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741화 (7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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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굴 열쇠를 위한 여정

    "저기요. 바넷사씨."

    "……."

    아무리 불러봐도, 바넷사는 결코 대답을 하는 일 없이 전방만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전히 사복을 입은 채로. 하지만 폴리모프로 용인족 특유의 뿔과 꼬리는 감춘채.

    다시 말해서 이런 거다. 내가 식사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다가올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올 시간이 없었던 바넷사는 급한대로 사복차림으로 집사 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그래서 저렇게 나랑 말도 안섞어주고 있는 거라는 얘기다.

    아니. 화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막용 메이드복이라도 준다니까 그러네? 잠깐 저기 방에 가서 갈아입…."

    "다섯 발자국 이내로 다가오지 마십시오."

    뭐,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식당까지 안내해주고 있는 입장이면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아무리 그래도 내 취급이 너무 심하지 않냐."

    "본인 스스로의 행동을 돌이켜보십시오."

    바넷사의 냉정한 반응에, 나는 창 너머로 하늘을 잠시 우러러봤다.

    방금 전까지 힘을 써서 기분 좋은 나른함에 젖어있는 내 몸에, 맑은 햇살이 내리쬐며 기분 좋은 포근함을 전해줬다.

    너무 날이 좋다보니, 이런 날에 던전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하지만 우울한 건 우울한 거고.

    "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데."

    "……."

    내 뻔뻔한 대답에, 바넷사는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물론,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저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애랑, 방금 전까지 열심히 뒤엉키다 온 거니까 말이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좋아하는 여자랑 같이 행복한 시간을 지낸게 뭐가 나쁘다는 건데."

    "크읏!"

    "너도 좋아서 달라 붙어왔으면서."

    "…크윽. 그래서 문제라는 겁니다."

    내가 철면피를 깔고 뻔뻔한 말을 계속하자, 바넷사는 다시 몸을 돌리고 정면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다가가면 또 자제하지 못하게 될까봐 접근 못하게 하고 있는 거라고?"

    "……큭."

    다 들었으면서 시치미 뗀 거냐?! 정도는 말해도 괜찮은데 말이야.

    이 이상 말을 섞어봤자 자기만 불리하다고 생각한 건지, 바넷사는 또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평소라면 어떨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입을 다무는 건 안좋지 않냐?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 괜히 더 의식될 것 같은데. 내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닐테고.

    시험삼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바넷사의 뒤만 쫓아가봤다.

    그러자 바넷사의 발걸음에서 미묘하게나마 망설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뒤로 돌아서 지금 내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따라가고 있나 신경쓰여 죽겠지?

    입밖으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 뒤를 쫓아가고있자, 드디어 우리 철혈집사님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듯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도착했습니다."

    "어?"

    어느새 식당에 도착한 거지?

    아무래도 상대방에게 엄청나게 신경쓰고 있었던 건, 바넷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전 잠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허를 찔린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바넷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이런. 아무리 어제 그런 시간을 보냈어도, 역시 집사 일을 할 때는 철혈 집사님이라는 건가.

    아니. 뭐, 사도 임명이 성공한만큼 우리 관계에 진전이 없는 건 절대 아니겠지만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일세. 바넷사는 함께 오지 않은 겐가?"

    "아, 응. 같이 오기는 했는데. 집사복으로 갈아입으러 갔어. 하여간 사도 임명을 받고 나서도 성실하다니까."

    "그게 그 아이의 장점 아니겠나."

    "그야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게 바넷사가 사도 임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렸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우리 애들의 모습은,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내가 진짜 여자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니까.

    "그리고 레이아, 고마워."

    "네? 아, 아뇨. 그런. 저 혼자 정한 것도 아닌걸요."

    우리 천사님은 내가 뭘 고마워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듯 살포시 뺨을 붉혔다.

    하긴. 생각해보면 차례가 하루씩 밀린 거니까. 레이아 혼자서 정했을 리는 없나.

    "그럼 다들…."

    "아 정말! 이제 그만! 일부러 자랑하는 거야?!"

    내가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입에 담으려 하자, 사라가 그만하라는 듯이 외쳤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짜증을 내는 건 아니고, 그냥 이런 분위기가 싫은 모양이다.

    "아니. 너 흥부…으읍…."

    "야. 구원."

    "죄송합니다."

    아니. 다른 애들 앞에서 못할 말인 건 맞지만, 입을 틀어막고 살기를 줄줄 흘려보내는 건 봐주세요.

    너 가끔 살기 보낼 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피부가 따끔따끔 거릴 정도라니까.

    "뭐, 아무튼 오늘부터 다시 던전 생활인가. 이런 화창한 날에 던전같은데 틀어박혀야 한다니."

    "후훗. 구원씨도 참."

    내가 한숨과 함께 푸념을 늘어놓자, 레이아가 귀엽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아니. 천사님. 저 농담한 거 아닌데요.

    "하아. 정말이에요. 벌써부터 물 속에서 잘 생각을 하니 우울해지네요."

    하지만 레이아와 달리 또 한 명의 성직자는 내 말에 마음 속 깊이 공감한다는 듯, 똑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가서 성기만 얻어주고 오는 거니까, 너희는 가기 싫으면 남아도 되는데?"

    "싫어요. 그런 건."

    일단 배려용 멘트를 던져봤지만, 마틸다는 정색을 하고서는 딱 잘라 거절했다.

    싫은 건 싫은 거고, 역시 그런 부분은 또 확실히 하는구나.

    하여간 핑크빛 모드만 아니면 똑 부러진다니까.

    "아라크네 클랜에서는…분명 아침 식사 후에 오기로 했지?"

    "음. 이 몸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어제 당장 가자고 보채지는 않았지만, 그 자들도 상당히 몸이 달아올라 있을 터이니 말일세."

    "하긴. 앨리시아 걔 성격이면 이 시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흐응. 그래서, 왜 오는 게 그 사람이라고 단정 지은 건데?"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그런 내 말에 사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태클을 걸어왔다.

    "으, 응? 아니. 단정 지은 게 아니라 무심코 이름이…아니! 그러니까 전에 거기 갔을 때도 걔들이랑 만났으니까! 딱 거북이굴에 갈 수준이구나 싶어서! 아라크네 클랜에서 이름 아는 그 수준 애들이라곤 걔네들밖에 없기도 하고. 그리고 이 시간부터 와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잖아?"

    "당신, 당황하면 괜히 더 수상해 보여요."

    "역시 마틸다도 수상해보여요?"

    마틸다는 딱히 추궁하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사라는 잘 됐다는 듯이 곧장 맞장구를 치며 그렇게 말했다.

    얘가 지금 일부러 그러나…잠깐만.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치사하게 아까 전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냐.

    그렇다면 나도….

    "실비아!"

    "네, 네힛…?!"

    시끌벅적한 우리와 달리, 구석 자리에서 혼자 조용히 식사를 음미하고 있던 실비아는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사라가 괴롭혀!"

    "에, 엣…?"

    내 고자질에, 실비아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자기한테 말해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

    응. 나도 알면서 말한 거야.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

    "네, 네에…."

    "어쩔 수 없지. 이리로 와봐."

    당황하는 실비아에게, 나는 조용히 손짓을 했다.

    그리고 실비아가 식기를 내려놓고 쭈뼛쭈뼛 다가오자마자, 그 몸을 확 끌어안아서 내 무릎 위에 앉혔다.

    "햐앗!? 아우으으으…."

    "후우. 이거야 이거. 역시 심신 안정에는 실비아테라피지."

    물론, 실비아는 곧바로 몸을 떨기 시작햇다.

    그 진동을 전신으로 느끼자, 나는 절로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이 바보는…아무 맥락도 없이 자연스럽게 실비아를 괴롭히는 거 봐."

    사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무슨 소리야. 괴롭힌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실비아. 괴로워?"

    "해, 행복함니다아!"

    "훗. 그렇다는데?"

    내가 잘난체하면서 우쭐거리자, 사라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기다려! 나한테 뭐라고 할 생각이라면 그전에 한가지 경고를 하지."

    "…뭐야."

    "이대로라면 실비아는 2시간 안에 확실히 행복사로 목숨을 잃는다. 실비아의 목숨이 아깝거든 내게 뭐라고 하는 건 그만두는 편이…아얏!"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넵."

    사라의 옆구리 꼬집기 한 방에 제압된 나는, 결국 순순히 실비아를 해방시켜주고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식사 전에 했던 내 의미 없는 말들이, 전부 실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벌써 와 있었냐."

    식사를 마치고 갑작스레 바넷사가 날 불러 어딘가로 안내했던 거다.

    그리고 그 안내에 따라 접객실에 가보니, 거기에는 앨리시아와 떨거…아라크네의 떠오르는 신성 삼인방의 모습이 있었다는 얘기다.

    어쩐지 바넷사 얘가 그냥 옷만 갈아입는 것치고 한참 안 온다 생각했더니.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손님대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 여어. 며칠만이다."

    일단 앨리시아도 상당히 이른 시간에 왔다는 자각은 있는 건지, 내 얼굴을 보고는 어색하게 손을 들으며 인사를 해왔다.

    "…그래. 안녕. 바넷사, 미안한데 다른 애들한테도 바로 준비하도록 얘기 좀 해줄래? 그리고 준비해놨다던…."

    "네. 가져오겠습니다."

    바넷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섰다.

    "…뭐야, 저 집사."

    그리고 바넷사가 사라진 쪽을 보며, 앨리시아가 울컥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질 같아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데, 억지로 눌러 참는 느낌으로.

    "왜 그래?"

    "아니. 저 집사, 왠지 왔을 때부터 반응이 이상하더라고. 원래 저래? 아니면 언제 길가다 나랑 싸운 적이라도 있나?"

    "으, 응. 쟤가 원래 표정이 좀 딱딱해."

    앨리시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나는 어색하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쟤도 내 여자고, 네가 날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내 동정을 가져갔다는 것도 알아서 그래.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냥 딱딱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전의 같은 게 느껴졌는데."

    이 녀석, 평소에는 눈치도 별로 없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인 주제에 이런 때는 또 날카롭네. 야생의 감이라는 거냐.

    "아, 아무튼. 빨리도 왔네."

    "아, 응. 뭐, 미안하다. 우리 미리엘이 너무 보채서 말이야. 아마 너희 앞에서는 쿨한 척 했겠지만, 지금 상당히 안달난 상태라서. 이해 좀 해줘라."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앨리시아는, 역시나 미리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반응만 보면, 내가 우려하는 것처럼 심각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하지만 앨리시아도 무투파인 건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얘 성격상 뭘 숨기고 어쩌고 하는 건 못할 것 같지만, 어쩌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대화를 하면서 뭔가 더 캐내고 싶었지만, 앨리시아의 옆에서 억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삼인방 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너희 커버 안 해준 건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설마 앨리시아 얘가 그러고 나서 또 너희를 키우는데 정열을 불태울 거라고 내가 상상이나 했겠냐.

    아무튼 그래서 모처럼 앨리시아와의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차고 차인 사이니까. 삼인방이 없었더라도 깊이 파고들만 한 진득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 했겠지만.

    얘가 너무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도가 있었겠지. 좋게 좋게 생각하자.

    "좋아. 그럼 가 볼까."

    별 다른 알맹이도 없는 대화만 나누는 사이에 우리 애들도 전부 던전에 갈 준비를 마쳤고, 바넷사가 챙겨준 소모품들을 인벤토리에 보충한 나는 앞장서서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Sasins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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