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776화 (76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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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던전에 가야겠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모두를 향해 그렇게 선언했다.

    "또 갑작스럽구먼."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레이첼 누님에게 사도 임명을 못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사실 던전에 다니지 않으면 여신님이 날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던전을 공략하는 제일 큰 이유였지만, 레이첼 누님의 사도 임명 실패는 내게 좀 더 구체적인 던전 공략의 동기를 제공해줬다.

    레이첼 누님에게 사도 임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님의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던전을 제패하여 던전이라는 장소가 내게 위협이 되는 곳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 어느 때보다 던전 공략에 의욕적인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렇게 선언을 한 거다.

    "어차피 전에 말했던 대로 당분간은 4계층의 마을에 머물면서 내 성장에 집중할 거니까. 어차피 마을에서 머물 거니까 소모품의 보충도 딱히 할 필요 없고, 너희도 전원이 다 따라올 필요 없이 한 명만 따라오면 되니까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상관없을까 해서. 안 돼?"

    "으음. 안 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네만…."

    "오늘부터 한 명씩 동행하는 건가요?"

    딱히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디아나와 레이아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내 발언에 살짝 곤혹스러워 보였다.

    "응. 그럴 생각. 당분간 너희는 그냥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느긋하게 지내면서 있어 줘. 안 그래도 날 만난 이후로 계속 던전에 따라다니느라 각자 자유롭게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복수 하나만 바라보고 이 도시에 찾아온 사라는 둘째치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각자 원래 하던 일이 있으니까.

    디아나의 마법 연구도 그렇고, 레이아가 꾸준히 하던 빈민가의 봉사 활동도 그렇고.

    "당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하지만 그런 내 발언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오랜만에 마틸다가 조금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며 날 꾸중하려고 했다.

    "아, 미안. 너희도 좋아서 나와 어울려주는 거라는 건 알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알면 됐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당신이 없으면 어디에 다니지도 못하니까요. 당신과 있을 때가 가장 자유롭다고요."

    나도 말하고 나서 내 발언의 어감이 살짝 이상했다는 건 눈치챘기 때문에 곧바로 사과를 했고, 마틸다는 그런 날 보면서 이번에는 격려해주듯 그렇게 말했다.

    "응? 아니. 딱히 문제없을 거라고 보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하지만 이어지는 내 대꾸에, 마틸다는 곧바로 정색을 했다.

    아니.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네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딴 남자한테 핑크빛 모드가 돼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그냥 단순히, 너 그 핑크빛 모드 마음만 먹으면 조절할 수 있잖아.

    웬만해선 그 마음이라는 걸 안 먹어서 문제기는 하지만.

    "아니. 이제 저주도 꽤 풀렸고, 너도 자제해야 할 땐 하게 됐으니까. 만약을 위해 아무나 한 명 같이 붙어 다니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딴 남자 얼굴을 보고 그 상태가 될 것 같으면, 내 얼굴을 떠올려. 그러면 분명…."

    "네에…다, 당신. 물론이에요. 전 당신밖에…."

    아니. 그러니까 너 말이야!

    오랜만에 좀 진지해지나 했더니 또 그거냐?!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핑크빛 모드가 되어 달라붙는 마틸다를 굳이 떨어트려 놓으려고 하지는 않는 나였다.

    던전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이런다고 딱히 곤란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엄청 달라붙어대서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하아…어쩔 수 없네. 갈 거면 빨리 가자."

    그리고 그런 나와 마틸다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사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간다는 것 같은 말투와는 달리, 의욕은 넘치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이거 곤란해졌군.

    나는 그런 사라를 바라보며, 힐끔 디아나의 뒤에 서 있는 바넷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바넷사는 방금 전에 그 얼굴을 쳐다봤을 때와 완벽히 똑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무슨 말이냐면, 엄청나게 차가운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아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던전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쭉.

    그야 그렇지요. 그렇게 당장이라도 섹스할 거 같은 떡밥을 마구 뿌려대서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들고, 갑자기 던전에 가겠다고 하면 당연히 저런 표정이 되겠지요.

    아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던 건 아니야.

    원래 아까 레이첼 누님에게 사도 임명을 실패한 순간부터, 오늘 당장 던전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어.

    그런데 문을 열어보니 바넷사가 그러고 있는 거 아니겠어?

    달래주지 않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니 그런 얘기까지 하게 됐다는 거야.

    그땐 그냥 기세에 맡겨 내뱉으면서 던전에 갈 때 데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되잖아.

    상대는 어제 자기 차례를 레이첼 누님에게 양보한 사라였다.

    게다가 오랜만에 나와 단둘이 있게 되는 거라서 그런지, 사라는 어쩔 수 없다는 말투와는 달리 엄청나게 신나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라한테 오늘 하루만 바넷사에게 양보하라고 해달라고?

    평생 바가지 긁히고 싶은 게 아닌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이대로 던전에 가버리면, 분명 바넷사가….

    "뭐야.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리고 눈치 빠른 사라는 내가 뭔가 주저하고 있다는 걸 바로 읽어냈는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이 내게는 마치 바넷사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일단 가자마자 여관부터 잡을 것도 아니니까, 갑옷은 챙겨입고 가라고."

    물론,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바넷사에게 차례를 양보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흐으음…하긴. 그것도 그러네. 알겠어. 그럼 갈아입고 올게."

    내 말을 들은 사라는 뭔가 엄청나게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날 바라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넘어가 줬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가죽 갑옷을 건네받은 사라가 식당을 나서자마자, 나는 디아나를 바라보고 다급하게 말했다.

    "디아나. 던전에 가기 전에 급히 할 얘기가 있어. 단둘이서."

    "으, 음?"

    영문을 몰라하는 디아나를 데리고 장소를 옮겨서 내 방으로.

    디아나와 단둘이 된 나는 디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디아나. 부탁이 있어."

    "뭐, 뭔가?"

    "내일 하루만 바넷사한테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음?"

    처음에는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던 디아나였지만, 내가 본론을 말하자마자 그 표정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뇨. 들어보세요. 실은 제가 말이죠."

    사실 어제 레이첼 누님께 차례를 양보한 게 사라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애들이 전부 다 하루씩 밀린 거다.

    즉, 사라뿐만이 아니라 디아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역시도 염치없는 부탁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디아나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최고 연장자인 디아나가 제일 마음이 넓으니까.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통해 바넷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를 치료하고자 하는 디아나라면, 바넷사를 위해서 너그럽게 양보해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그래서, 사라양에게는 부탁하지 않고 이 몸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뭔가?"

    그리고 내 사정을 들은 디아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그렇게 되물었다.

    평소의 나라면 주름 생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과연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사라는 아직 애고, 역시 이런 부탁은 마음이 넓은 디아나 누나한테 밖에…."

    "자네, 이 몸이 누나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아, 아냐?"

    "당연히 아니네! 이 몸이 특별히 그런 걸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굳이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이 몸이 제일 누나일세! 누나라는 호칭은 이 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일세.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이 몸이 기뻐할 것 같은가?"

    "아, 응. 그렇지."

    엄청 좋아하잖아. 누나. 누나. 강조하기는.

    레이첼 누님까지 들어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효과가 좋은 느낌인데?

    "아무튼 그래서, 자네는 이 누나에게 하루만 바넷사에게 차례를 양보해달라고."

    "넵."

    "이 몸도 밀리고 밀려서 자네와 오랜만에 차례가 돌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그렇게 말하고, 디아나는 이번엔 살짝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우리 마음씨 착한 디아나는 내 부탁을 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으니까.

    "물론 알고 있지. 나도 기대하고 있어. 실은 그것 때문에 머릿속으로 계획도 엄청…아, 그래. 디아나. 그럼 이건 어때? 바넷사한테 내일 차례를 양보해주는 대신, 교환 조건으로 나도 하나 양보해줄게."

    "음? 무엇을 말인가?"

    "응. 너랑 원래 하기로 계획했던 거, 안 해줄게."

    "대체 무슨 계획을 한 겐가?!"

    "듣고 싶어? 실은 던전에서…."

    "듣고 싶지 않네! 아아아!"

    디아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기 귀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렸다.

    아니. 그러니까 디아나 누나. 누나가 그러니까 내가 디아나 누나를 평소에 누나라고 안 하는 거야.

    뭐, 최고 연장자라는 이유로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뭐, 농담은 이쯤하고, 부탁할게."

    "정말로 농담인가?"

    "아마도?"

    "절대 뭔가 꾸미고 있지 않은가?! 자네라는 남자는! 던전 안에서!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었던 겐가?!"

    내 대답에 확신을 가졌는지,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 주먹을 내 가슴에 댄 채 자신의 이마를 내 가슴 위에 톡하고 부딪혀왔다.

    "자네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앞으로도 이 몸이 언제나 이런 식으로 양보해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니 말일세."

    "응."

    "그리고 이 보답은, 나중에 꼭 받을 터이니 말일세."

    "물론."

    "후우. 알겠네. 이번에는 양보해주겠네. 다른 이들에게도 이 몸이 말해주도록 하지."

    내 가슴에서 이마를 떼고, 디아나는 날 올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해줬다.

    "크흑. 디아나 누나아아…."

    "그렇게 징그럽게 달라붙지 말게."

    내 감동한 표정으로 그런 디아나를 끌어안자, 디아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야. 보통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 때는 안기는 것도 피하지 않냐?

    혹시 신체 능력이 안 돼서 피하려다 실패한 거니?

    "구원? 여기 있어? 던전에 간다면서 뭐해?"

    그리고 마침 대화가 끝났을 때, 문밖에서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잠깐 준비를! 그럼 디아나. 고마워."

    "음. 으응…쪽."

    나는 디아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사라와 함께 던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갑자기 디아나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응? 아니. 일단 디아나가 제일 연장자니까. 나 혼자 내려가 있는 동안 다들 잘 보살펴달라고."

    가는 도중에 사라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쯤은 간단히 얼버무릴 수 있었다.

    "뭐야 그게. 다들 애도 아니잖아."

    "하긴. 제일 애인 너도 착실하니까."

    "하는 행동은 구원이 제일 애거든?"

    "훗. 부정은 못 하겠군."

    "그런 건 부정해야지, 이 바보야."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에 안겨 왔다.

    그렇게 사라와 실없는 얘기를 나누며 던전에 가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디아나와 협상을 해놓고 정작 바넷사한테 내일 네 차례라는 말을 안 전했네.

    …뭐, 디아나가 말한다고 했고, 괜찮겠지?

    그런 것보다, 지금은 눈앞에 곧 닥쳐올 일부터 대비하자.

    "어, 어머? 벌써 다시 던전에 가시는 건가요?"

    "앗, 네. 아니. 응. 네?"

    길드에 도착해 언제나처럼 접수를 하자, 역시나 레이첼 누님은 상당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 역시도 누님의 모습을 보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누님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아니. 지금 완벽한 안내원의 모습으로 계시는 저 누님의 입술이,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물건을 물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말이야.

    이렇게, 남심을 간질이는 뭔가가 느껴진다고 할까.

    "후훗. 구원씨는 반말로 하셔도 상관없어요. 전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까."

    다행히도 그런 내 반응이 누님을 조금 진정시킨 건지, 누님은 쿡쿡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주셨다.

    "응. 아무튼 한동안 4계층 마을에 머물면서 직업 레벨을 올릴 생각이니까. 이번에는 레이첼이 걱정할 일 전혀 없어."

    "그런가요…. 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다녀올게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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