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의 마나 -->
그나마 그동안 마틸다가 위험할 일이 전혀 없는 포지션에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후위진을 지키기 위한 포지션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내 어그로 능력 때문에 몬스터가 후위진까지 노릴 일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만에 하나 몬스터가 후위진 쪽을 노리더라도, 사라나 디아나가 버티고 있다 보니 마틸다가 지키는 곳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처리되는 걸로 끝이었다.
즉, 사실 마틸다는 그동안 보험 역할로 있었을 뿐 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와 단둘이서 사냥을 했을 때도, 힐러 역할만 맡겼으니까 말이야.
이런 상황을 의도하고 그런 포지션에 배치했던 건 아니었지만, 정말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뭐, 덕분에 마틸다도 거부반응을 내게 들키지 않고 잘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겠지만.
"하아. 마틸다. 너…."
나는 대체 마틸다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의 곁에 있고싶었는 걸요. 도움이 되고 싶었는 걸요. 비록 아직까지 크게 도움이 된 적은 없지만…."
마틸다는 내 한숨 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변명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여전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니. 알고 있어.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고 날 위해서 그런 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거다.
마냥 추궁만 하는 것도 뭔가 아니잖아?
"하아. 그래. 적어도, 네 저주가 풀려도 날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지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네."
"…네?"
때문에 나는 일단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런 말부터 하기로 했다.
마틸다는 내 말이 상당히 의외였는지 고개를 번쩍 들고 드디어 나와 시선을 마주쳐줬다.
나는 그런 마틸다를 바라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조금 익살맞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그렇잖아? 난 잘 모르겠지만, 그 압박감이란 거 엄청난 거지? 그걸 지금까지 버텨내면서까지 같이 있고 싶어 할 정도로 날 좋아하는 거니까, 저주가 풀린다고 해서 그 마음이 전부 사라지거나 하겠어?"
마틸다는 나에 대한 감정이 전부 저주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최근 들어서는 그런 내색은 전혀 안 하게 됐지만, 분명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을 거다.
"아…다, 당신…기억하고…."
"야. 그 말은 조금 너무하지 않냐? 그럼 내가 설마 그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을까 봐?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걸 말이라고 해?"
"으읏…!"
음.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살짝 멋있었다. 마틸다야. 반하지 마라. 아, 이미 반했나?
혹시 또 핑크빛 모드가 되어버리는 걸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마틸다는 눈가에 살짝 눈물을 머금고, 내 품에 그대로 안겨 들어와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에 비벼댔다.
나는 그런 마틸다를 가볍게 끌어안아 주고, 한 손으로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어쩌면 마틸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나와 계속 같이 있고 싶었던 이유는, 그런 불안감 때문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저주가 사라지면 나에 대한 감정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물론 나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다시 날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있는 감정이 전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던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계속 내 곁에 있으며, 나에 대한 감정을 키워나가려고 했던 거다.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핑크빛 모드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으면서도, 가끔 던전에서까지 핑크빛 모드가 됐던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그리고 방금 전에 내가 한 말로, 그 마음속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던 불안감이 해소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디아나, 분명 던전의 마력은 성직자들이 유독 견디기 힘들어하는 거였지?"
나는 마틸다를 안심시키듯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디아나를 바라보고 그렇게 질문했다.
"음. 이 몸들의 추론이 확실하다면, 아마 던전을 감싸고 있는 마력은 마신의 마력. 그리고 성직자들은 여신님의 마력, 그러니까 신성력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몸이 재구성되지 않겠는가.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말일세. 그러니 레벨이 높은 성직자일수록 던전에 대한 거부 반응이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실제로 아래 계층으로 내려갈수록 성직자를 보기 힘들어지기도 하고 말일세."
역시나, 디아나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추론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내 정기도 성직자들의 신성력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여신님의 마력에 가까운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여신님의 마력 때문에 그렇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거라면, 실은 제일 거부 반응을 일으켜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흠…. 그렇구먼. 어쩌면 그것이, 여신님이 지금까지 다른 차원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구먼. 바로 자네처럼 말일세."
그리고 그런 내 의문에, 디아나는 살짝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기더니 그런 답변을 들려줬다.
"즉?"
"자네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간. 그러니까 여신님도 마신의 손도 거치지 않은 인간은 어떤 마력에도 적응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일세. 확실히 자네 성자가 되기 전에는 마력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아. 과연. 그런 얘기인가.
확실히. 꽤나 설득력이 있는 얘기였다.
여신님의 신도라면 이 세계에 차고 넘칠 만큼 있다.
아마 이 세계의 사람 중 한 명을 엄선해서 성자로 만들고 던전을 향하게 했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얘기였다는 거다.
그런데도 굳이 다른 세계에 있던 날 데리고 와서는 자신의 힘을 줘서 성자를 만들고 던전을 향하게 만들었다는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 이유가 바로 마력 적응력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얘기하고 있는 거다.
애초에 마력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여신님의 마력에도 마신의 마력에도 적응할 수 있는 몸.
때문에 여신님의 힘을 받아 성자가 됐지만, 마신의 마력이 넘쳐나는 던전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몸.
확실히 일리 있는 얘기다.
"응? 아니. 잠깐만. 그러면 레이아는?"
"음. 이 몸도 그것이 의문이구먼."
레이아는 구미호. 그리고 내 추리에 따르면, 구미호는 분명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다.
하지만 레이아의 그 몸에 신성력을 깃들이고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던전 역시도 아무런 무리 없이 다니고 있다.
물론 레이아가 순수 구미호는 아닐 거다.
전쟁신 시대에서 여신님의 시대로 바뀐 건 벌써 수천 년도 전의 얘기다.
당연히 그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여러 종족의 피가 섞였을 테고, 그중에는 여신님이 만들어낸 종족의 피가 더 많았을 거다.
레이아는 단지 그중에서 구미호의 특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뿐일 거다.
게다가 애초에 구미호라는 종족 자체가 의문이 많은 종족이기는 했다.
본능에 잠식됐을 때 보여줬던 모습이나 섹스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면, 구미호는 분명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 맞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구미호의 능력에서는 여신님이 부여해준 것 같은 능력들이 보였다.
특히 여신님이 만든 종족 중 여신님의 특성이 제일 많이 담겨있다고 생각되는 서큐버스와 흡사한 모습이 너무 많이 보였다.
어쩌면 구미호라는 종족은 전쟁신 시대와 여신 시대의 사이에 만들어진, 두 신의 특성을 모두 가진 종족이 아닐까?
아니.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신님의 마력과 전쟁신의 마력 둘 다에 적응할 수 있는 몸.
그야말로 성자에 최적화된 몸이잖아.
마력 적응력 때문에 날 다른 세계에서 데려와서 성자를 만든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레이아를 성자로 만들어 버렸어도 됐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레이아는 신앙심마저 투철하니, 그야말로 성자에 적격인 인물이니까.
아, 혹시 구미호의 힘을 제어 못 하고 있었으니까?
나랑 만나기 전의 레이아는 확실히 섹스로 사람도 죽였을 정도로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자신이 가진 힘이 뭔지도, 왜 섹스로 사람이 죽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세계에 있던 날 고른 건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뭔가 석연치 않단 말이지.
"디아나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바넷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라크네 클랜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나와 마틸다가 있는 것도 뻔히 보일 텐데도, 바넷사는 우리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디아나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아까 나랑 마틸다가 저택에 돌아왔을 때도 마중도 안 나왔었지.
분명 우리가 돌아온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혹시 그날 밤 일로 아직까지 삐져있는 건가?
"이 몸에게 말인가?"
"…세이비어스 클랜에게, 입니다."
디아나도 그걸 눈치챘는지 굳이 그렇게 질문했고, 바넷사는 살짝 뜸을 들이더니 그제야 겨우 힐끔 날 쳐다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뭐, 거의 2주 정도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얼굴 보고 만난 적도 없으니까 말이야.
당연히 바넷사의 기분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아직까지 꽁해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너 아직도 삐져있냐."
"삐져있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그때 생각나서 내 얼굴 보기 부끄러운 거야?"
"…앨리시아님이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짜냐. 그냥 부끄러운 거였냐.
부끄러운 거면 좀 부끄러운 티를 내라고 이것아. 얼굴이라도 조금 붉힌다든지 말이야.
"…아, 응. 앨리시아가 말이지."
하필 걔는 또 이럴 때 찾아오냐.
아니. 일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니, 뭔가 던전에서 진척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지금은 조금 바빠서 그런데, 일단 돌아가고 나중에 우리가 다시…."
"아뇨. 가요."
우선은 마틸다와의 얘기를 마무리 짓는 게 먼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단 앨리시아를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마틸다가 고개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뭐? 하지만."
"괜찮으니까요. 그 사람도 던전의 일 때문에 온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마틸다는, 언제 눈가에 눈물을 고였냐는 듯 또렷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하여간 얘는 멘탈 하나는 진짜 엄청 강하다니까.
뭐, 남의 받은 저주를 자기 몸에 담아두고 견뎌내고 있는 것부터 이미 멘탈이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짓이겠지만.
"알았어. 안내해줘."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선 앨리시아가 무슨 일로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바넷사의 뒤를 따라 접객실로 향했다.
"여어."
그리고 접객실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다소곳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앨리시아가 있었다.
그래. 맥주가 아니라 차를. 그것도 다소곳이 말이다.
심지어 앨리시아는 평소의 그 노출도 있는 갑옷 차림이 아니라, 왠지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
"……."
앨리시아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바넷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넷사. 너 혹시 아까 날 완전히 무시하고 디아나한테만 얘기했던 이유가, 설마 앨리시아가 이러고 와서 그런 거였냐?
눈빛으로 그런 질문을 바넷사에게 던지자, 바넷사는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아무래도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뭔가 할 말 있으면 하지 그러냐."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그런 시선을 교환하는 걸 앨리시아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눈빛으로 어떤 대화를 교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 정도는 눈치를 챘겠지.
"아니. 예쁘다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앨리시아에게, 나는 대충 그렇게 말해줬다.
그리고 그 순간, 거기 있던 여자들의 표정이 동시에 안 좋아졌다.
아니. 디아나나 마틸다, 바넷사는 이해를 해. 질투 날 테니까.
근데 앨리시아 넌 뭔데?! 칭찬해줬잖아?!
"그렇게 안 어울린다는 거냐?! 조금만 여자다워지면 어떤 남자도 유혹할 수 있을 거라고 자기가 말한 주제에!"
"아니! 나 칭찬했거든?! 그리고 너 좀! 진짜! 아오! 날 꼬시려고 온 것도 아닐 거 아냐?!"
얘 혹시 날 암살하러 온 건가?!
우리 애들의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거든?!
만약 차도살인지계를 꾀하는 거라면 아주 완벽해!
"다, 당연히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새끼야!? 너, 너 같은 새끼는 이제 이, 이 만큼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얘기는 됐고 무슨 일로 왔는데?"
내 얘기를 듣고 태도가 이상해진 앨리시아를 보고, 나는 이 이상 대화가 더 나아가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애들 손에.
때문에 나는 황급히 말을 끊고, 얘기를 본제로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 털털한 척했지만 역시 아직 나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던 거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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