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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44화 (72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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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굴 열쇠를 위한 여정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미안하게 됐어. 우리 미리엘이 괜히 서둘러서."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며, 앨리시아는 예상했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우리도 수컷의 부활 주기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보지 않고 있었으니까. 어림짐작으로 예정을 뒤로 늦추는 것보다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부활하는 즉시 잡아버리는 게 낫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아니. 이 정도로 뭘."

    어차피 우리도 득되는 게 있으니까 맺은 협력 관계고. 어울리지 않게 뭘 이런 걸로 감사 인사까지 하냐.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꾹 눌러참았다.

    겉으로는 전과 같이 그냥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차기 전과 완전히 같이 대할 수는 없으니까.

    특히 앨리시아의 털털한 성격을 언급하는 말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뉘앙스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앨리시아도 내심 엄청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그럼 이제 여기서 수컷 펭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없이 시간만 보내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지만, 마틸다는 기다리는 기간 동안은 물 속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마틸다는 내 팔에 매달리며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왔다.

    전투가 벌어질 위험도 없는 장소에서 나한테 매달리기까지 하니 핑크빛 모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핑크빛 모드는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얘 이번 던전행 동안에는 한 번도 핑크빛 모드가 안 됐네.

    앨리시아나 삼인방이 있으니까?

    확실히 앨리시아의 앞에서 핑크빛 모드가 되어 달라붙는 건 상당히 성격 나쁜 짓으로 보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마틸다 얘, 역시 마음만 먹으면 핑크빛 모드도 충분히 자제할 수 있잖아.

    평소에는 왜 안하는 건데?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조금 시간이 아까운 기분도 드네."

    원래는 한시라도 빨리 5계층에 내려가서 여신님을 다시 강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계획을 뒤로 미루고 내 직업 레벨 올리기를 우선하기로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빨리 여신님을 강림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고작 며칠 정도라고는 하지만, 이왕 던전 안에 들어와 있는 거니까 시간을 유효활용하고 싶은데 말이야.

    "하지만 벽을 뚫고 밖을 오가는 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구먼."

    "그게 문제란 말이지."

    지금까지는 운 좋게 눈에 띄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황제 펭귄의 방에서 여기까지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은 너무 눈에 띈다.

    디아나의 말대로 수컷 펭귄이 부활할 때까지 들락날락하면서 위에서 사냥을 하는 건, 다른 모험가들에게 소계층의 비밀을 들킬 빌미를 제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응? 뭐가 문제야? 밑에서 싸우면 되잖아?"

    "아니. 그건 조금…."

    확실히 거북이굴을 오가는 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우리가 괜히 저번 탐험에서 거북이굴을 금방 뒤로 했겠어?

    아니. 물론 디아나의 사정 때문에 황급히 위로 올라간 것도 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지금 내게 제일 절실한 건 월영무사의 직업 레벨과 공격 스킬들의 레벨을 올리는 거다.

    그리고 레벨에 비해 무식하게 튼튼한 방어력이 특징인 거북이들은, 레벨 업 노가다 상대로는 최악이었다.

    방어력이 약해서 레벨 업 노가다 상대로는 최고인 펭귄과 정반대라고나 할까.

    뭐, 앨리시아는 아직 4.5계층에서 뭐가 나오는지 잘 모르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만.

    "아, 그래. 어차피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까우니까. 거북이굴 구경이나 하고 올래? 너희도 이제부터 상대를 하려면, 미리 정보는 얻어두는 편이 좋지 않아?"

    그리고 앨리시아가 거북이굴의 정보를 잘 모를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수컷 펭귄이 부활하는 동안 시간을 유용하게 쓸 방법을 떠올렸다.

    어차피 그동안 내 레벨 업은 무리일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앨리시아 파티도 미리 싸워본 우리한테 거북이의 상대법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 탐사를 하는 게 좋을 거고.

    미리엘이 수상하다고는 해도 돕고 돕는 관계가 된 이상,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응? 으응…그렇군…."

    하지만 내 제안을 들은 앨리시아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그래?"

    "아니. 미지의 상대와 싸우는 것만큼 좋은 훈련은 없으니까. 저 녀석들에게 미리 몬스터의 정보를 들려주는 건…."

    과연. 그러고 보니 오면서 나한테 특훈을 시킬 때도, 꼭 싸움이 끝난 다음에 고칠 점이나 그 몬스터를 어떻게 상대하면 더 효과적인지 설명했었지.

    그냥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었다는 건가.

    진짜 의외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 베테랑 교관한테 의외로라고 말하는 건 실례겠지만. 아무래도 얘 이미지가 말이야.

    "그래! 저 녀석들은 여기 남기고, 나하고 너만…앗…읏…자, 잠깐 내려가서 한 마리 상대를 하고 오는 건…!"

    "제가 가줄게요."

    그리고 잠깐 생각한 끝에, 앨리시아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짝 치면서 그런 말을 외쳤다.

    도중부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챗다는 듯, 말을 더듬고 얼굴까지 살짝 붉히면서.

    물론, 앨리시아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마자 우리 용사님이 곧바로 나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어버렸지만.

    "으, 응?"

    "수컷 펭귄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이상, 구원은 최대한 여기 남아있는 게 좋아요. 괜히 다른 사람만 남기고 갔을 때 수컷 펭귄이 부활하면 어쩌라고요? 공격력만큼은 강한 수컷 펭귄을 상대로 구원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붙잡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어째서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죠?"

    "아, 아니. 난…."

    "밑에 있는 몬스터에 대한 정보라면 저도 알고 있으니, 정보가 필요한 거라면 제가 따라가서 설명을 해줄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

    사라의 쏘아붙이는 것 같은 말투에, 앨리시아는 완전히 밀려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역시 사라야. 저 앨리시아를 말만으로 저렇게까지 밀어붙이다니.

    물론 앞선 상황 때문에 앨리시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도 있었지만.

    앨리시아가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먼저 실수를 해놓고 지적받았다고 욱할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건 아니니까 말이야.

    게다가 바로 앞에서 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뭔가 해보려는 것 같은 발언까지 했으니, 내 여자한테 욱하기는 더더욱 힘들겠지.

    물론 반응을 보니 딱히 나랑 단둘이 있을 생각으로 그런 발언을 했다기보다는, 별생각 없이 말을 내뱉고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사라에게 한없이 쏘아붙여지고 있는 앨리시아는, 얘 좀 말려보라는 듯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봤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도 소용없다고. 저렇게 불붙은 사라는 나도 말리기 힘드니까.하지만 확실히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좋지 않겠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사라는 점점 과열돼서 앨리시아를 몰아붙일 거다.

    내가 찬 앨리시아한테는 그동안 쌓인 감정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면 모처럼 맺은 동맹 관계가 초장부터 삐걱일 수도 있다.

    "그건 안 돼."

    "뭐?!"

    그리고 내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그렇게 말하며 끼어들자, 사라는 설마 내가 반대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봤다.

    아니. 야.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너 농담 아니라 가끔 진짜로 무서우니까.

    그리고 사람 말은 끝까지 듣는 게 중요하다니까?

    "위험하게 널 어떻게 앨리시아랑 단둘이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다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레이아도 가야지. 어차피 반대쪽에서 이쪽으로 올라오려면 그때도 열쇠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뒤에 있는 너랑 레이아를 지켜주기 위해서 최소한 실비아나 마틸다 둘 중 하나는 따라가야 되고. 암. 어떻게 널 혼자 보내. 이 예쁜 얼굴에 생채기라도 생기면…."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 바보야."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사라는, 곧바로 얼굴에서 독기가 빠지며 귀엽게 뺨을 붉혔다.

    훗. 역시 나란 놈이란.

    뭐, 대신 앨리시아가 상당히 고깝다는 표정으로 날 보게 됐지만.

    야. 자길 찬 남자가 딴 여자랑 이러는 거 보니 그런 표정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이해는 하는데 말이야, 이거 하나만 기억해라. 일단 난 널 도와주려고 이런 거다?

    "그래서, 결국 어쩔 거야? 내려가서 한 번 거북이굴 체험이라도 하고 올래? 그럼 우리 애들은 붙여줄 수 있는데."

    "…그래. 딱히 주렁주렁 달고 오지 않아도 한 명 정도는 나 혼자서도 지킬 수 있지만."

    역시 아까 전에 흑심을 품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는지, 앨리시아는 나 대신 다른 애들이 붙는다는 말을 듣고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살짝 나빠 보이기는 했지만, 그거야 뭐 나랑 사라랑 알콩달콩 대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니. 그건 내가 불안해서 안돼.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디아나도 따라가 줘."

    "음? 이 몸도 말인가?"

    "응."

    아까 내 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디아나는 자기는 안 갈 생각으로 있었던 건지,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런 디아나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이런 말을 속삭여줬다.

    "만약 분위기 험악해지면 네가 좀 말려줘. 일단 동맹관계니까."

    저 분위기를 봐서는 나 없을 때 사라랑 앨리시아랑 또 어떤 마찰이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런 상황이 오면 제대로 말릴 수 있는 건, 역시 디아나밖에 없다.

    "으음…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자네만 없으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만…아무튼 알겠네."

    디아나는 살짝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둘이서 무슨 비밀 얘기를 하는 거야?"

    "아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디아나도 가달라고. 그래서, 후위진을 지키는 탱커는? 마틸다가 갈래 실비아가 갈래?"

    "네? 그야…."

    "물론…."

    실비아와 마틸다는 동시에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침묵한 채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둘의 눈은 점점 더 경쟁하는 사람의 그것으로 변해갔고, 결국 좀처럼 보기 드문 왕실친위대의 기사님과 추기경님의 대립구도가 시작됐다.

    어느 한 명이 앨리시아를 따라가면, 자연히 나머지 한 명은 나와 단 둘이 위에 남게 된다.

    그 절호의 찬스를, 실비아도 마틸다도 놓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실비아씨? 탱커 역할은 실비아씨가 맡는 것 아니었나요?"

    "후위진의 보호는 마틸다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틸다는 살짝 고압적인 말투로 실비아를 압박했지만, 고위귀족인 실비아는 추기경의 압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아쳤다.

    오오. 실비아도 마틸다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인데. 둘 다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잖아.

    역시 내가 없을 땐 둘 다 이런 모습인 걸까?

    솔직히 말해서, 둘이 진짜로 붙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또 보고만 있는 남자라면 하렘을 가질 자격이 없는 놈 아니겠어?

    "둘 다! 날 놓고 싸우는 건 그만 둬!"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비극의 히로인으로 빙의하여 신파조로 외쳤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내 바보 짓에 강렬한 태클이 들어오며 분위기가 풀려야겠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상대는 그 실비아와 그 마틸다였다.

    "햐읏?!"

    "다, 당신! 싫어요! 전 당신과 같이 있기 위해서라면…!"

    실비아는 옆에 내가 있고 심지어 여기가 안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냈다는 것처럼 몸을 떨었고, 마틸다는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 내게 매달리며 어째선지 내가 했던 것처럼 신파조로 내 말을 받아쳤다.

    실비아는 원래 집중력이 엄청나서 던전 안에서는 귀여운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고, 마틸다도 오는 내내 한 번도 핑크빛 모드가 안 됐기 때문에 잊고 있었어.

    "어, 어어? 아니. 잠깐만. 같이 있기 위해서라면 뭔데? 무슨 짓을 하려고?! 그만둬?! 아니. 일단 떨어져! 다른 사람들 눈도 있다니까?"

    나는 황급히 마틸다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리 성기사 겸 추기경님의 완력은 굉장했다.

    "…장난칠 상대를 잘못 골랐구먼."

    "아니. 야. 잠깐만. 야. 너희들! 보지만 말고 좀…."

    "우, 우읏…! 저, 저도 구원님과 가, 가치 있기 위해션…!"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대놓고 내게 매달려서 얼굴을 부비부비 비벼대는 마틸다를 보고 실비아까지 불이 붙어서 내게 매달려오기 시작했다.

    야! 실비아야! 넌 평소에는 내가 오라고 해도 죽네 마네 하면서 엄살 피우면서 왜 이럴 때만!

    아니. 물론 스스로 달라 붙어주는 건 기쁘지만, 하필 꼭 이럴 때 그래야겠니?

    그만둬! 마틸다마저 떼어놓기 힘든데 너까지! 힘캐 둘이서 매달리면 진짜 못 벗어난다니까?!

    "끄악! 잠깐만! 크헉…얘들아…두, 둘이 누가 더 세게 끌어 안느냐 하는 승부가 아니…끄아악…."

    "…저 녀석도 나름 고생은 하는구나."

    실비아와 마틸다에게 더블 조이기를 당하는 내 귓가에, 앨리시아의 미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이것도 알콩달콩이지만, 과연 이 모습에 질투할 생각은 안 생기는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내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만.

    슬슬 나 진짜로 죽어….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Sasins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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