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767화 (751/1,205)
  • <-- 펠리시아의 본심? -->

    "…오늘 가도 괜찮은 겁니까?"

    "응? 왜?"

    그리고 잠깐의 침묵 끝에, 바넷사는 살짝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해왔다.

    뭔가 생각했던 것하고 조금 다른 반응이네.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이자, 바넷사는 바로 자신이 했던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아니. 뭔데? 갑자기 그러면 궁금하잖아. 응? 뭔데? 왜 그래?"

    물론, 그런다고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대답이 없는 바넷사에게 끈질기게 되물은 결과, 나는 겨우 바넷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레이첼님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또, 꽤나 의외의 이유였다.

    내가 여자를 더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사라만큼이나 질투심이 강한 모습을 보이고 남들보다 그런 감정을 더 질질 끌던 바넷사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아니. 역시 내 여자라는 걸까.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진짜 여자복은 넘치는 것 같아.

    물론 내 뛰어난 여자 보는 눈도 단단히 한몫하는 거지만.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겁니다."

    아마 내가 상당히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겠지.

    바넷사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래서, 괜찮은 겁니까?"

    부끄럽다고 말 돌리기는.

    "괜찮아. 어차피 저택에서 빈둥거리고 있어도 레이첼 누님이랑은 저녁때까지 얼굴도 못 볼걸. 피곤한 건지 혼자서 쉬겠대. 성에 가도 저녁때까지는 돌아올 거고. 그러니까 남는 시간에 할 일부터 처리해버리고 오는 게 효율적이잖아?"

    "그건…후우. 밀린 일을 처리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내 말을 들은 바넷사는 또다시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고 그런 말만을 했다.

    뭔가 걸리는 태도인데 말이야.

    "실제로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너로서도 내가 감정적이 되는 것보다는 그러는 게 좋잖아?"

    뭐, 섹스는 사랑을 담아서 하는 게 제일 좋다고 펠리시아한테 설파하고 다녔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펠리시아가 보면, 황당해하려나?

    아니. 실제로 사랑을 담아서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건 맞아.

    다만 어차피 펠리시아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선을 그어두는 의미에서 섹스를 안 할 때는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바넷사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일 없이, 또 한 번 잠깐의 침묵 끝에 그렇게 말했다.

    얘는 불리할 때마다 이렇게 말을 돌리더라.

    "정 바쁘면 메이드를 시켜도 되는데."

    아까 할 일이 있다면서 바로 사라져버리기도 했었고.

    "이유가 어찌 됐든 공주님을 만나러 성에 가는 건데 조촐한 마차로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님은 물론 디아나님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내 배려에 바넷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여기가 신분제 사회라는 사실이 실감이 된단 말이지.

    나는 상당히 제멋대로 지내고 있다 보니 가끔 잊게 되지만 말이야.

    애초에 이 세계가 신분제 사회치고는 상당히 사고가 유연하기도 하고.

    아니. 내가 만난 애들만 특이한 건가? 뭐,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중요한 건, 바넷사도 딱히 내가 타는 마차를 메이드가 끌게 하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럴 때는 조금 귀엽게 질투해주는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은데 말이야.

    "제일 좋은 마차를 다른 메이드들한테 몰게 하면 되잖아?"

    "그 마차는 저만 몹니다."

    아,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바넷사는 그 마차를 모는 일에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는 지고의 대마법사 디아나의 행차를 상징하는 마차일 테니까.

    요즘은 내가 타고 다니는 일이 더 많아서 빛이 살짝 바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니면 다른 메이드가 모는 게 좋은 겁니까?"

    그리고 바넷사는 내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뒤에 그런 말을 덧붙였다.

    크으. 역시 이거지. 이래야 바넷사지.

    이게 귀엽게 질투하는 모습은 아니지 않냐고?

    내 눈에는 귀여워 보이니까 문제없어.

    "아니. 전혀."

    "…그럼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자신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만면의 미소를 짓는 내가 이상했던 건지, 바넷사는 살짝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자리를 떠났다.

    자, 그럼. 그사이에 나는 실비아나 데리러 가볼까.

    "실비아."

    비록 바넷사에게 위치를 물어본 건 아니지만, 나 혼자서도 실비아를 찾는 건 간단했다.

    레이첼 누님과의 대화를 끝내고 우리 애들도 전부 해산했을 테니까, 저택에서 실비아가 있을 만한 곳이라면 두 군데 정도밖에 없지. 자기 방 아니면 밖에 있는 연무장.

    그리고 이번에 실비아가 있던 곳은 바로 연무장이었다.

    "햐읏!?"

    검을 휘두르는 대신 구석에 앉아서 뭔가 먹고 있었지만.

    내가 오자, 실비아는 황급히 먹던 걸 황급히 뒤로 던져버리고는 검을 집어 들어서 휘두르던 척을 했다.

    "아니. 계속 먹어도 상관없는데."

    대체 왜 숨기는 거지? 설마 이런 데에서까지 뭘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던 건가?

    걱정하지 마. 실비아. 이미 매일 식사때마다 우리끼리 얘기하는 동안 구석에서 음식만 음미하는 모습만 봐도, 네가 먹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아니까.

    매번 음식을 음미하는 데에 집중하다가 말 걸리면 당황하는 주제에 뭘 이제 와서.

    오히려 네가 음식마저 잘 안 먹었으면 걱정했을 정도라고.

    우리 파티에서 제일 몸 쓰는 직업인 주제에, 몸은 제일 가냘프니까.

    아, 가슴 얘기하는 거 아니다?

    "아, 아읏…."

    급하게 숨기느라 채 닦지 못하고 실비아의 입가에 묻어있는 크림을 엄지로 살짝 닦아주자, 실비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한차례 바르르 떨었다.

    "먹는 걸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실비아가 뒤로 던져버렸던 빵을 집어 들며 일단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실비아도 당황해서 그런 거지 음식을 함부로 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제, 제셩합니다아…."

    지금도 못 먹게 된 빵을 보면서 이렇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이거라도 줄까?"

    "…아, 아닙니다."

    던전에서의 식사용으로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던 빵을 건네자, 실비아는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아. 어차피 훈련은 체력소모가 심하니까. 많이 먹어둬야지."

    뭐, 레이첼 누님이 대화가 끝났다면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만큼, 아마 아직 검은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았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나란 놈은 참 멋진 놈이란 말이야.

    "그, 그럼…. 아음. 맛있어…."

    결국 실비아는 내가 건넨 빵을 받아들이고, 힐끔힐끔 눈치를 보더니 결국 빵을 베어 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실비아가 빵을 먹는 사이에 나는 뒤에서 실비아의 몸을 끌어안고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우. 치유된다. 집중력이 굉장한 실비아이기 때문에, 빵을 음미하는 것에 집중하는 동안은 평소처럼 격한 진동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대신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애완동물한테 먹이를 주고 먹는 동안 쓰다듬으면 분명 이런 기분이겠지.

    종종 끌어안고 먹을 때도 처음에만 격하게 진동을 하고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진동이 멎는 실비아였기 때문에, 나는 이런 식의 실비아 테라피에도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저, 저기…구, 구원님?"

    그리고 내가 건넸던 빵을 다 먹자마자, 실비아는 다시 몸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이, 이곳에는 어쩐 일로…."

    "아, 맞다. 그래. 지금부터 성에 갈 건데, 실비아도 같이 갈 거지?"

    휴우. 하마터면 까먹고 이대로 저녁때까지 있을뻔했네.

    무서운 실비아 테라피 같으니라고.

    "네헷? 오, 오늘 말입니까?"

    "응? 왜? 레이첼 누님 때문에?"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실비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에 바넷사와 똑같은 일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나도 실비아가 왜 그러는지 바로 눈치를 챘다.

    "네에…."

    "피곤하신지 저녁까지 쉬시겠대. 어차피 저녁까진 얼굴을 못 보니까 그 사이에 펠리시아 성욕이나 풀어주고 오려고."

    "그, 그렀습니까아…."

    하지만 내 설명을 듣고도, 실비아는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바넷사도 그랬었지. 게다가 실비아는 바넷사와 달리 성에 가는 걸 좋아할 텐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왜 그래?"

    "헷?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뭔데? 말해."

    실비아는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나는 곧장 실비아의 뺨에 내 뺨을 비벼대면서 추궁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지.

    결코 바넷사보다 실비아를 추궁하는 게 쉬워서 태도가 달라진 게 아니다.

    "햐우아아으으우우…."

    그리고 내 뺨이 자신의 뺨에 비벼질 때마다, 실비아는 눈에 띄게 녹아내려 가기 시작했다.

    "바, 봐주십…흐양…어머니이…. 실비아는 먼저 갑니이…."

    아니. 그러니까 고작 이런 걸로 죽음을 불사하지 말라고.

    누가 보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정보를 토하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기사님인 줄 알겠네.

    이대로 있어도 실비아가 정보를 토해내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조금 굴려보기로 했다.

    물론, 뺨은 그래도 실비아의 뺨에 비벼대면서.

    이거 말랑말랑해서 기분 좋단 말이지. 중독되는 감각이야.

    "아, 혹시 너희끼리 얘기하면서, 오늘 저녁까지는 나랑 레이첼 누님이랑 단둘이 있게 해주기로 결정했다든가?"

    이러면 대부분 말이 맞아 떨어진다.

    내가 성에 간다니까 바넷사와 실비아가 미묘한 반응을 보인 것도, 레이첼 누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 우리 애들이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고 그대로 해산한 것도.

    물론 그렇다고 한다면 제일 중요한 점이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되어버리지만.

    "네, 네헷! 마씁니다!"

    하지만 실비아는 내 말을 곧장 긍정해버렸다.

    …미묘한데. 진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거로 치고 넘어가려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떨고 있어서 표정을 못 읽겠잖아.

    "진짜로?"

    "넵!"

    미심쩍어서 되묻는 말에도 곧장 긍정하는 실비아.

    으음. 이러면 진짜로 엄청난 의문점이 생겨버리는데.

    그게 사실이면 대체 레이첼 누님은 모처럼 나랑 단둘이 지낼 기회를 왜 날려버리신 거지?

    분명 누님도 나와 단둘이 있고 싶으셨을 텐데.

    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럴 거라고.

    어제오늘 나눴던 대화만 생각해봐도 누님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잖아?

    애초에 피곤하다는 것부터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

    그야 그동안 나와의 문제를 고민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셨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피곤할까?

    섹스하면서 기절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힐링 섹스로 체력은 오히려 회복됐을 거다.

    잠도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자셨고.

    어제오늘 사이에 우리 관계가 급진전한 것도, 좋으면 좋았지 정신적으로 피곤할 일은 아니다.

    만약 누님이 피곤할 일이 있다면, 오늘 아침에 내가 꺼낸 던전 얘기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었다.

    누님은 이제 관계가 진전되어 버렸으니 좋든 싫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 수밖에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의문점은 남는다.

    혼자 방에서 생각을 정리할 거라면, 여자들끼리 대화하면서 저녁까지 나와 단둘이 있게 해주겠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거절해도 됐을 텐데?

    자신이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애들한테 들키기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뭔가 석연치 않단 말이지.

    애초에 아까 봤던 누님의 표정은 그다지 복잡해 보이지 않았고.

    당장 누님의 방으로 돌아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정말로 누님이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것이었다면 아침에 했던 것 이상의 말을 해줄 수 없는 나로서는 방해만 될 뿐이다.

    "흐냐아아아…."

    "우왓! 실비아!"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실비아의 녹아내린 목소리로 인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차! 너무 오래 뺨을 비벼댔나! 실비아가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져 버렸어!

    아무튼 레이첼 누님에게는 무슨 일인지 이따가 저녁때라도 물어보기로 하자.

    지금은 실비아를 데리고 얼른 성이나 다녀와야지.

    나는 녹아내려 버린 실비아를 안아 들고, 황급히 바넷사가 기다리고 있을 정문 쪽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 드렸던 연참은 쓰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14C2A58H2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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