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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63화 (747/1,205)
  • <-- 레이첼의 이사 -->

    비록 누군가는 고작 강아지를 잃은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뭐, 사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는 조금 황당하기도 했지만, 누님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도중 생각이 변했다고 할까.

    나는 애완동물 같은 걸 키운 적이 없으니 크게 와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반려동물이라는 말까지 생긴 거겠어?

    게다가 디아나에 의하면 레이첼 누님은 정말로 그 강아지를 아꼈던 모양이니까.

    눈앞에서 강아지가 몬스터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본 경험은 분명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에 버금가는 충격을 레이첼 누님에게 가져다줬을 거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제일 우선적으로 할 일은, 레이첼 누님이 몰래 간직하고 있었을 트라우마를 긍정해주는 것이다.

    "원래는 던전에 다녔다는 레이첼이 안내원이 된 것도, 어쩌면 던전에서 더 이상 모험가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상냥한 마음씨 때문에…아니야?"

    "아……."

    처음에는 잠깐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하려 했던 레이첼 누님이었지만, 내 말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그렁그렁 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기만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아니라면 미안해. 그냥 진짜로 내가 여러 여자 사이에서도 사랑해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면 진짜 미안해. 하지만 그…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서. 레이첼이 계속 내 여자가 되기를 주저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아뇨. 구원씨…구원 네 얘기가 맞아…. 착각이 아니야. 분명 처음에는 사랑받을 수 있을지 확인해보려는 목적도 있었어. 아니. 나조차도 그 이유가 전부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후, 레이첼 누님은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레이첼의 머리를 끌어안아서 그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게 만들고는, 천천히 그 뒷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미안.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지금 말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레이첼 누님의 입에서 직접 들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은 얘기를 꺼낸 거니까. 아직 레이첼 누님은 이런 사정까지 내게 털어놓을 준비가 안 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하고 얘기를 끝내려 한 나였지만, 레이첼은 내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비비듯이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내 허리에 둘러져있었던 그 두 손에 힘을 꽉 쥐어서 내 옷을 움켜쥔 후, 고개를 들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이었지만, 그럼에도 곧은 심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아니. 나도 지금이 이런 얘기를 하기 제일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해. 구원이 너와 맺어진 지금이…분명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는 더 얘기하기 힘들어지기만 할 거야. 그러니까 얘기할게. 얘기하게 해줘."

    물론, 레이첼 누님의 말을 거부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얘기를 듣고 있겠다는 의미로 입을 열지 않은 채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만 했다.

    "구원 말대로, 우리 관계는 문제없었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같이 사는 게 아닌데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야 조금 위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레이첼 누님은 애써 만든 것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분명 어제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그에 관해선 실제로 누님을 제대로 만나러 가주지 못한 나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드립에는 약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타이밍에 이런 농담을 던지실줄이야.

    그러고 보니 웬만한 건 완벽히 대비해놓으시니까, 혹시 의외로 소질이 없는 것도 아닌 건가?

    아니. 애드립에는 약하지만, 그 이상으로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심이 더 큰 것뿐인가.

    어느 쪽이든 사랑스러우시다.

    "구원이는 충분히 사랑해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줬어. 나도 날이 갈수록 네 생각만 하게 될 정도로. 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연인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그렇게 조바심을 내게 될 정도로."

    어제 자신이 버리지 말아 달라면서 매달린 일이 생각난 건지, 레이첼 누님은 살짝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연애 경험 풍부한 누님 컨셉을 고수하던 레이첼 누님이 스스로 그 일을 다시 언급할 줄이야.

    이런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순간까지 컨셉을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는 건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거지만, 사랑스러우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작 이런 관계가 되지 않은 건…분명 네가 말한 그런 이유 때문일 거야. 나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가. 처음에 내가 이 얘기를 꺼냈을 때 레이첼 누님이 부정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정말로 자신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건가.

    하지만 내 말을 듣다 보니 사실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됐고,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여 버린 거다.

    "구원이 넌. 나보다도 날 더 잘 알고 있구나?"

    "아니. 그 정도까지는…결국 나도 디아나한테 과거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된 거고."

    이번에는 컨셉같은 게 아니다.

    진짜로 완벽하게 다정한 누님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레이첼 누님에게, 나는 살짝 머쓱해져서 반사적으로 말대꾸를 했다.

    "으응. 그렇지만 내 과거를 알고 있는 디아나님도 결국 내가 구원과 깊은 관계가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라고는 짐작해내지 못하셨잖아? 분명 구원이 네가 혼자서 생각해낸 거겠지. 아니야?"

    "그건…."

    "고마워. 날 그렇게 생각해줘서. 날 그렇게나 사랑해줘서."

    하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 누님 같은 레이첼 누님의 솔직한 감사 인사였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이 누님은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이게 바로 연상의 힘이라는 건가?

    역시 연애경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님이란 위대한 거였어.

    "네 말대로 우리 켈비를…."

    "응?"

    "아, 우리 애. 켈비라는 이름이었거든. 풀네임은 켈베로스. 줄여서 켈비."

    던전에서도 지금도 살아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이름의 애완견이네요.

    무심코 그런 고인 드립. 아니. 고견 드립? 아무튼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날뻔 했지만, 나는 그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덤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참아라. 이건 진짜로 참아야 해. 터지는 순간 대참사가 일어난다고.

    젠장. 디아나한테 미리 강아지 이름이라도 들어놓을걸.

    차라리 평소 얘기중에 들었으면 그냥 피식하고 말았을 얘기인데, 이런 진지한 얘기 중에 갑자기 훅 들어오니까 너무 참기 힘들어.

    아니. 디아나 너 복슬거리는 귀여운 강아지라고 했었잖아! 왜 이름이 켈베로스인 건데!

    그야 던전에 데리고 다닐 정도였으면 상당히 무서운 느낌의 강아지…라고 할까 개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게다가 켈비라고 줄여 부르니까 미묘하게 귀여운 느낌이라 더 웃겨.

    "그, 그런가요."

    짧은 순간 사이에 온갖 상념들이 오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결국 이겨냈다.

    "아무튼 네 말대로 켈비를 잃은 이후로, 난 더 이상 던전에서 아는 사람들을 잃는 게 두렵다고 생각했어. 안내원이 된 이유도, 네가 말한 그 이유가 맞아. 그리고 너와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은 것도…. 난 분명 널 던전에서 잃는 게 두려웠어. 아니. 지금도 두려워. 특히 네 경우에는 4계층에서 조난당했을 때 그 느낌을 조금이나마 맛봤으니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고백하기 전부터 그렇게나…켈비를 잃었을 때 이상으로 슬픈 기분이었는데. 만약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지금 널 잃게 된다면…아니. 만약 너와의 관계가 더 진전되어서, 제대로 된 연인 관계가 된 이후에 널 잃게 된다면…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레이첼 누님은 잠깐 그런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린 건지, 내 품 안에 있는 그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런 레이첼 누님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나는 누님의 몸을 꼭 끌어안아 줬다.

    "그러니까 분명, 나는 내심 너와의 관계 진전을 일부러 끌고 있었던 걸 거야."

    그렇게 말한 후, 레이첼 누님은 살짝 한숨을 쉬고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결국 이렇게 너와의 관계는 착실히 진전해 버렸으니까 의미 없는 얘기가 됐지만. 아니. 만약 관계가 정체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에 대한 내 마음은 계속 커져갔을 테니까 결국 똑같은가."

    레이첼 누님의 말대로, 결국 끌어왔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의 관계만이 진전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첼 누님은 괜히 더 복잡한 심경이겠지.

    그런 누님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나는 우선 너스레부터 떨기로 했다.

    "우리, 제대로 관계가 진전된 건가?"

    "…너무해. 어제 그렇게까지 해놓고 그런 말을 하기야?"

    "아니. 앞으로 내 애인이라고 당당히 말해도 되는 건지, 일단 그 입으로 제대로 듣고 싶어서."

    "…당연하잖아."

    "그 당연은 당연히 된다는 의미? 아니면 당연히 안 된다는…."

    "…구원이 너 지금 누나 놀리니?"

    "그럴 리가요. 그냥 기쁜 말은 몇 번 들어도 기쁜 법이라."

    "사라씨가 구원이 보고 맨날 바보라고 하는 이유. 조금 알 것 같아."

    "앗, 너무해."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쿡쿡하고 한차례 웃었다.

    비록 레이첼 누님의 눈은 아직도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지만.

    하지만 내 얘기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뭐, 농담은 이쯤하고. 진지한 얘기를 하자면, 날 던전에서 잃을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어. 난 절대 죽으면 안 될 이유가 있거든. 난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여신님께서 내리신 사명을 완수해야 하니까?"

    "아니. 아직 그 사명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여신님의 사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레이아씨나 마틸다씨가 들으면 졸도할걸."

    "분명 여신님은 마음씨가 넓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야. 레이아나 마틸다도 분명 날 사랑하니까 이 정도 말로 졸도는…그래도 일단 비밀로 해줘."

    여신님 봐주실 거죠?

    그리고 레이아나 마틸다도, 사명보다 내 목숨이 중요하단 입장이니까 분명 이해해주겠지?

    아니. 그래도 사명 따위 개나 주라는 식의 말은 문제가 있나.

    "쿡쿡. 구원이 하는 거 봐서."

    뭐, 일단 레이첼 누님이 다시 한번 웃어줬으니 괜찮다고 치자.

    나는 다시 표정을 다잡고, 레이첼 누님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보다, 내게는 던전에서 죽으면 안 되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

    "뭔데? 그 이유라는 게."

    "내가 죽으면 디아나도 따라서 자살한다고 했거든."

    "으, 응?"

    그리고 이어진 내 말에, 레이첼 누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디아나랑 얘기하던 중에 어쩌다가 그런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말이야. 그 녀석 내가 죽으면 날 따라서 자살하겠고 협박하더라니까. 심지어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었어. 그래서 난 못 죽어. 만약 디아나가 자살이라도 하는 날에는 수백 수천만 명의 마법사들이 원혼이 되어서 지옥까지 날 쫓아올걸."

    "……."

    "라는 건 물론 농담이고. 아, 마법사들의 원혼 어쩌고 하는 게 농담이라는 얘기야. 자살 얘기는 진짜고. 아무튼 아무리 내가 죽은 다음이라고 하더라도, 난 내 여자가 자살하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러니까 난 절대 안 죽어. 죽을 수 없어. 그러니까 레이첼도 안심해도…미안. 이런 걸로는 역시 안심이 안 되려나."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레이첼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던전을 다니는 걸 그만둘 수는 없다.

    딱히 사명감에 불타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험심에 불타서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단순히, 내가 던전 다니기를 그만두면 여신님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줬던 능력을 전부 빼앗고 다시 원래 세계로 되돌려질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레이첼뿐만 아니라 내 여자들 전부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니까.

    이제는 우리 애들과의 관계가 내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빠져버린 내게 있어서는 그거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던전에 다니는 걸 그만둘 수는 없다.

    그러니 던전에 계속 다니는 내가 레이첼 누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말이라도 해서 레이첼 누님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전부였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늦잠자서 하마터면 오늘 못 올릴뻔했네요.

    댓글에 상태창 얘기가 간간히 나오네요.

    쓰기 귀찮…아직 레벨 한계 돌파라든가 상태창을 보여줘야 할만한 뚜렷한 변화가 없어서 안썼는데 쓰는게 좋을까요?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면 언제 한번 기회를 봐서 스토리 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써보겠습니다.

    닭구 // 감사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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