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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굴 열쇠를 위한 여정
앨리시아의 특훈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찬 것 때문에 은근슬쩍 복수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 훈련에 잘 따라오면 칭찬해주고 끝내면 될텐데, 대체 왜 승부욕을 불태우는 거야.
전투하는 동안 갑자기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내가 전투를 마침과 동시에 어디서 데려온 건지 고래 세 마리를 몰고 왔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 기겁했을 정도다.
진심으로 성자 스킬을 써야 되는 거 아닌지 고민해버렸다고.
뭐, 결국 성자 스킬은 봉인한 채로 어떻게든 해치우는데 성공은 했지만.
내가 고래 뱃속에 먹혔을 때 당황하던 우리 애들의 표정이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다.
곧바로 고래의 뱃가죽을 가르고 나오기는 했지만.
덕분에 우리 애들과 앨리시아 사이에 다시 한 번 험악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구르고 앨리시아와 우리 애들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동안에도, 삼인방은 마냥 행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딱히 내가 구르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건 아니고, 앨리시아가 날 굴리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자기들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게 행복한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남이 구르는데 헤실헤실 웃어대는 그 모습에 뭐라고 했을 나였지만, 그 너무나도 절실히 짧은 행복을 만끽하는 모습에 나는 물론 우리 애들조차도 뭐라고 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됐다.
애초에 저 삼인방한테는 한 번 미안한 짓을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이번만큼은 쿨하게 넘어가줘야지.
아무튼 그렇게 앨리시아의 스파르타식 특훈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착실히 얼음 동굴을 향해 전진했고, 며칠의 여정 끝에 그 입구를 가로막고있는 거친 물살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꽤나 보람찬 특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끝났다는 해방감은 상당했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장소지만 그래도 여기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안그래도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던 삼인방은 거의 울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 속이니 내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겠지만, 내 몸짓으로 대충 무슨 말이었는지 짐작은 한 모양이었다.
"새끼. 생각보다 꽤나 잘 버텼잖아. 이젠 진짜로 병아리라고는 못 부르겠는데?"
그리고 앨리시아는 여느때처럼 자신의 마스크를 내 마스크에 붙이고 씨익 웃으며 칭찬을 해왔다.
다만 평소와는 다르게 박치기하는 것처럼 강하게 머리를 박지도 않고, 멱살을 잡는 대신 내 뒷머리를 잡아서 끌어당기는 자세기는 했지만.
야. 칭찬은 고마운데 말이야, 이러니까 진짜 키스하는 것 같잖아.
진짜로 위험하다고. 주로 내 목숨이. 저기 눈을 빛내고 있는 우리 애들이 안 보이냐.
"그럼 아직 병아리라고 부를 셈이었냐."
"넌 내가 보기엔 언제까지나 병아리야. 내 밑에 깔려서…크흠! 흐음! 뭐, 아무튼 그런 거라고!"
앨리시아는 또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하려다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말을 돌리고는 맞부딪히고 있던 마스크를 뗀 후 내 등을 강하게 한 방 때렸다.
아니. 그러니까 부끄러워할 거면 말하지 말라고.
애초에 좋아했고, 차이기까지 한 남자한테 어떻게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할 생각을 하냐.
하여간 신경 두꺼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가."
앨리시아의 얼굴이 내게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 얼굴을 공기방울이 감쌌다.
그리고 디아나의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고 보니 얘들한테는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웃으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앨리시아가 답지않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모습밖에 안 보였겠네.
뭐, 우리가 한 얘기를 전부 들었어도 똑같이 기분은 나빠졌을 테지만.
우리 애들은 내 동정을 앨리시아가 가져갔다는 사실을 아직도 분해하고 있으니까.
"벼, 별로 아무 얘기도 안했슴다!"
그걸 아는 건지 아니면 그냥 부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여준 게 부끄러운 건지, 앨리시아는 누가 봐도 수상쩍은 반응을 보였다.
"야. 구원."
"그냥 수고했다는 얘기였어. 아무튼 그런 것보다 얼른 건너가기나 하자."
앨리시아의 그 모습을 보고 더더욱 차가운 시선을 내게 보내며 목소리를 까는 사라에게, 나는 의심받지 않도록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하고는 물살 너머로 보이는 얼음동굴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 그럴까! 너희 그 표정은 뭐야?! 그동안 잘 쉬었지? 이제 다시 기합 빡 주고 돌아다닐 시간이다! 정신 차려!"
"네, 넷!"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앨리시아는 가지고 있던 배낭에서 긴 밧줄을 하나 꺼내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길게 남은 한쪽 부분을 삼인방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삼인방 역시도 건네받은 밧줄을 차례차례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둘러서 묶었다.
응? 얘들 지금 뭐하는 거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희는 마법사도 없으면서 그동안 여기는 어떻게 지나다녔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곧바로 입밖으로 꺼냈다.
전에 우리보다 먼저 황제 펭귄이랑 싸우고 있었을 때, 분명 앨리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슬슬 5계층에 가려고 하니까, 그 전에 먼저 황제 펭귄에게 맞아봐서 맺집을 확인해보려는 거라고.
즉, 얘들도 얼음 동굴에 4계층에서 갔을 거라는 얘기다.
4계층을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이 황제 펭귄을 만나러 가기 위해 3계층에서부터 빙돌아서 황제 펭귄의 방까지 가는 건 너무 시간낭비니까.
하지만 그때도 분명 파티에 마법사 동료는 없었지?
그럼 대체 여길 어떻게 지나간 거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앨리시아의 다음 행동으로 밝혀졌다.
"응? 겨우 이정도 물살쯤이야 간단하잖아?"
앨리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허리에 묶인 밧줄 중 삼인방과 연결된 부분과 반대쪽 끝을 대검에 감아 묶었다.
그리고는 대검을 들더니, 있는 힘껏 물살의 바닥으로 던져넣었다.
저 무식한 힘으로 있는 힘껏 던진 거다. 그 거대한 대검은 거의 손잡이까지 바닥에 박혔고, 앨리시아는 두 손으로 줄을 잡아당기면서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앨리시아의 뒤에 밧줄로 연결되어 있는 삼인방이 그대로 끌려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나마 전사인 칸나와 세레나는 밧줄을 잡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제인 에이미의 몸은 물살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허리가 꺾이거나 하지는 않는 걸 보니, 정신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지만.
"…진짜냐."
"설마 저런 식으로 여길 건너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먼…."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무식한 횡단법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디아나마저 이렇게 할 말을 잃은 걸 보니, 앨리시아가 얼마나 상식 외의 인간인지 새삼 실감이 됐다.
그러고 보니 저 삼인방, 여기 오자마자 울상을 지었지.
그냥 다시 앨리시아에게 구르는 나날이 오는 게 싫었던 것뿐만 아니라, 저렇게 건널 생각에 울상을 지은 건가.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앨리시아는 자신의 검이 박힌 곳까지 전진했다.
물론, 아직 얼음 동굴의 입구까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저기서 과연 어떻게 할까?
나는 완전히 관람객 모드가 되어서는 숨을 죽이고 앨리시아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그리고 우리의 여장부 앨리시아는, 자신이 박았던 대검을 그대로 뽑아버렸다.
물론 고정대를 잃은 앨리시아와 삼인방의 몸은 물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려고 했지만, 그 몸이 완전히 물살에 휩쓸리는 것보다 앨리시아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바닥에서 뽑아낸 자신의 대검을 다시 전방의 바닥에 던져서 박아버린 거다.
물살에 붕 떠서 힘쓰기도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한 녀석이다.
"저기, 구원씨? 디아나씨?"
내가 숨을 죽이고 앨리시아와 삼인방의 횡단을 주시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귓가에 우리 천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 응? 왜그래?"
"슬슬 마법으로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저희도 건너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천사님의 목소리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무리 오는 동안 앨리시아와 마찰이 있었어도, 천사님은 천사님이었다는 얘기다.
뭐, 앨리시아보다는 삼인방이 불쌍한 거겠지만. 에이미하고는 원래부터 친구사이였고.
"으, 으음! 그렇구먼!"
…이 반응. 디아나 너도 넋 놓고 봤구나?
그 심정, 아플 정도로 이해된다.
아니. 저건 솔직히 넋 놓고 보게 돼.
너무 무식한 방법으로 던전의 장애물을 돌파해나가는 모습을 보니까, 살짝 존경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아무튼 식사 때 쓰는 바람 마법을 제외하면 오는 동안 마법을 쓸 일이 전혀 없었던 디아나는, 넘치는 마력을 사용해 우리가 있는 장소부터 얼음 동굴의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공기의 길을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어째선지 앨리시아한테는 불평을 들었지만.
"아니. 너희야말로 뭐하…아, 아무튼 이러는 게 편하잖아."
솔직히 그 무식한 횡단법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나는 일단 꾹 눌러 참기로 했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특히 쟤는 나보다도 훨씬 더 베테랑 모험가니,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지.
"이 녀석들은 파티에 마법사가 없으니까 편한 방식에 익숙해지면 곤란하다고."
설마 살면서 이런 식의 불평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얘 실은 스탯의 신봉자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몸이 피곤해지는 게 좋은 마조히스트 아니야?
아니. 자기 몸보다는 남의 몸이 피곤해게 만드는 거니까 사디스트인가?
"그래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줘라. 너희가 지나갈 때까지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잖아."
머릿속으로는 엄한 상상을 하면서도, 나는 태연한 말투로 앨리시아를 설득했다.
그럼 너희는 우리가 건너고 나서 알아서 오라고 말해도 상관없었겠지만, 앨리시아의 뒤에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삼인방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쟤들이랑은 제법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하고.
"…그도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좋아. 밧줄 풀어!"
"넷!"
결국 앨리시아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철학을 꺾고 내 말에 따라줬다.
덕분에 삼인방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던전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으면서.
그래. 그래. 고맙냐.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소동 끝에 얼음 동굴로 진입한 우리는, 곧장 황제 펭귄의 방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황제 펭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올 때부터 어렴풋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이렇게 되는 건가.
"역시 아직 부활 안 한 거겠지?"
"음. 그렇…."
"그렇겠지. 소계층의 주인은 일반 계층의 주인보다 부활 주기가 짧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번엔 너무 빨리 왔어."
내 질문에 언제나처럼 우리의 지식통인 디아나가 대답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앨리시아가 대답을 했다.
아까 전에 보여줬던 무식한 행동 때문에 그 이름이 살짝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과연 최고 클래스의 클랜 간부 답게 던전에 대한 지식은 빠삭한 앨리시아였다.
자신의 차례를 뺏긴 디아나는 뚱한 표정으로 앨리시아를 바라봤지만 말이다.
"이래선 아직 수컷 펭귄도 부활 안 했을 것같네."
"그렇겠지. 아직 소계층의 수컷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너희들 얘기로는 그 녀석이 소계층의 진짜 주인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어쩌면 일반 계층의 주인만큼이나 주기가 길지도."
"그렇게 되면 부활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나."
"아무튼 가보자고."
저번에 갔던 걸로 장소를 기억한 건지, 앨리시아는 곧바로 수컷 펭귄의 방이 있는 벽쪽으로 걸어갔다.
단순무식해 보여도, 역시 눈여겨볼 건 제대로 다 눈여겨보고 기억하는구나.
"음. 이 몸의 차례로구먼."
아까 앨리시아한테 자신의 역할을 뺏긴 것이 상당히 분했던 건지, 디아나는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차례라는 것처럼 나서서는 커다란 화염구를 하나 만들어냈다.
저번처럼 눈부시게 작렬하는 강렬한 마법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믿음을 주기 위해 힘자랑을 할 필요도 없고, 저번처럼 앨리시아 파티랑 곧바로 헤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여기서 마력을 몽땅 소모하고 쓰러질 수도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 만들어낸 화염구로도 벽을 뚫기에는 충분했고, 우리는 곧장 수컷 펭귄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숨겨진 방에는, 역시나 수컷 펭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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