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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15화 (69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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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구조의 의미

    그러니 우리는 아라크네 클랜에게 갈 방법을 제공하고, 먼저 아라크네 클랜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장소들을 휘젓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5.5계층이나 그 아래쪽 계층에 가는 건 아직 한참 나중의 일일 거다.

    5계층의 탐험을 막는 장벽이 몬스터의 강함이라면, 지금까지 이상으로 진행속도가 느려질테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디아나의 제안은 더더욱 효과가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아라크네 클랜이 얻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줘야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간단하게 지도나 그곳에 있는 몬스터들의 정보도 손에 얻을 수 있을테고, 덤으로 5.5계층이나 그 이후에 있을 계층들의 몬스터 수를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을 거다.

    "즉, 우리는 그저 아라크네 클랜이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로군."

    그것도 그냥 닦아놓은 길이 아니라, 피를 흘리면서 닦아놓은 길을.

    솔직히 말해서 디아나가 한 제안치고는 상당히 뭐라고 할까…우리를 위해서 나서준 디아나에게 할 표현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치사하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결국 아라크네 클랜이 피를 흘리게될 걸 알면서도, 우리가 편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거니까.

    아니. 어차피 아라크네 클랜도 아래 계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정보를  제공하는 거니까 서로 win-win 관계라는 디아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디아나가 상당히 던전의 아래쪽에 있는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내가 전에 꿨던 그 이상한 꿈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설마 디아나도 나와 비슷한 꿈을 꾸기라도 한 걸까?

    "…뭔가. 이 몸의 비열함에 질렸는가?"

    디아나 스스로도 아라크네 클랜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그래도 말하는동안 조금 위축된 표정을 짓고있던 디아나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런 건 전혀 아니야."

    나는 디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황급히 그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만약 이런 것보다 더한 일을 하더라도, 내가 디아나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다.

    게다가 이건 비열한 일도 뭣도 아니잖아.

    우리를 위해서 디아나가 나서서 더러운 역할을 맡아준 거니까.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디아나가 이렇게 경계를 할 정도의 일들이 있었던가?

    "…자네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던전에서 실력을 기르는 것을 중시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모를 정도로, 이 몸들은 바보가 아닐세."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곧장 안심한 표정이 된 디아나는, 자기 표정이 내 태도 하나하나에 따라 그렇게 쉽게 휙휙 변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런가. 결국 내 애매모호한 태도가 디아나를 이렇게 경계하게 만든 원인이 되어버린 건가.

    괜히 지레 겁먹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했던 행동들이, 오히려 우리 애들을 경계하게 만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미안. 진짜 그다지 별거 아닌 것 때문에 그런 거였는데. 그냥 조금 재수없는 개꿈을 꿔서."

    "개꿈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황급히 해명을 하려고 했지만, 꿈의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레이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결국 그 꿈을 꾸고 불안함을 느낀 거죠?"

    게다가 마틸다까지도 그렇게 레이아의 의견에 긍정해줬다.

    아니. 아무리 내가 성자라고는 하지만, 성직자 둘이서 이렇게까지 전폭적인 믿음을 보내자 나도 진짜 그게 예지몽인 건 아닌가 불안해질 정도였다.

    "아니. 내가 꾼 꿈이 어떤 내용인줄 알고…."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아마 앞일에 관한 내용이겠죠. 여신님께서 사명을 맡긴 사람이 꾼 미래에 대한 꿈이에요. 게다가 그 꿈으로 당신이 불안함을 느꼈다면, 어찌됐든 경계하기에는 충분해요."

    아니. 마틸다야. 날 그렇게까지 믿어주는 건 좋은데, 추기경님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진짜로 불안해지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어떤 꿈이었는데?"

    그리고 이번엔 사라가, 최대한 쿨한 척하는 말투로 툭 내뱉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그 꿈도 사라랑 같이 자면서 꾼 꿈이었지.

    얜 안 그래도 내 속마음은 기가막히게 읽어내니까,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내가 이상한 꿈을 꿨다는 걸 눈치채고 불안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별 건 아니고, 마신한테 죽는 꿈을…."

    "바보! 별 거 아니지 않잖아! 디아나! 잘 했어요!"

    그리고 내 대답을 듣는 순간, 사라는 바로 쿨한 척하는 걸 포기하고 열을 내며 말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내가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사라였다.

    "아니. 그러니까 꿈이래도."

    분명 꿈에 불안감을 느끼고 던전에서 실력향상에 집중하자고 한 건 나였지만, 이렇게 되고나니 오히려 내쪽에서 꿈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

    역시 말하지 말걸 그랬나?

    "…구원님은! 제가 지킵니다!"

    심지어 실비아까지 내 손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고는 결연한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그렇게 말하는 걸 보고, 나는 꿈의 내용까지 말한 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 몸도 그 꿈의 내용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정말로 던전의 최심부에 있는 것이 마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적어도 무언가 위험한 것을 가두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할 걸세."

    그리고 디아나는 뭔가 확신이 있는 것 같은 말투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

    "…무슨 말이야?"

    "이 몸도 그 이후로 많이 생각을 해봤네. 자네 전에 이 몸이 계층의 주인이 지키고 있는 거대  마석을 보고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는가?"

    "드래곤 하트조차 비교가 안되는, 신이 아닌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과 마법술식이 새겨져있다고 말했던 그거?"

    "음. 그래서 이 던전을 혹시 여신님께서 직접 만드신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응. 그랬지."

    "그 가설을 토대로 이 몸도 생각을 해봤네. 만약 여신님이 이 던전을 만드셨다면, 대체 무얼 위해서 이런 위험한 던전을 만드신 걸까하고 말일세. 그리고 자네가 말했던 마신 봉인설도 생각을 해봤지."

    "아니. 하지만 고작 그걸로 확신을 가지기에는…."

    "끝까지 들어보게. 이 던전은 각각의 계층마다 전혀 다른 환경을 가지며 모험가들의 침입을 막고 있는 구조라고 생각되어 왔었네. 하지만 문득 반대로 이런 생각이 든 걸세. 과연 이 구조가, 모험가의 침입을 막는데에 최적화되어있는 구조인것일까? 하고 말일세."

    "…무슨 말이야?"

    "상식적으로 던전의 침입을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던전 입구에 가장 강력한 몬스터를 배치하는 것일세. 만약 던전의 입구부터 5, 6계층 수준의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모험가들이 이렇게 던전 심층을 탐험하고 있는 건 불가능했을 걸세."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처럼 모험가들이 던전을 다닐 수 있는 건, 입구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차례차례 강해지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경험을 쌓고 성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거다.

    하지만 던전의 입구부터 최강의 몬스터들이 득실대고 있었다면?

    과연 모험가들이 이런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누구도 던전에 발을 디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던전은 그대로 금역으로 지정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던전은 마치 모험가들이 성장하여 심층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차례차례 강력한 몬스터들을 배치하고 있네. 그리고 이 몸은 이러한 몬스터 배치가, 모험가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네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여신님께서 던전을 만들면서, 언젠가 자신에게 임무를 맡은 성자가 심층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일부러 몬스터 배치를 이렇게 해놨다고?"

    "음. 게다가 그뿐만이 아닐세. 이 몸이 방금 말하지 않았는가. 침입을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던전 입구에 가장 강력한 몬스터를 배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던전의 아래에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될 무언가가 있다면, 그 무언가가 탈출하는 것을 막기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최심부에 가장 강력한 몬스터들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즉, 이 던전은 처음부터 침입을 막는 것에 특화된 구조가 아니라, 그 봉인된 무언가의 탈출을 막는 것에 특화된 구조인 걸세."

    디아나의 말을 듣고, 나는 뒷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던전이 내가 아래로 내려가기 쉬운 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은 기분은 어렴풋이 들고 있었다.

    사실 성기가 통로의 열쇠로 이용된다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하지만 설마 내 침입을 돕는 한 편으로는 봉인된 무언가가 탈출하기 힘들게 만드는 구조라고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각 계층의 순서들도 설명이 되네."

    "응? 그건 또 무슨…."

    "생각해보게. 탈출을 막기위해 가장 아래쪽에 5,6 계층의 몬스터라는 최강의 수호자들을 장애물로 배치했다고는 하지만, 그걸로 봉인된 무언가를 막을 수 있을거라고 안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약 그 몬스터들이 뚫릴 것을 대비하여, 이번엔 각 계층들의 환경을 조작하여 탈출을 막는 걸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손에 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래에서 던전을 뚫는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최강의 몬스터들을 뚫고 지친 몸을 이끌며 겨우 위로 이어지는 통로로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도착한 곳이 온통 물로 뒤덮인 곳인 거네. 숨을  쉬는 생명체라면 그곳을 뚫기위해서는 그에 상응한 장비가 필요할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최강의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는 그 길을 다시 말일세."

    "그런건가! 그럼 나머지 계층들도?!"

    "음. 물로 뒤덮인 4계층을 지나서 젖은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혹한의 땅인 3계층. 방한장비로 몸을 덮고 간신히 3계층을 뚫는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기다리고 있는 곳이 작열하는 사막인 것일세."

    디아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왜 디아나가 아래층에 위험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지는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 던전의 구조가 너무나도 디아나의 설명에 맞아떨어져.

    "그, 그럼 역시…."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아래에서 이 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신은 아닐 걸세. 상대가 마신이라면 고작 몬스터의 배치나 자연 환경이 탈출을 막는 장치로 사용되지는 않을터이니 말일세. 상대는 아마 더위도 추위도 느끼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일걸세. 그리고 생명체라면 이 몸들에게도, 특히 자네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네. 여신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자네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고 아래로 내려보내게 했겠는가."

    긴장한 우리들을 둘러보며, 디아나는 안심시키려는 건지 방금 전까지 무거웠던 말투를 180도 바꿔서 그렇게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는 식사를 위해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던 지팡이를 손에 쥐고는, 내 고간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디아나."

    "음?"

    "지금 그걸로 커진 것 같은데 잠깐 저기 텐트에 가서…."

    "안 갈걸세! 자네는 이런 때까지!"

    "아뇨. 디아나씨. 이러시면 곤란하죠. 본인이 커지게 만들었으니 제대로 책임을…."

    "안 질 걸세! 정색하고 말하지 말게!"

    물론 디아나의 의도를 눈치 챈 나는 열심히 장난에 어울려줬다.

    진짜 장난이라니까? 진심같은 건 1%…아니. 5%…10%? 아, 아무튼 조금밖에 없었으니까!

    디아나도 저렇게 소란스런 말투로 말하고는 있지만, 농담이라는 건 알고 있는지 지팡이를 내리고 손바닥으로 내 무릎을 떼끼떼끼하고 가볍게 때리는 수준으로 그치고 있었고.

    뭐, 얼굴은 살짝 붉히고 있었지만.

    아마 상상이라도 한 거겠지. 하여간 우리 대마법사님은 변태라니까.

    "코홈! 아무튼 마신은 없다고 생각해도 될 걸세."

    "응. 하지만 디아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대체 언제부터? 혹시 마법사 협회 누님들 데려놓고 뭔가 한 것도, 단순히 팔찌를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 추측을 의논하려고?"

    "그, 그, 그, 그렇네! 당연하지 않은가!"

    …그건 아니구나. 이 녀석, 진짜로 순수하게 팔찌만 만들려고 세계 최고 클래스 마법사들을 부려먹은 거였어.

    아니. 뭐, 애초에 그런 의논을 할 거였으면 마법사 협회 누님들이 아니라 우리랑 했을 테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리고 아무와도 의논을 하지 않고 이런 추론을 해냈다는 건, 역시나 디아나는 천재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정도로 대단한 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나를 바라보는 내 눈에 의심의 빛이 깃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뭔가?! 그 눈은!"

    "응? 별로오?"

    "아무튼 자네는 이 몸을 뭐라고 생각하는 겐가! 언제 따끔하게 한 번…."

    "언제랄 거 없이 지금부터 혼나면 되지. 같이 텐트에 갈까?"

    "음? 웬일로 기특한 말을 하는구먼. 좋네. 이 기회에 따끔하게…안 갈 걸세!"

    "쳇."

    "혀 차지 말게! 하여간 자네라는 남자는! 자네라는 남자는!"

    결국 방금 전까지 엄숙한 표정으로 역대 최강의 대마법사님 느낌을 물씬 풍기던 디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귀엽게 움켜쥐고는 내 머리를 토닥토닥 때려댔다.

    응. 역시 우리 파티는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이런 분위기가 제일 어울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떡밥을 조금 정리하는 화였습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겜마스터 // 일상생활 가능합니다. 애초에 스토리는 큰 줄기만 정해놓고 세세한 내용은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고, 씬은 특히나 더 그렇습니다. 사전에 뭘 쓰자고 정해놓고 쓴 씬은 극히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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