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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66화 (75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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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다들 뭔가를 하고 있는데 혼자서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빈둥거릴 수는 없다.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바넷사는 내가 짐정리를 돕는 걸 허락해줬다.

    속옷과 같은 물건은 전부 자신이 맡고, 난 바넷사가 지시한 물건을 지시한 장소에 정리하는 일만 하게 됐지만.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는 레이첼 누님의 섹시한 속옷 콜렉션을 더 볼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거짓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정리를 도왔다.

    그리고 그렇게 짐을 정리하는 도중. 뭔가를 발견했다.

    이건…수건?

    그래. 평범한 수건이었다.

    그럼 이 수건을 왜 주목했냐고?

    간단하다. 수건 자체는 평범해보이는데 나머지 요소들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머지 수건들은 저쪽에 따로 정리를 끝내둔 상태였다.

    왜 이 수건만 따로 이렇게 보관되어있는 건데?

    …그것도 유리관에 보관되어서.

    신경 쓰인다.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나는 오랜만에,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 쓰지 않는 능력을 써보기로 했다.

    바로 아이템 확인창 띄우기 말이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이 수건의 이름은….

    ‘성자의 정기가 담긴 수건’ 이라는, 누가 봐도 레전드급 아이템으로 보이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래서 고작 수건을 이렇게 유리관에 특별보관을…아니. 내꺼잖아!

    뭐야. 이거? 왜 이걸 레이첼 누님이? 아니. 그보다 뭐야 이 이름?!

    설마 내 물건에는 전부 이런 거창한 이름이 달려있는 거 아니겠지?

    나는 당장 걸치고 있는 옷들의 이름을 확인해봤다.

    응. 평범하다. 그냥 천 옷이다.

    그렇다는 건 내 물건이라고 전부 이런 거창한 이름이 붙는다는 건 아닌데….

    설마 이 수건은 내께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있었던 성자의 물건이라든가?

    아니. 그럴 리는 없나. 애초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것 치고는 수건의 상태가 너무 깨끗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 수건에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엄청나게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분명 내 수건을 레이첼 누님이 가져간 일이 있었지.

    그리고 수건을 돌려 받았을 때, 받은 수건이 색깔만 같은 다른 수건이었다는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그냥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설마 내 수건을 이렇게 보관하고 계셨을 줄이야.

    이런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것도, 누님이 정성스레 잘 보관하며 특별 대우를 했기 때문인 건가?

    아니. 잠깐만. 그렇다는 말은, 이 수건을 간직한 시점에서 누님은 내게 어느정도 감정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그런데 그 후 한참이나 지나서 내가 조난 당한 후에야 정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고,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밀당을 한 거니까…누님은 대체 얼마나 참고 있었다는 얘기야.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인내심에, 나는 살짝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응? 바닥에 뭔가….

    그리고 얌전히 유리관을 내려놓으려고 했을 때, 유일하게 유리로 되어있지 않은 바닥부분에 뭔가가 만져졌다.

    살짝 위로 들어서 바닥 부분을 보니, 거기에는 ‘처음으로 받은 물건♡’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크흑. 누니임…너무, 너무 풋풋하시잖아요!

    "…뭐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날 의아하게 여기는 바넷사의 질문을 황급히 얼버무리며, 나는 수건을 얌전히 한쪽 선반 위에 올려놨다.

    어쩌지. 지금 당장이라도 레이첼 누님한테 달려가서 끌어안아주고 싶어졌어.

    하지만 지금은 우리 애들이랑 다같이 있을 테고, 이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했다가는 나중에 조리돌림당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누님을 끌어안아 주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뭔가 딴 생각을 해서 이 고양된 감정을 가라앉히자.

    딴 생각. 딴 생각. 딴 생각이라….

    그러고 보니, 아직 시간은 낮. 그리고 바넷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네.

    게다가 전에 한 말까지 있으니까…잠깐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조건이 완벽하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라도 그렇지, 그건 아니지.

    벅차오르는 레이첼 누님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레이첼 누님의 방에서 다른 여자랑 그런 짓을 하다니.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바넷사."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던 엄한 상상을 지워버리고, 나는 대신 바넷사와 평범하게 대화나 나누기로 했다.

    "뭡니까."

    "시간은 제대로 만들어놨어?"

    아니. 말해두지만, 진짜로 엄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고.

    그냥 방금 전에 막 그런 생각을 하고난 직후니까, 바넷사와 할 얘기의 주제가 이런 얘기밖에 떠오르지 않았을뿐이야.

    "……."

    내 질문에, 바넷사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아주 잠깐 멈췄다. 곧바로 다시 움직이기는 했지만.

    이왕이면 대답까지 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기억 안 나? 전에 내가 말했던…."

    "…큭. 기억합니다."

    기억하지만 일부러 대답 안 한거니까 좀 닥치고 있어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바넷사는 고개를 돌려 살짝 날 노려봤다.

    "그래서 대답은?"

    "…아무리 구원님이라도 설마 이런 곳에서 하자는 건 아니겠지요?"

    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아무리 나라도라니. 내가 뭐?! 내가 뭐 만년 발정기라서 때와 장소를 안가리고 여자를 덮치기라도 하냐?!

    ……내, 내가 그정도는 아니잖아?

    "물론 아니지."

    나는 잠깐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실히 아니라고 말해줘도, 바넷사는 말을 이어가주지 않았다.

    혹시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다든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꿈이 큰가.

    "하지만 그런가.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장소가 문제라고."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보통은 이런 곳에서 하자는 걸 신경 쓰기에 앞서서, 이런 때에 하자는 걸 신경 쓰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그런가. 그런가. 시간은 문제가 없는 건가."

    "…그랬죠."

    "으, 응?"

    바넷사를 놀리기 위해 일부러 말도 안 되는 말꼬리를 잡고 장난을 쳐본 나였지만, 바넷사는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덤덤하게 받아쳤다.

    그 너무나도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장난쳤던 내가 당황하게 됐을 정도로.

    "시간은 문제 없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다만?"

    "비워놨던 시간을 예상치 못했던 레이첼님의 짐정리에 할애하게 됐으니 결국 시간이 없게 됐군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갑자기 레이첼을 이사시킨 게 잘못이라는 눈빛으로 날 한 번 쳐다본 후, 바넷사는 다시 짐 정리에 몰두했다.

    저 녀석…설마 이런 식으로 반격을 하다니.

    하지만 넌 날 얕봤어.

    "훗. 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내가 모를줄 알고? 설마 네가 고작 이정도 일로 시간이…."

    그래. 슈퍼 집사인 네가 고작 이 정도로 시간을 다시 못 만들 리가 없잖아?

    "없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바넷사는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짓밟아버리듯 딱잘라 그렇게 말했다.

    "…진짜로?"

    "진짜로입니다. 구원님에게는 아쉽게 됐군요."

    젠장. 완전히 이겼다는 얼굴 하기는.

    아니. 무표정이지만. 나 혼자 미묘한 표정을 읽어내고 열받는 것뿐이지만.

    "그래서 넌 아쉽지 않고?"

    이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바넷사를 추궁했다.

    "당연합니다."

    "정말로?"

    "…그럼 제가 정말로 울며 빌 때까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미묘하게 뺨을 붉히고 중얼거리는 바넷사에게 바짝 다가가, 나는 그 양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그 눈이 똑바로 날 바라보게 만들며 말했다.

    "넌 정말로, 나와 둘만의 시간이 없어져서 아쉽지 않다고?"

    "……읏."

    내 무지막지하게 진지한 표정에, 바넷사는 드디어 대답을 주저했다.

    훗. 이겼다.

    "그래서 어떤데? 네 진심을 말해줘."

    "…지금은 집사입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다르게, 바넷사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니. 이런 때까지 그 대답은 너무하지 않냐?!"

    너 아까 디아나한테는 그렇게 말대답 못하고 꼼짝없이 끌려갔잖아!

    "……."

    그리고 내 격한 반응에, 바넷사도 내가 진심으로 분위기를 잡은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집사님. 눈빛이 너무 차가우신데요.

    닿으면 얼겠다야. 앗 차가.

    "바넷사…."

    "……."

    나는 다시 얼굴 표정을 다잡고 바넷사의 얼굴에 얼굴을 가져갔지만, 바넷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으로 내 이마를 막아서 멈춰세웠다.

    그 상태에서 살짝 힘을 줘서 이마를 들이밀어 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바넷사는 지금 키스를 할 생각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넌 가끔 너무 딱딱해서 탈이라니까. 가끔은 이렇게 농담으로 표정을 풀고…."

    이번에는 어꺠를 잡고 있던 두 손을 살짝 올려 바넷사의 무표정한 뺨을 만지작만지막 거리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바넷사는 이번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뺨은 이렇게나 말랑말랑하면서 표정은 딱딱하기는.

    "도와주지 않고 방해만 할 거면 딴데 가서 노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결국 그 이후로도 내 본능을 주체 못하고 장난기 섞인 대화를 계속해서 나누기는 했지만, 바넷사도 날 진심으로 방에서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떠들면서도 짐정리는 착실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많던 짐을 2시가 채 되기도 전에 다 정리할 수 있었다.

    바넷사는 정리하면서도 쉴새 없이 떠드는 날 보고 살짝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바넷사도 내심 내가 이러는 게 싫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그럼 바넷사. 진짜로 이제부터는 진짜로 시간이 남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어? 야! 잠깐!"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넷사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실 바넷사도 내심 내가 수다 떠는 게 싫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도.

    아니. 애초에 뭐가 그렇게 급한 건데?

    "앗, 벌써 정리가 끝난 거니? 고마워. 원래는 내가 해야하는 일인데. 미안해."

    그리고 내가 문 앞에서 황당해하는 사이에, 타이밍 좋게도 레이첼 누님이 돌아오셨다.

    아무래도 드디어 얘기가 끝난 모양이다.

    "얘기는 다 끝났어?"

    "으, 응. 그래서 말인데."

    내 질문에, 누님은 어째서인지 조금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누나가 조금 피곤해져서 그런데, 잠깐 혼자 쉴 수 있을까? 미안해? 정리해준 보답은 나중에 제대로 할 테니까."

    "아니. 보답할 필요는…아무튼 그러면 난 갈게."

    "응. 이따가 봐."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피곤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거지. 그것도 어제 저녁부터 기절한 것처럼 자고 일어났던 누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누님은 그런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날 방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내가 방문을 닫는 그 찰나의 순간.

    아직 방문이 완전히 닿히지 않은 순간에, 레이첼 누님의 비명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꺄아아아악! 어째서 이게 선반에?!"

    …누님. 설마 황급히 절 내쫓은 이유가 그 수건 때문에 그런거였어요?

    괜찮아요. 풋풋하고 좋았어요.

    아니. 경험 풍부한 누님 행세를 하려는 레이첼 누님 입장에서는, 풋풋해서 좋았다고 하면 반대로 싫어하려나.

    아무튼 분명 어제부터 방금 전까지 꽤나 바빴던 몸이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돌아온 누님과 좀 더 대화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래. 맞아. 사도 임명을 시험해볼 생각이었어. 왜? 안 되냐?

    하지만 저래선 적어도 저녁까지는 레이첼 누님과 얼굴도 보지 못할 것 같고.

    지금부터 대체 뭘 하면 좋지?

    역시 할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으려나.

    원래 오늘은 레이첼 누님과의 일 때문에 안 하고 미루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이.

    "바넷사! 바넷사아!"

    "…뭡니까."

    내가 공중에 소리를 치자, 방금 도망갔던 바넷사가 금방 또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가 말한대로 정말로 할 일이 있기는 했던 건지,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이었지만.

    "성에 가고 싶은데."

    "……."

    야. 그렇게 할 말 엄청 많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라.

    나도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데, 이건 진짜 의무감으로 가는 거라니까?

    그리고 난 이제 또 곧 던전에 틀어박혀서 특훈할 거란 말이야.

    이런 건 미리 처리 안 해놓으면 곤란하다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물고기인간 // 원래 다굴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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