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762화 (746/1,205)
  • <-- 레이첼의 이사 -->

    그렇게 천사님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이른 아침부터 레이첼 누님이 잠들어있는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뭐, 바로 옆방이지만.

    참고로 천사님은 나와 같이 방을 나오셔서, 마지막으로 가볍게 키스를 나눈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셨다.

    혼자 내 방에 남아있어도 할 게 없을 테니까 말이야. 침대에서 쉬려고 해도 레이첼 누님의 냄새가 날 테고.

    아무튼 천사님과 헤어지고 레이첼 누님이 쉬고 계시는 방의 문 앞에 선 나는, 미리 할 말을 정리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누님은 이미 일어나계신 걸까?

    어제저녁부터 기절해있었으니, 도중에 한 번쯤은 일어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면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을 텐데.

    바넷사를 불러서 누님이 도중에 일어났었는지, 상황 설명은 했는지 물어볼까?

    아니. 이 시간에 바넷사를 불러서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자살행위인가.

    물론 집사의 일이기는 하지만, 바넷사가 자긴 일할 땐 완벽히 집사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나까지 정말로 단순히 집사 취급할 수는 없지.

    결코 바넷사가 보기보다 상당히 질투심 강해 보여서, 무서워서 주저하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들어간 다음 요령껏 분위기를 파악해서…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 지금 몸에서 레이아 냄새 엄청나게 날 텐데.

    그야 물론 깨끗이 씻었지만, 그 이후에 레이아가 옷도 입혀주고, 키스까지 했잖아.

    나도 어제 깨달은 거지만, 레이첼 누님도 상당히 냄새를 신경 쓰는 편이지 않던가?

    아니. 레이아하고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냄새를 신경 쓰는 거기는 하지만.

    괘, 괜찮으려나? 상당히 신경은 쓰지만, 딱히 후각이 예민하다거나 한 건 아닐 테니까 괜찮겠지?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두려워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레이아가 준 소중한 기회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일단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간 방의 침대 위에는, 내가 눕혀둔 모습 그대로 잠들어계신 레이첼 누님의 모습이 있었다.

    아니. 잠깐만. 진짜 너무 그대로인데?

    그야 물론 내가 누님의 모습이나 위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걸 고려하고 생각해봐도 너무 똑같아. 깔끔하게 몸 위에 덮인 이불이라든가.

    혹시 레이첼 누님. 그대로 지금까지 계속 잠들어 있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오래 잠들어있는 건데.

    그야 누님이 정신줄을 완전히 놓고 탈진상태에 빠질 정도로 내 테크닉이 엄청나기는 했지만 말이야.

    …우리 애들이 나한테 익숙해져서 괜찮은 것뿐이고, 실은 나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난 섹스할 때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타입인가?

    아니. 성자 레벨이 오르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섹스 테크닉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애초에 나한테는 무적의 힐링 섹스가 있으니까.

    느끼면 느낄수록 오히려 체력은 회복될 거라고.

    "으응…구원씨…?"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타이밍 좋게도 레이첼 누님이 정신을 차렸다.

    뭐, 타이밍이 좋다기보다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방에 들어온 소리 때문에 깬 거겠지만. 내 예상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로 오래 잤을 테고.

    "일어났어?"

    "헷?! 아, 하읏! 네, 아뇨. 아으, 으, 응…?"

    잠에서 덜 깨신 누님은 내 반말을 듣고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그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질 정도로 파닥거리면서 패닉 상태에 빠지셨다.

    그러고 나서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모호하게 반말을 했다.

    다행이다. 일단 서로 반말을 하기로 한 것 자체는 기억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잘 잤어?"

    "으, 응…솔직히 오면서도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여기 침대 질이 의외로…헷? 여, 여기 어디?!"

    역시나 한 번도 안 깨셨구나.

    너무 화끈하게 패닉 상태에 빠지셔서, 굳이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조차 없었다.

    뭐, 이번에는 굳이 레이첼 누님이 아니라 누구라도 패닉 상태에 빠질만한 상황이기는 하지.

    분명 모텔에서 섹스하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거니까.

    "우리 집인데."

    "우리…그, 그럼 디아나님의 저택?! 어느새?!"

    "계속 거기 있을 수도 없으니까. 잠든 사이에 데려왔어."

    "그, 그럼 이 옷도 구원씨…구, 구원이 네가 다시 입혀준 거니…?"

    "네. 아니. 응."

    구원이라니. 그다지 익숙하지 호칭법에 나는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저렇게 불러주는 아는 누님 같은 건 단 한 명도 없는 인생이었고.

    역시 반말로 이러니까 뭔가 더 누님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까…반사적으로 나도 다시 존댓말을 써버렸잖아.

    "그리고 속옷은 그게…어쩔 수 없이 도로 입혔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정액도 다 말라버렸을 테지.

    …이제 와서 생각한 거지만, 누님을 이 방으로 옮길 때 속옷은 벗겨둘걸.

    아니. 그러면 또 그림이 엄청 이상해지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저거 이제 와서 벗으려면 상당히 고생하지 않으려나.

    "응? 속옷…? 앗, 자, 잠시만 뒤로 돌아주고 있겠니…?"

    누님의 말에 내가 순순히 뒤를 돌자, 뒤에서 바스락거리면서 누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속옷 상태를 확인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아앗…이, 이건…."

    네. 제 생각이 짧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래선 냄새가 몸에…."

    그런 문제?! 그런 문제에요?! 게다가 목소리 조금 기뻐 보이시지 않아요?!

    아마 말라붙은 정액이 털 같은 곳에도 달라붙어서 상당히 벗기 힘드실 텐데요?! 그런 걱정은 안 하세요?!

    여러모로 태클을 걸고 싶어진 나였지만, 일단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다 됐어. 이제 괜찮아."

    괜찮으신 겁니까.

    "하지만 여기 데려올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역시 최근에 잠을 잘 못 자서…나 그렇게 푹 잠들어 있었니?"

    내가 다시 뒤를 돌아 누님을 마주 보자, 누님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질문했다.

    아무래도 레이첼 누님은 속옷보다는, 그 점이 더 부끄러우신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속옷에 흥분…기뻐…아무튼 속옷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누님의 기준은 잘 모르겠어요.

    또다시 태클을 걸고 싶은 본능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 충동을 억눌렀다.

    이번에는 신경 쓰이는 얘기도 있었고 말이다.

    "네. 뭐. 잠을 못 잤다는 건 역시 저 때문에?"

    "아으…조, 조금 신경 쓰였던 것뿐이니까."

    누님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면서도, 일단 너무 신경 쓰지는 않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누님. 그렇게 연애 관계에서 여유로운 척하는 건 저한테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린 시점에서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런가. 누님은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나와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묘하게 깊이 잠들고 오래 잔다 싶었더니.

    나와의 관계가 진전하는 것으로 긴장이 풀렸던 거겠지.

    "그, 그보다! 그럼 지금 시간은…."

    "이제 6시 반 정도 됐네."

    "……으응?"

    내 대답에, 누님은 이번에도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자, 잠깐만. 우리가 오후에 길드를 나와서…그러니까…그게 전부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으응. 하, 하지만 무척 오래 한 기분이었는데…그, 그것도 성자의 힘? 실은…."

    "오래 했던 거 맞아!"

    그러니까 그런 표정으로 내 고간을 쳐다보지 마세요!

    누님 지금 패닉 상태라서 생각하는 게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는 중이라고요!

    착각 아니에요! 저 절륜한 거 맞아요!

    "앗, 하, 하지만 지금 6시 반이라고…."

    "아침."

    "……응?"

    내 짧은 한마디에, 누님이 다시 한번 굳어져 버렸다.

    "지금 아침이야."

    커튼을 쳐놔서 창밖이 제대로 안 보이니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그럼 난…."

    "잘 잤어?"

    "……응."

    내가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자, 레이첼 누님은 드디어 내 말에 숨겨진 뜻까지 이해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조그만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귀여우시다.

    "뭐, 그런 것보다. 조금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괜찮아?"

    "응?"

    "아니. 출근이 상당히 빠른 모양이었으니까."

    "그건 괜찮지만…어차피 어제 미리 휴가를…그, 그래서? 누나한테 할 얘기라니?"

    아니. 잠깐만요. 누님. 지금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말이 나왔는데요.

    대체 어쩔 생각으로 어제부터 미리 오늘까지 휴가를 내신 걸까요?

    어제 다짜고짜 모텔로 데리고 들어가신 것도 그렇고, 혹시 내가 정말로 누님을 차버릴 생각이었으면 몸으로 유혹이라도 할 생각이셨던 걸까?

    또다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나였지만, 이번에도 꾹 눌러 참고 원래 하려던 얘기부터 하기로 했다.

    그만큼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아, 응. 어제 하려고 했던 얘기 말인데."

    "어제?"

    "그 왜. 누나가 나한테 모텔에 들어오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몸으로 철저히 알려주기 직전에…."

    "아앗! 응! 기억났어! 응! 알았으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내가 구체적으로 누님이 했던 대사까지 그대로 입에 담으며 누님의 기억을 확실히 되살려주자, 누님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감격의 몸부림을 치셨다.

    후훗. 누님. 아무리 기뻐도 그렇지. 너무 반응이 격하시잖아요.

    뭐, 농담은 이쯤 하기로 하고. 이제 진짜로 진지하게 가볼까.

    "아무튼 그동안 실은 나도 어떻게 하면 레이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해왔었어."

    "아…."

    내가 분위기를 잡고 그렇게 말하자, 누님은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누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괜히 더 가슴이 부각되어서, 진지한 얘기를 하려는데 눈이 딴 데로 가게 되잖아요.

    아니. 결코 누님이 나쁜 게 아니지만.

    "그리고 미리 사과할게. 레이첼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러다가 보니 조금 과거를 캐는 짓까지 하게 됐어."

    "응? 과거라니? 누나는 딱히 별다른 과거 같은 건…."

    내 사과에, 누님은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일단 내가 뒤에서 과거를 캐내고 다닌 걸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누님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제일 좋았을 거라고 알고 있었고, 세상에는 뒤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실은 이 얘기를 꺼내면서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제일 고민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제 보여줬던 누님의 행동만 보더라도 누님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 그냥 대놓고 말한 다음 사과를 한 거였는데.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라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제일 걱정했던 부분을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얘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던전에서 소중한 애완견을 잃은 거잖아?"

    "읏…!"

    내 말에, 누님은 숨을 크게 집어삼키며 할 말을 잃었다.

    역시나. 이 반응을 봐서는 역시 레이첼 누님은 아직도 그 사건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 생각했어. 레이첼이 던전에서 아는 사람을 잃을 것 같을 때 보여주는 반응은 이상할 정도라고. 애완견을 잃은 게 원인인 거지?"

    "……."

    "그리고 나도 계속 던전에 다니는 이상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고."

    "나, 나는…."

    "실은 내가 여러 여자 사이에서도 충분히 사랑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고, 실제 이유는 그런 거 아니야? 나와 애인 사이가 되면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큰 상처를 입게 될까 두려워서…."

    "나, 나는…! 그런 게! 그런 게…!"

    레이첼 누님은 내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잃기만 했다.

    역시나. 결국 내 예상이 전부 들어맞았다는 건가.

    "괜찮아. 비난하는 게 아니야.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나 자신의 가설이 완벽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조금 몰아붙이는 것처럼 말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스스로를 쿨다운 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며 레이첼 누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보다 쓰는데 시간이 더 걸려서 조금 늦어졌네요.

    아루꿍 // 물론 구원이 무지막지한 매력 수치 때문에 뭘해도 웬만해선 매력있어 보이는 건 맞지만, 히로인들에 한해선 콩깍지 버프가 훨씬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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