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733화 (717/1,205)
  • 733====================

    6번째 사도

    "…하?"

    꿈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우리 철혈 집사님의 눈썹이, 한순간이지만 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니까 내일 다시 던전을 가게…."

    꿈틀.

    이번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바넷사의 눈썹은 다시 한 번 격렬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무, 물론 딱히 네가 딱히 뭔가를 준비해줄 필요는 없어. 너무 갑작스런 얘기인 건 나도 잘 아니까. 그럴 줄 알고 이번엔 내가 미리 준비를…."

    아차. 우리 애들이랑 쇼핑하고 왔다고 말하면, 괜히 더 도발하는 건가?

    아무리 우리 철혈 집사 바넷사라도, 이번만큼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사전에 한 말이 있었던만큼 더욱더.

    "……."

    이번에는 바넷사도 표정관리가 힘든 건지 손끝으로 자신의 미간을 누르고는, 어떻게든 무표정을 유지하며 잠깐동안 가만히 침묵했다.

    젠장. 내가 어쩌자고 그런 얘기를 해서.

    바넷사 얘가 이렇게 마냥 차갑게만 보여도, 그 내면에는 나에 대한 폭발적인 사랑을 숨기고 있을 거다.

    …아마도. 그, 그렇겠지? 그야 아직 사도 임명도 성공 못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 아냐! 그래도 얘한테는 신이나 다름없는 디아나의 남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인 내게 감정을 끝끝내 숨기지 못하고 고백했을 정도니까. 분명 속으로는 날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거야.

    그런만큼, 아침에 내가 했던 말들도 아마 겉으로는 차가운 척 해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란 녀석은 나갔다 돌아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아침에 했던 말을 완전히 거짓말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라니.

    "……준비라면 문제 없습니다. 이미 식사를 제외한 소모품들은 이미 구비해두었습니다. 식사 또한 밤동안 준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침묵 끝에, 바넷사는 입을 열고 차가운 표정으로 집사로서 할 말을 내뱉었다.

    "으, 응? 준비를 해놨다고?"

    "…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라고 할까….

    우리는 어제 귀환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바넷사는 분명 던전 준비에 관한 질문을 해왔었다.

    즉, 얘가 준비를 할 시간이라고는 기껏해야 오늘 내가 나가있었던 사이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그런 거잖아?

    "…혹시 말이야. 아침에 내가 한 말, 전혀 안 믿었어?"

    "…믿었습니다만."

    "크헉!"

    앞서 보여줬던 차가운 대응들보다, 믿었다는 그 한마디가 훨씬 큰 대못이 되어 내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역시 그렇죠! 미안! 괜히 나대서 진짜 미안!

    그야 그렇죠. 우리 퍼펙트 집사님은, 언제 어떠한 상황이라도 대응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두는 성격이었죠.

    난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나도 아침에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즉, 아침에 나한테 그런 질문을 던졌던 건,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대로 바넷사 나름의 사인이었던 거다.

    "하아. 진짜로 미안. 내가 이래 봬도 진짜로 너희한테만큼은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렸어."

    슬슬 농담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웃을 수 없는 수준에 달했기 때문에, 나는 표정을 바꿔서 진지하게 바넷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나오자 바넷사도 이 이상 차가운 대응을 할 수는 없었는지, 아까보다 조금 표정을 풀고는 그렇게 대답해줬다.

    아니. 뭐,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말이야.

    나한테는 느껴져. 미묘하게 아까보다는 표정이 온화해진 게 말이야.

    젠장. 이러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아니.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직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한 끝에, 나는 결국 한 가지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말을 어떻게 오해한 건지, 바넷사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변해갔지만 말이다.

    "미안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니까 표정 풀어. 그런 게 아니라, 아직 약속을 지킬 시간은 있다는 뜻이야. 너 지금부터 시간 있지?"

    나는 태연한 태도로, 확신을 가지고 바넷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넷사 얘는 일처리에 관해서 너무 완벽주의자같은 면이 있다.

    내가 아침에 그렇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다시 던전에 갈 수있게 바로 준비를 해놓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시키지 않은 일까지 척척 해놓는 퍼펙트 집사 바넷사가, 내가 아침에 시킨 일을 처리해놓지 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안된다는 말은 안 들을 거야. 언제든 내가 부르면 시간 비울 수 있도록 스케줄 조정도 해놨을 거 아니야?"

    바넷사는 시치미를 떼려는 것같았지만, 나는 그 말마저 끊어버리고 내 할 말만했다.

    그래. 난 아침에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언제 시간 비워놓고, 나한테 와서 말하라고.

    물론 그렇게 시켰다고 해서, 바넷사 성격상 언제언제 시간을 비워놨다고 내게 보고를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대신 언제 내가 불러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놨을 거다.

    "……."

    "내 말 틀려?"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역시나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바넷사하고는 좀처럼 이런 기회가 안 생기는만큼, 언제 한 번 날잡고 아침부터 밤까지 뒹굴 작정으로 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뭐, 지금부터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아직 오후 4시. 저녁식사도 거르고 레이아와 밤을 보내기 직전까지 한다고 생각하면…그나름대로 시간은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미리 생각했던대로 던전에 가기 전에 하루종일 안지 못하는 건 아쉽기는 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그럼 난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준비하고 내 방으로 와."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는 드물게도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했다.

    아니. 여전히 무표정으로 미동도 안하고 가만히 있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바넷사?"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재차 부른 끝에야, 바넷사는 겨우 입을 열고 그렇게 대답을 해줬다.

    "아참. 그리고 저녁 준비도 못하게 될 거니까 미리 메이드들한테 지시해둬. 물론 나도 오늘 저녁은 거를 거고."

    "…읏! 그, 그건…!"

    그리고 이어지는 내 말에, 바넷사는 몸을 움찔하고 떨면서 바넷사치고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표정 자체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자세히 보면 미미하게 평소보다 얼굴이 붉어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정도는 메이드들한테 맡겨도 충분하잖아. 미리 메뉴같은 건 다 짜놨을 테고,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네가 없다고 그정도 일도 처리 못할 정도로 여기 메이드들의 일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물론 바넷사가 저렇게 반응한 이유는, 아마 저녁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테지.

    하지만 나는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고, 바넷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수긍하지 않으면, 자신이 다른 이유로 반응했다는 걸 내게 알리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렇게해서, 갑작스럽지만 나는 간만에 우리 집사님과 살을 맞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전라 상태로 바넷사를 기다리게 됐지만….

    "…늦어."

    한참을 기다려도, 우리 집사님은 방으로 올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뭐하자는 거야?

    메이드들한테 오늘 저녁 식사 준비는 너희끼리하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도 아니잖아!

    나 혹시 바람맞은 거야? 그런 거야?

    만약 그런 거면 나 진짜로 운다?

    다 큰 남정네가 엉엉 우는 추한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여기로 오는 게 좋을텐데?

    젠장.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다시 옷 차려입고 나가봐야 되나?

    방에서 기다린지 벌써 한 시간째.

    나는 속옷에 한쪽 다리를 집어넣었다 빼었다만 수십차례 반복하면서, 진심으로 고민하고 고민했다.

    똑똑.

    그리고 마침내 옷을 차려입고 나가보기로 결심한 순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왔습…읏?!"

    문이 열리고 바넷사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나는 황급히 바넷사에게 달려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

    그러자 어째선지 바넷사는 문에 찰싹 달라붙은 자세로 굳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게 됐다.

    바넷사답지 않게 말이다.

    "응? 왜 그래?"

    "…어째서 알몸인 겁니까."

    "아니. 그야 지금부터…아."

    거기까지 말한 다음에야, 나는 바넷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시선이 내 하반신 쪽으로 고정되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얘하고는 이렇게 내 방에 불러내서 차분하게 시작하는 섹스는 처음이던가.

    그러니 설마 내가 오기 전부터 알몸으로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겠지.

    너무 꿈을 깨버렸나? 아무리 그래도 처음에는 조금 분위기있게 시작하는 게 좋았을려나.

    아니. 변명을 좀 하자면, 우리 애들이랑은 그런 단계는 진작에 지나간 사이니까 말이야. 난 이런 게 익숙해져있다고 할까.

    …뭐, 우리 애들도 내가 시작부터 분위기 잡고 해주면 좋아할 것 같기는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 뒤돌아서 귀 막고 있어볼래?"

    "…굳이, 다시 입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깐 생각한 끝에 처음부터 다시 해보려고 했지만, 바넷사는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살짝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줬다.

    "그래?"

    저 반응을 보니, 이제와서 다시 차려입고 분위기를 잡으려고 해봤자 호응은 약할 것 같네.

    괜히 새삼 어설픈 연극이나 하는 것보다는, 이대로 분위기 잡는 걸 노려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옷입기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살짝 떨어져서 바넷사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했다.

    아까는 너무 오래 기다리고 나니 조바심이 생겨서 그 모습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다시 한 번 제대로 관찰하니 바넷사가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렸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결코 날 바람맞힐 생각이 아니었고, 날 애태울 생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다.

    지난번에 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사게 된 사복차림.

    아마 이걸로 갈아입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바넷사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걸 입고 여기 온다는 건, 오면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니까. ‘난 지금 구원님의 방에서 구원님과 개인적인 일을 하러 가는 중이다’라고.

    전에 분명 내가 저택에서도 집사일을 하지 않을 때는 사복 차림으로 있으라고 얘기했었지만, 얘 그 이후로 한 번도 사복차림을 한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뭐, 자기는 나름대로 언제나 집사 일을 하는 중이라고 변명할 셈으로 그렇게 있었던 거겠지만, 그렇게 집사복 차림만 고집했던 게 오히려 이럴 때 독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뭡니까."

    "아니. 예뻐서."

    내가 전신을 쭉 훑어보고 있자 조금 부끄러워진 건지, 바넷사는 미묘하게 몸을 뒤척였다.

    "…그런 모습으로 말하셔도, 그다지 기쁘지 않습니다만."

    "거짓말하지마. 실은 기쁜 주제에."

    무표정을 고수하는 바넷사의 뺨에 살짝 손바닥을 대고, 나는 손끝으로 바네사의 젖은 머리카락을 살짝 간질였다.

    이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은 집사님이, 방금 전까지 나와 섹스하기 위해 열심히 몸단장을 했다는 걸 생각하니 자연히 피가 끓는 느낌이 들었다.

    "…읏?!"

    내 하반신에는 자연스럽게 피가 쏠리게 됐고, 빳빳히 솟은 내 물건 끝은 바넷사의 몸까지 닿게 됐다.

    "…고작 이런 모습에 흥분하시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뭐, 그래도 바넷사는 열심히 태연을 가장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방금 전에 반사적으로 입에서 침음성을 흘린 주제에.

    "딱히 옷차림이 야해서 흥분한 게 아니니까 전혀 문제 없어."

    오히려 결국 스커트는 바넷사가 자신의 허용범위 수준으로 골랐었기 때문에, 사실 노출도가 그렇게 높은 차림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모습은 고작 이런 모습이라고 폄하할 정도로 수준 낮지 않아."

    "…읏?! 태연하게 그런 말을…부끄럽지 않으신 겁니까."

    생각해줘서 나름 분위기 잡아주고 있는데 그런 말하지 마라, 이것아.

    이런 건 의식하지 않으면 괜찮지만, 괜히 의식하게 되면 그때부터 부끄러워지게 되는 거라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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