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첼의 이사 -->
레이첼 누님의 이사는 모든 일이 단 하루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선 누님이 기숙사를 나가는 문제는, 별다른 수속도 없이 곧바로 방을 뺄 수 있었을 정도였다. 과연 길드장의 딸이라고 할까?
아니. 길드장의 딸하고는 관계 없나.
생각해보면 방을 구하는 수속이라면 모를까, 방을 빼는 수속이 어려울 리가 없지.
또한 우리 저택에 레이첼의 방을 마련하는 것 역시도 아무 문제 없었다.
아직도 저택에 빈방은 많았고, 애초에 레이첼 누님과의 관계는 한참 전부터 이해해줬던 우리 애들이 이제와서 레이첼 누님이 저택에 들어오는 걸 반대할 리도 없었다.
뭐, 살짝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저택이 더 떠들썩해지겠네."
꽤나 뿌듯한 감정을 담아서 이렇게 말한 내게 디아나가 한 대답이란 것이.
"음. 그렇구먼. 하지만 자네."
"응?"
"이 이상 저택의 빈방을 채우려는 노력은 안 해도 되니까 말일세."
이런 말이었으니까.
…핀잔이라고 할까, 솔직히 말해서 웃으며 말하는 디아나가 조금 무서웠다.
덤으로 그 뒤에서 무지막지하게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는 바넷사도 무서웠다.
아무튼 그렇게 방을 빼고 구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니,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레이첼 누님의 짐을 이리로 옮기는 일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난 지금 레이첼 누님의 방이 될 곳에 짐을 놓는 중이었다.
무한의 인벤토리를 가지면 이런 게 안 좋다니까.
언제나 편리한 짐꾼 역할을 도맡아해야 한다니.
아니. 물론 레이첼 누님의 이사를 돕는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기쁘다. 이제부터 같이 살게 되는 건데 당연하지.
그리고 인벤토리가 있는 내가 적임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 뭐가 불만이냐고? 뻔하잖아.
여기에 지금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
그래. 지금 나는 레이첼 누님이 방이 될 곳에서 홀로 인벤토리에 넣어온 짐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정작 이사를 하는 장본인께서는 지금 우리 애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고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끼리서만 할 얘기가 있다는 모양이다.
모르던 사이가 아니지만, 그야 같이 살게 된 이상 대화는 필요하겠지.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여자들만의 대화에 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단 시도는 해봤는데 말이야.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은근슬쩍 같이 그 끼어들려고 해봤는데 어떻게 알고 쫓아내더라고.
젠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자서 짐정리라니.
적어도 누구 하나 붙여주면 좋았잖아.
원래는 바넷사가 집사로서 도와줄 예정이었다.
내가 여자들이 모여있는 방에서 쫓겨날 때 바넷사도 내 뒤를 쫓아오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쫓아냈던 우리 애들이, 바넷사는 정반대의 이유로 붙잡아뒀다.
"자네도 구원의 여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대화에 참여하게." 라는 디아나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아니. 딱 한 마디 하기는 했다. 뺨을 붉히면서 "으읏…!" 이라고.
아니. 바넷사야. 으읏이 아니잖아. 으읏이. 그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너 평소에는 "지금은 구원님의 여자가 아니라 집사입니다." 같은 말 잘 하잖아. 왜 디아나한테는 꼼짝도 못하는 건데.
그럴 때야말로 집사로서의 자신을 관철할 때가 아니었냐?
…뭐, 메이드들한테 자기가 없는 동안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은 집사 그자체였지만.
그 녀석…아직도 내가 메이드들한테 손을 댈거라고 경계하고 있는 거냐.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나는 지금 홀로 쓸쓸하게 짐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딴 생각을 하면서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조차도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짐을 내려놓기만 하는 거지, 정리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풀어놓은 짐을 정리하고 배치하는 건 레이첼 누님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 남아 짐을 전부 꺼내놓고나자 나는 급격히 할 일이 없어졌다.
아직 레이첼 누님이 돌아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우리 애들끼리 하는 얘기도 아직 끝난 게 아닐테고.
사실 나도 이렇게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실은 꽤나 급한 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할 일이라는 녀석을 했다가는, 분명 좋은 꼴을 못보겠지. 여러 가지 의미로.
그도 그럴 게, 그 할 일이라는 게 바로 펠리시아와의 섹스였으니까.
그 녀석, 괜찮으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던전을 두 번 다녀오는 바람에, 또 평소보다 던전에서 있었던 시간이 길어져버렸는데.
이 말, 펠리시아랑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기로 하고 나서 매번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아무튼 레이첼 누님이 드디어 나와 제대로된 관계가 되어서 이사까지 한 기념비적인 날에, 다른 여자랑 섹스를 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내 여자도 아닌 여자랑 하는 섹스를.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내가 할 일이라고는…역시 이 바닥에 늘어놓은 짐들을 정리하는 거밖에 없겠지?
물론 레이첼 누님이 자기 편한 위치에 정리하는 게 제일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방의 정리를 맡고 있는 바넷사나 메이드들을 시키는 게 좋겠지만.
뭐, 할 일도 없고. 나중에 위치를 옮겨야하면 스스로 하시겠지. 우선은 대충 정리라도 해놓자.
그런 내 결심은, 짐 정리를 시작하고 5분도 유지되지 못했다.
아니. 이건 내가 나쁜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우와. 뭐야 이거. 엄청 야한데. 레이첼 누님, 이런 속옷까지 가지고 계신 겁니까! 크흑. 누님. 전 누님이 절대 영역으로 유혹하실 때부터 알아뫼시고 있었습니다. 좋아. 이건 다음번에 하게 될 때 제일 먼저 입어달라고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이건 또…이것도 뒤로 미루기 아까운데. 젠장. 난 대체 뭐부터 입어달라고 해야…. 좋아. 이렇게 된 이상 할 일은 단 하나. 제일 섹시한 속옷만이 살아남는 토너먼트 경쟁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잠깐 기다려. 지금 중요한 문제를 고민중이니까."
그도 그럴 것이, 누님의 속옷이 이렇게 야한 것들 투성이였으니까.
뭔가 야하면 야할수록 한 번도 안 입어본 티가 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안내원복을 입는 모습에서부터 눈치 챈 거였지만, 역시 누님은 어떻게 하면 남심을 자극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마 누님이 그런 성격이 아니라 연애할 때도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만 있었다면, 굳이 연애 경험같은 게 없더라도 본능적으로 남자를 녹여버릴 수 있을 텐데.
아니. 뭐, 난 녹아 내려버렸지만. 헤헷.
아무튼 지금은 속옷이다. 나중에 이 속옷들 중 뭐부터 입어달라고 할까.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쟁을 붙여서 최후의 두 개까지 선택의 폭을 좁혔지만, 마지막 결정이 쉽지 않았다.
여러 후보중에서도 쟁쟁한 경쟁을 거쳐 살아남은 둘이니만큼, 과연 둘 다 굉장하다고나 할까.
"중요한 문제입니까."
"당연하잖아. 그래. 네가 보기에는…뭐가 더…."
역시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는 게 좋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겨우 속옷에서 눈을 떼서 고개를 돌렸고, 그러면서 동시에 눈치챘다.
잠깐만. 지금 방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고?
"저 가운데 부분이 벌려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 철혈 집사님이 계셨다.
그것도 내 질문에 착실히 대답까지 해주시면서.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대답하는 바넷사는 있는 힘껏 경멸하는 눈초리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가 나쁘다는 거야! 내가 매일 너희와 신선한 섹스를 즐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데!"
나는 일단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
"장기적인 부부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성생활이라고! 이는 통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지속적으로 성생활을 유지하는 부부가 금슬도 좋은 법이라고! 바넷사도 내 아내가 될 몸으로서 협력…!"
"큿! 됐으니까 그만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경명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던 바넷사가 순식간에 얼굴을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손을 뻗어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훗. 이겼다.
어떠냐? 하루동안 레이아와 레이첼에게 더더욱 연마된,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이 능력이!
내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느낀 건 고작 그정도 수준이 아니었다고!
물론, 입을 틀어막혔다고해서 그만 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애초에 넌 앞으로 내 아내가 될 몸이라는 자각이…."
"그 이상 말하면 저도 구원님이 레이첼님의 속옷들을 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두에게 말하겠습니다."
"무, 뭐? 고작 야한 속옷 두 개 좀 비교했다고…."
"……."
내 대꾸에, 바넷사는 아무 말하지 않고 눈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거기에는, 토너먼트 표가 그려진 커다란 종이 위에 엄선 된 속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내, 내가 언제 이런 것까지!
"…내가 부끄러운 말을 멈추면 너도 말 안 할 거지?"
"……."
"자기야."
"큿!"
"자기도 지금부터 날 자기라고…."
"말 안 하겠습니다!"
훗. 이겼다. 그리고 바넷사가 자기라고 안 불러서 다행이다.
아니. 닭살 커플들이 서로를 부르는 말 하면 자기라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올라서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뱉고 보니까 펠리시아 녀석 생각이 나서 말이야.
지금까지 날 그런 식으로 부르는 애는 펠리시아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바넷사가 진짜로 날 자기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면, 한동안 불려질 때마다 펠리시아 생각이 나서 엄청나게 미묘한 기분이었을 거야.
"그래서, 넌 여기에 어쩐 일이야? 여자들끼리 얘기 중 아니었어?"
레이첼 누님과 같이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얘기가 끝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중요한 얘기는 끝났으므로 전 일을 하기 위해 먼저 나왔습니다."
…으, 응? 잠깐만. 중요한 얘기 안중요한 얘기 구분지어야할 정도로 뭔가 굉장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난 기껏해야 아침은 몇시고 저녁은 몇시고 그런 얘기나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 그런 얘기만 할 거면 날 내쫓은 이유도 없기는 하지만.
"…그, 그러냐. 그럼 같이 정리나 할까?"
대체 어떤 얘기를 한 건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괜히 여자들끼리 하는 얘기에 남자가 신경 써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은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건 묻지 않고 쿨한 척 넘어가는 게 좋은 남자라는 거니까.
"아뇨. 짐 정리는 제가 합니다. 구원님은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넷사는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속옷에 다시 한번 시선을 주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아니. 야. 그야 물론 이런 현장을 목격했으니 못미더운 건 알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가구 같은 것도 몇 개 가져왔고, 힘 쓰는 일은…."
그렇게 말하는 내게 보란듯이, 바넷사는 눈앞에서 가구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것도 한 손으로.
그러고 보니 여기는 그런 세계였죠.
게다가 이 녀석은 특히….
이름 : 바넷사 디아누스
종족 : 용인족 267
직업 : 집사 218 / 권사 76 / 마도사 167
레벨 : 218
생명 : 45900/45900
정기 : 42500/42500
근력 : 437
내구 : 358
민첩 : 374
체력 : 500
지력 : 406
정신 : 415
매력 : 408
보너스 스탯 : 11
상태 : 보통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고.
그건 그렇고 얘 말이야. 스탯이 너무 터무니없지 않아?
아니. 왜 집에만 처박혀있는 애가 스탯이 이렇게 높은 건데? 이것도 용인족의 힘인가 뭔가하는 그건가?
디아나 말을 들어보면 이 세계도 용이란 녀석들은 원래 세계 최강의 생물이었다는 모양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높잖아. 체력은 한계치까지 찍혀있고.
스탯 총합이 거의 나하고도 비슷한 수준이라니.
그리고 심지어 레벨과 직업 레벨이 같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런 녀석은 나랑 디아나밖에 못봤다고.
난 성자 레벨이 레벨과 같이 오르니까, 디아나는 전생 효과로 그런 거라고 쳐도, 넌 뭔데? 순수하게 일을 많이해서 직업 레벨이 같다는 거 아니야.
대체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 거야.
그렇게 무심코 태클 걸고 싶어지는 게 엄청나게 많은 바넷사의 스탯창이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근력은 살짝이지만 내가 더 높다.
내 직업 레벨 성장에만 집중한 이번 탐험 전에는 어땠냐고?
하핫. 당연히 내가 더 높았지.
그럼 뭐, 내가 근력이 얘 이상으로 오를 때까지 일부러 바넷사의 스탯창을 안 보고 있었을까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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