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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20화 (70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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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굴

    하지만, 가기 싫다고 해서 안 갈 수도 없는 게 또 인생 아니겠어?

    내가 여기서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봤자 괜히 파티의 사기만 떨어뜨릴뿐이다.

    여긴 긍정적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로 생각을 해보자.

    그래. 오히려 물 속이 더 좋을 수도 있어.

    우리 여신님이 날 위해서 만든 소계층인데, 설마 괜히 이런 데에 물을 만들어 놨겠어?

    다 필요가 있으니까 이런 걸 만든 거지.

    분명 이것도 내 성장에 필요한 걸 거야.

    옛날 만화나 소설같은 데서도 종종 나오잖아.

    수련을 위해 몸에 돌을 달고 물속에 들어가서, 물의 저항을 잔뜩 받으며 단련함으로써 강해지는 거 말이야.

    나도 수중 전투를 통해서 분명 그런 식으로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난 스탯이 부족한 게 아니라 스킬 레벨이 부족한 거니까, 그런 훈련은 별로 도움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 그런 세세한 건 신경쓰지 마!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자, 그럼 갈까!"

    "지금 당장 말인가?"

    애써 기운을 내며 물웅덩이로 잠수하려고 한 나였지만, 그런 내 발을 디아나의 목소리가 멈춰세웠다.

    "응? 무슨 말이야?"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는 것이 어떤가?"

    "하지만 시간은 아직…."

    오후 5시.

    저녁을 먹는 것조차도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자고?

    새삼 자신이 다른 파티원들보다 전투면에서 얼마나 뒤처지고 있었는지 깨달은 나로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여유있게 쉬기보다는 좀 더 사냥을 하고 싶었다.

    뭐때문에 내가 중간중간 이번엔 자기 혼자서 처리해주겠다는 사라의 고마운 제안도 거절하고, 잘 박히지도 않는 단검을 들고 거북이와 사투를 벌인 건데.

    애초에 오늘은 처음 두 번의 전투를 제외하면 나와 실비아 둘이서만 사투를 벌였다.

    그러니까 다들 그다지 피로도 쌓여있지 않았을 텐데?

    물론 실비아가 피곤하다고 했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우리 든든한 실비아는 아직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벌써 오늘을 마무리하자는 디아나의 제안은,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돌 위를 걸어다녀서 지친 거야? 몬스터랑 안 만나는 동안은 내가 업고 다녀줄까?"

    그래서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디아나에게 다가가며 그렇게 말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열 손가락을 전부 이상야릇하게 움직이면서.

    업고 다니면서 그 귀여운 엉덩이를 맘껏 주물러주지. 크케케.

    그런 의도를 확실히 담아서.

    굳이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 똑똑한 노출증 대마법사님이라면 이것만으로도 내 의도를 파악하고 얼굴을 붉히시겠지.

    "그런 것이 아닐세. 이 앞은 물이지 않은가."

    하지만 예상외로 디아나는 내 손동작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볍게 한숨까지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아차, 이 내가 설마 이런 실수를!

    "아, 그런가. 물 속이니까 업는 건 소용이 없나."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얼빠진 대답에, 디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지팡이 끝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콕하고 찍었다.

    "지금 당장 물속에 들어간다고 해도, 물속에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나. 어쩌면 계층이 끝날 때까지 물 속에서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일세. 그러니 일단 여기서 한 번 쉬어가자는 걸세. 잠은 물 속보다 땅 위에서 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디아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긴. 4계층에서처럼 전부 물로 뒤덮인 곳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여기처럼 땅 위에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경우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행을 조금 멈추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른 시간에 사냥을 종료하는 것도 아쉽단 말이지.

    "아, 그래. 그럼 조금 돌아가서 다른 길로 한 번 가볼래? 다른 길로 가면 굳이 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까지 이 미로처럼 꼬불꼬불 꼬인 동굴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수 많은 갈래길을 거쳐왔다.

    당장 십몇분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도 아직 가보지 않은 갈래 길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잠깐 역행해서 다른 길을 가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거북이와 전투도 더 할 수 있을 테고, 운이 좋으면 정말로 물을 지나지 않고 갈 수도 있을테고.

    응. 자화자찬하려는 건 아니지만, 훌륭한 판단이다.

    이래 봬도 겉멋으로 파티장을 오래한 게 아니라니까. 다 할 땐 한다고.

    "구원씨,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이쯤에서 쉬어가면 안 될까요? 여기는 너무 걷기가 불편해서, 저 평소보다 조금 빨리 지쳐버린 것 같아요. 오늘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짐까지 되어서 정말 죄송하지만…."

    하지만 그때, 레이아가 내 팔에 매달리며 불안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봤다.

    응. 할 때 하기는 무슨.

    "아, 아니! 아니야! 그러지 마! 사과하지 마! 짐이라니! 오히려 내가 미안. 미리 알아주지 못해서."

    아까 디아나한테 업어주겠다고 했던 말은 농담이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디아나라도 이정도로 퍼질 정도면 애초에 던전을 다니지도 못했을 거고, 여차하면 마법으로 떠다닐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설마 디아나보다 체력이 좋은 레이아까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혹시 이끼낀 동굴을 걷는 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거였나?

    그냥 내가 체력 좋은 바보라서 눈치를 못 챈 거고?

    "아뇨. 제 멋대로인 말을 해서 죄송…아. 사과는 하면 안되는 거였죠. 후훗."

    "응!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쉴까!"

    천사님이 살짝 혀를 내밀며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이상 사냥을 하자고 우겨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은 빠르게 사냥을 종료하고 이 자리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시라도 더 빨리 우리 애들이랑 비슷한 수준까지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내 억지 때문에 다른 애들이 무리하게 만들 수도 없는 일이고.

    "하아…."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사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낮에도 그랬지만, 우리 용사님은 또 다시 내가 레이아와 이러는 게 살짝 못마땅하신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잽싸게 잠을 자기로 했다.

    물론, 불침번은 당연히 서게 됐다.

    곳곳에 거북이들이 박혀서 대기하고 있는 이 계층의 특징상 아마 자는 동안 몬스터에게 습격당할 일은 좀처럼 없겠지만, 던전에서 절대란 없는 법이니까.

    지난 밤을 보냈던 수컷펭귄의 방처럼 사방이 막혀있는 공간이라면 또 모를까.

    "그럼 마지막은 구원으로 서기로 하고, 저희끼리 나머지 순서를 정하죠."

    하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맥락없이 사라가 그런 말을 해왔다.

    심지어 다른 애들도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서, 내 불침번 순서는 제일 마지막으로 반쯤 확정이 되어버렸다.

    원래 가장 잠을 푹 잘 수 있는 초번과 말번은 체력이 약한 디아나나 레이아가 맡아왔었는데 말이다.

    "아니. 이상하잖아."

    "됐으니까 구원은 빨리 잠이나 자."

    "그게 무슨…."

    "거북이 하나 잡고 마나 없다고 헉헉댔으면서. 빨리 자서 마나나 회복해."

    …야. 아니. 사실이기는한데, 그러니까 그렇게 명치를 세게 후벼파지 말라고 몇 번이나….

    "구원씨. 오늘은 고생하셨으니까, 오늘 정도는 푹 쉬어주세요."

    레이아의 상냥한 말마저도, 지금만큼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쉬게."

    "쉬어요."

    "……."

    "…잘 자."

    결국, 나는 제일 먼저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슬프다. 이게 바로 마누라들과의 파워싸움에서 밀린 남편의 서러움이라는 건가.

    바닥도 울퉁불퉁하고 공간도 좁아서 텐트를 치는 건 불가능 했기 때문에, 바닥에 두꺼운 이불만을 깔고 자게 돼서 왠지 더 서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애들이 굳이 그렇게 날 말번으로 돌리고 자기들끼리 나머지 순서를 정한다면서 얘기를 나눈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아마 내 직전에 불침번을 섰을 디아나가 날 깨운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네. 자네. 일어나게."

    "응? 으응…아, 이제 내 차례야?"

    "음."

    "응. 수고했어. 그럼 디아나도 얼른 다시 자."

    "음."

    내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디아나는 전혀 잘 생각이 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디아나?"

    "자네, 오늘 던전에서 구한 마석 중 하나를 줘보겠나?"

    그런 디아나에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아나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마석? 갑자기 마석은 왜? 그걸로 뭘 하려고?

    의문은 생겼지만, 나는 일단 순순히 인벤토리에서 마석 하나를 꺼내 디아나에게 건넸다.

    그러자 디아나는 마석을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 뭔가 마법을 사용했다.

    손에 쥔 마석이 밝게 빛나기를 수 분.

    다시 마석이 발광하지 않게 되었을 때, 디아나는 겨우 눈을 떴다.

    솔직히 말해서, 뭘 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딱히 마석에 변화가 느껴지지도 않고 말이다.

    "흠."

    하지만 디아나는 손에 든 마석을 보고 진중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마석으로 마법진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네."

    그리고 그 마법진까지 전부 그린 후, 디아나가 손짓으로 날 불렀다.

    마법진 안쪽으로 오라는 건가?

    "왜 그래? 이 마법진은 뭐고?"

    "음. 으음…."

    내가 시키는대로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가서 질문하자, 디아나는 어째선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기만 할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고, 날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일세."

    "응."

    "이 몸이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응. 뭔데?"

    "그게, 오늘은 평소보다 전투가 길지 않았는가?"

    윽. 설마 그 얘기였냐.

    아니. 그야 평소에는 사라의 화살이나 내 성자 스킬이 금방금방 몬스터를 해치워버렸으니까, 평소에 비하면 길어지기는 했지만.

    아니. 나 혼자 거북이를 잡겠다고 사투를 벌인 거다.

    굳이 우리 파티를 기준으로 놓고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파티와 비교를 해봐도 느렸을지도 모르지만.

    "이 몸이 전투내내 비행 마법을 사용 중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하지만 디아나는 딱히 날 탓할 생각으로 그런 얘기를 꺼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응? 아, 응. 싸우는동안 땅이 많이 흔들리기는 했지. 그게 왜?"

    "실은 그 때문에 마나가 부족해서 말일세."

    아차, 그런 거였냐.

    "그러게 왜 고집을 피워서…그냥 솔직하게 피곤하다고 말하고 네가 말번을 섰으면 좋았잖아.  아니. 정 마나가 부족하면 네 대신 내가 서주는 것도…."

    "마나가 부족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이 몸의 마나 소모는 수면을 취한 정도로 다 채워질 수준이 아니었네. 그, 그러니까 말일세."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또 얼굴을 붉히는 디아나.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응?"

    "서로를 위해서 히, 힐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디아나의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잠깐만. 뭐라고? 지금 디아나 입에서 나온 소리 맞지?

    던전에서 그런 일은 절대 안된다고 예전부터 몇 번이나 꾸중을 했던 디아나가?

    그것도 다른 애들이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

    어? 그러고보니 그럼 이 바닥의 마법진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마법진일세."

    내 시선이 마법진으로 향한 걸 눈치챘는지, 디아나가 그렇게 말해줬다.

    진심이다. 이 녀석, 진심으로 지금부터 여기서 나랑 섹스를 할 생각이야.

    아니. 잠깐만. 진짜로? 진심으로?

    그야 내가 어제부터 힐링 섹스 얘기를 계속 꺼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고. 너희도 다 알고 받아친 거잖아?

    그런데 그걸 진짜로 하겠다고?

    너 설마…노출증이 그렇게까지 심해진 거야?!

    "자, 앉게."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디아나를 바라만 보고 있자, 디아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나를 바닥에 앉히더니 그대로 내 고간에 자신의 고간을 밀착시키듯이 걸터앉았다.

    "어, 어떤가?"

    그리고는 유혹하는 것 같은 시선을 내게 보내며, 옷 위로 자신의 음부를 내 물건에 비비듯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건드리면 톡하고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 그리고 어색하게 앞뒤로 움직이는 허리.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덤벼들었겠지만, 나는 그 순간 오히려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디아나의 고간이 전혀 젖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먼저 유혹을 하고 있으면서. 이 노출증 변태 대마법사님이 말이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저번 화에서 구원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끼는 게 정상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멘탈이 나가서 평소보다 더 이상했거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아한테 갑자기 섹드립을 치는 걸로 알 수 있죠.

    사라도 그걸 눈치 채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더 엄하게 대한 거고요.

    1인칭 소설이라는 특징상 주인공 본인의 멘탈이 나가면, 독자들이 알아볼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지네요.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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