둘이나 데리고 다니잖아. 그것도 한 명은 다름 아닌 추기경님. 성자님의 힘으로 뭔가 하는 거 아니었어?"

    아아. 과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볼 수도 있었던 건가.

    "아니. 그런 거 없는데."

    "하지만 그 추기경님, 우리랑 같이 5계층까지 갔었잖아? 그것도 던전에는 처음 가보는 거였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건 말이지…."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고민했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쪽에서 먼저 정보를 얻으려고 했던 주제에 이쪽 사정만 비밀로 하는 것도 조금 그랬고, 무엇보다 마틸다의 저주는 이미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니까.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기 때문에 확인차 마틸다와 디아나에게 시선을 주자, 둘 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둘의 확인을 얻고, 나는 앨리시아에게 저주가 던전 아래로 갈 수 있게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마신의 마력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빼고, 그냥 단순히 그 사실만.

    "과연…저주가…. 그래서, 저주가 풀리니까 추기경님이 던전에 깊이 내려가지 못하게 됐다고."

    "그래."

    "미안하지만, 우리 쪽에서 도움 줄 수 있는 건 없어."

    뭔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앨리시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그리고 너희 간부 중에는 성기사도 있잖아?"

    "그러니까 전에도 말했잖아. 그 녀석들은 내가 붙을 정도로 장래가 유망한 녀석들이라고. 에이미는 처음부터 던전에 내려갈 수 있는 소질이 있었던 거야."

    "소질?"

    "그래.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우리는 그 소질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의아해하는 내게, 앨리시아는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귓속말로 그렇게 말해줬다.

    "뭐?!"

    그 말을 듣고, 나는 두 가지 의미로 놀랐다.

    하나는 순수하게 아라크네 클랜이 그런 걸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나머지 하나는…역시 아라크네 클랜은 뭔가 엄청난 걸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6계층 아래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말할 때부터 의심은 들었지만, 역시 아라크네 클랜은 전쟁신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말해두지만, 너희 파티원의 소질을 알아봐달라고 하지 마라. 말했지만, 아무리 동맹이라도 이런 방법까지 알려줄 수는 없거든. 하지만…에이. 서비스다. 거기 있는 추기경님은 해보나 마나야. 젊은 나이에 추기경까지 될 수 있는 실력도 있고, 이미 던전에 거부 반응도 보인 거잖아? 소질이 있는 녀석들은 성직자로서 그렇게 높은 실력은 가질 수 없거든. 너 진짜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우리 미리엘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

    하지만 앨리시아는 내 반응을 다른 뜻으로 착각했는지, 그런 말을 해왔다.

    뭐,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넘어가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가. 역시 아까 나와 디아나가 했던 추측은 전부 정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디아나조차도 제대로 몰라서 추측만 했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대체 뭐 하는 녀석들이지?

    진짜로 전쟁신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던전에 오래 다니다 보니 알게 된 건가?

    "괜찮아. 우리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내용이었거든. 아까 말했잖아? 저주의 마력이 옅어지니까 마틸다가 내려가지 못하게 됐다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아, 그런가. 하긴. 대마법사님이 계시니까."

    "하지만 소질이 있으면 성직자로 높은 실력을 갖출 수 없다는 건, 그럼 에이미나 그 성기사 간부씨도?"

    "그래. 에이미도 릴리도 소질이 있어서 각각 대사제와 성기사까지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그뿐이야. 둘 다 다른 보조 직업도 얻어서 실력을 보완하고 있는 거지. 고위 사제만큼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아래 계층에서는 파티에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장점이 되는 거니까. 아마 너희 쪽의 여우씨도 조만간 성장이 정체될걸?"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건지, 앨리시아는 아까보다 훨씬 편하게 소파에 기대고는 그렇게 말했다.

    뭐, 하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지만.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레이아의 성장이 정체되는 일은 없을걸?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800화 축하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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