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첼의 이사 -->
"푸훗. 정말 그런 말로 안심시킬 생각이었던거야?"
계속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말을 듣던 레이첼 누님은, 결국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겨우 이해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일단 나로선 최대한 머리를 짜내서 생각해낸 말인데 말이야.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누님을 웃음짓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해야하나.
"이래 봬도 진지하게 하는 얘기였는데."
"미안. 하지만 너무…구원이가 어제부터 계속 눈치 보면서 누나한테 하려고 했던 얘기가 이 얘기였던 거잖아?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런 소리니까."
내 살짝 불퉁한 반응에, 레이첼 누님은 웃음을 차마 다 참지 못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행동은 말투와 조합되어 누님의 누님력을 더더욱 강화시켰기 때문에, 이렇게 있으니 떼쓰는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래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도 없잖아.
그리고 누님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누님의 눈치를 보면서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어제부터가 아니라 한참 전부터였다. 그것도 며칠 정도가 아니라 몇 주라고 세어야 할 정도로 전.
뭐, 그때는 디아나의 자살 얘기도 듣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한 말로 안심시킬 생각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얘기가 이렇게 늦어진 게 좋은 결과로 작용한 거지만.
아니. 일단 누님이 웃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안심 시켰다고는 볼 수 없으니 그게 그거인가?
오히려 누님에게 이런 얘기를 할때조차 이상한 얘기나 하는 놈이라는 인식이 박혔을 가능성도 있으니 더 안좋은 걸지도.
"아니. 그런 소리라니. 진짜로 레이첼이 생각하는 것보다 효과 엄청 큰 얘기였다니까. 디아나가 그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나 기겁을 하고 절대 죽지 않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레이첼이 그 자리에 있어서 내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그 얘기를 물고 늘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런 말 말고는 내가 던전에서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고 안심시켜야 할지 모르겠잖아.
"물론 구원이 네가 그렇게 결심했다는 걸 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럼 뭐니? 누나도 네가 죽으면 자결할 거라고 말하면, 더 죽지 않게 되는 거니?"
"날 불사신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뭐, 이미 디아나와 수명 공유를 하고 있는 덕분에 누구한테 살해당하지만 않으면 진짜로 불사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이지만.
"후훗. 그럼 네가 죽으면 누나도 자결할거야. 이제 불사신이네?"
내 대꾸에, 마치 발돋움하는 어린애를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레이첼 누님.
분명 내가 레이첼 누님의 트라우마를 달래주고 있는 상황인데, 왜 레이첼 누님이 날 다독여주고 있는 걸까.
젠장. 뭔가 진짜로 레이첼 누님의 트라우마를 안정시킬 말은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디아나의 자살 얘기 말고도 할 수 있는 얘기가 하나 더 있기는 했지.
디아나와 그 대화를 나누기 전에, 원래 레이첼 누님에게 강아지 얘기를 꺼내면서 안심시키기 위해 하려는 말이.
사실 그쪽이 더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얘기도 한 번 꺼내보는 게 좋으려나. 마침 타이밍이 좋기도 하고. 좋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손을 뻗어 누님의 커다란 가슴을 움켜잡았다.
"꺄읏?!"
"그리고, 내가 던전에서 죽지 않을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뭐, 뭐니?"
갑작스런 내 행동에, 레이첼 누님은 깜찍하게 콧소리를 흘리시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레이첼도 어제 그 몸으로 충분히 깨달았을 거 아냐? 성자 스킬을 안 쓰고도 그정도였는데, 만약 내가 성자 스킬을 썼으면 어땠겠어? 일단 성적 흥분을 할 수 있는 생명체인 이상, 그 누구도 내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난 무적이야. 그러니까 난 던전에서 절대 무사할 거야."
"6, 6계층에는 그런 게 통하지 않을 몬스터밖에…."
…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젠장. 이래서 말 안하려고 한 건데.
갑자기 가슴을 주물러서 패닉 상태까지 유도하며 억지 논리를 말해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역 안내원 누님에게 이런 얼토당토않는 논리를 밀어붙이는 건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그거야. 물고기 몬스터도 거의 4계층에서밖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무생물 몬스터도 분명 6계층에만 몰려있는 걸 거야. 분명 거길 지나가면 또 문제 없을 거야. 여신님이 괜히 나한테 이런 능력을 주고 여기로 보냈겠어? 이 능력으로 사명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으니까 그렇게 내려보내신…거 아니겠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생각했다.
젠장.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걸.
내가 오늘 말한 것 중에 죽지않은 근거로는 이 얘기가 제일 타탕한 거 아냐?
뭐니뭐니해도 뒷받침이 되는 근거가 바로 여신님의 판단력이니까.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내가 여신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고 당연히 레이첼 누님도 알고 있을 테니까, 오히려 그 부분을 강조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다.
"…응. 그러네."
그리고 내가 드디어 제대로 된 논리로 내가 앞으로도 쭉 무사할 것을 어필했지만, 누님은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여전히 시선을 자신의 가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내 손이지만.
이런. 그냥 대사의 임팩트를 위해 한 번 주무르고 말 생각이었는데, 너무 기분 좋다보니까 그만.
"아니. 진짜로. 여신님이 보증해주신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응. 제대로 들었어."
나는 누님의 가슴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다시 한번 여신님을 빌어 강조했지만, 여전히 누님의 목소리에는 내가 기대했던 안도감 같은 것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이걸로도 안심이 안 돼?"
"으응. 그렇다기 보다는…조금 아무래도 좋아졌다고할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구원이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도 인정한 것처럼, 내가 제일 두려워한 건 언제 널 잃을지도 모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너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버리는 거였잖아? 하지만 불안한 상황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린 제대로된 연인 사이가 되어버린 거니까. 그러니까 이제, 절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져서."
"아니. 그러면…레이첼은 내가 던전에 갈때마다 불안에 떨게 되는 거잖아?"
"그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는걸. 괜찮아. 나는 이렇게 구원과의 관계가 진전된 것만으로도 기뻐. 그리고 구원이 내 생각보다 날 훨씬 더 잘 보고 있었고, 생각해주고 있었고, 이렇게 안심시켜주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설마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갑자기 던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해서 날 슬퍼하게 만들겠어?"
내 말을 통해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속마음을 완전해 깨달은 누님은, 뭐라 콕 찝어 말하기 애매한 느낌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포자기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해탈…도 조금 다른 것 같고.
분명 이렇게 쉽게 해결될 정도로 누님의 트라우마가 약하지는 않을 텐데.
단순히 알고만 지내던 모험가들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만으로도 자기 혼자 무모하게 현장에 달려들 정도였으니까.
나와의 관계가 진전됨으로서, 그리고 내가 방금까지 보여준 행동으로, 나에 대한 신뢰도가 트라우마를 억누를 정도로 상승했다는 뜻인 걸까?
으음…뭔가 생각했던 것 같은 확실한 트라우마 극복이 아니라 석연치 않은 느낌이야.
아니. 그야 물론 디아나가 자살할 거니까 난 안 죽을 거라는 얘기만 듣고 레이첼 누님이 완전히 안심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정말로 괜찮아. 어린애가 아니니까. 던전에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을 거고, 불안감에 무너지거나 하지도 않을 거야. 난 그저 언제나처럼 길드에서 구원이 돌아올 거라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구원의 던전 탐험에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정보를 모으거나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내 석연찮은 반응에, 누님은 다시 한번 날 안심시키듯 그렇게 말해줬다.
아니. 그러니까 누님. 역할이 반대라니까요. 제가 누님을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는 상황이라니까요.
"아, 정식으로 그게…네 여자가 됐어도, 안내원 일은 계속해도 되는거지?"
내가 그런 태클을 걸 새도 없이, 누님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동자를 올려 날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응? 아, 응. 물론. 그거야 레이첼의 자유지. 우리 파티에 끼고 싶다면 껴도 되고."
"으응. 그것도 생각을 안 해번 건 아니지만, 내가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디아나님도 전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난 계속 길드에 있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원을 도와줄게. 언젠간 이 누나가 크게 도움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잖아?"
"언젠간이라고 할 것 없이 언제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은근슬쩍 누님이 느낄 불안감에 대한 얘기는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다시 대화 방향을 그쪽으로 전환할 분위기조차 아니다.
역시 안내원 누님. 나도 스스로 상당히 입은 잘 터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말하는 걸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연애 문제만 되면 그렇게 어설프고 귀여우신 누님인데 말이야.
"후훗. 고마워. 그럼 난 안내원은 계속 하는 걸로 할게."
"그거야 문제 없지만…."
안 돼겠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얘기를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순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내 예상이 맞다면 누님의 사도 임명 조건은 누님이 느낄 불안감의 해결이다.
그러니 지금 사도 임명을 시도해보면, 정말로 누님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문제가 다소나마 해결이 된 건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해두겠는데, 사도 임명에 구애되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이건 게임이 아니고, 난 레이첼이라는 여캐를 사도 임명을 통해 완전 공략하기 위해 레이첼의 불안감을 해결해주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레이첼이 앞으로 아무런 불안감도 없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거다.
사도 임명 역시도 꼭 사도 임명을 하고싶은 게 아니라, 아니. 그야 물론 꼭 하고 싶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도 임명을 레이첼의 마음 속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쉬는 거지?"
"응? 으, 응. 그런데…왜?"
"그럼 제대로 내 여자가 된 기념으로…."
그렇게 결정한 나는, 뺨을 붉힌 채 살짝 떨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레이첼의 두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그 몸을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어제 못다했던 걸 마저 해볼까?"
"그, 그게 못다했던거니?"
방금 전까지 능숙한 화술로 날 구워삶았던 누님은,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그 화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황하기만 했다.
아니. 이번에는 누님도 분위기를 바꿀 생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서로의 뜻이 통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고 말이야."
"아으읏…."
"하지만 오늘은 아무 할 일도 없으니 시간은 충분해. 그러니까…할까?"
"이, 이런 아침부터?"
"괜찮아. 난 성자니까 밤까지 할 수 있거든. 아, 밤까지 하려면 내 방으로 가는 게 나으려나?"
"으응? 네 방? 그럼 여기는?"
"손님방인데."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누님은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내뱉었다.
"나, 안내원은 계속 하더라도…사는 건 여기에 사는 게 좋을까?"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 이거 또 분위기 바뀌는 패턴이다.
"그야. 레이첼이 그러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하지만 괜찮겠어? 길드에서 멀어지는만큼 출퇴근이 힘들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말을 돌릴 수 없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말을 돌리면 내가 레이첼이 여기 사는 걸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것 아냐.
아니면 고작 섹스를 계속 하고 싶다는 이유로 중요한 문제를 뒷전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런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어.
"응…하지만 평소에는 내가 괜히 일찍 나가고 늦게 퇴근하는 것도 있으니까. 통상 업무만 수행하면…구원하고는 나중에 시간을 맞추면 되고. 그리고 다른 분들과도 더 친해질 필요도 있고. 응. 역시 여기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누나 이사하는 것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네."
그렇게 해서, 나는 결국 누님의 마음 속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이 되기는 했는지 확인조차 해보지 못하고 갑작스레 누님의 이사를 돕는 신세가 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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