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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14화 (69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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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 제안

    "그래. 덕분에 잘 지냈다 새끼야."

    "…비꼬는 거지?"

    "그렇게 보이냐?"

    다행히도 앨리시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날 대해줬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 역시도 앨리시아에게는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얘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라크네 클랜에 소문이 퍼질 정도로 긴 기간동안은 쭉 나와 만날 때마다 아닌 척을 해왔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솔직히 조금 얼굴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보니 내성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평범하게 대해주는 앨리시아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도 앨리시아의 마음을 알기 전처럼, 평범한 친구대하듯이 대해주지 않으면.

    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친한척 하는 것도 안 좋겠지만.

    우리 애들의 경계하는 시선도 무섭고.

    "그래서. 너희는 왜 저런 곳에? 저 삼인방은 4계층에 다닐 수준이었던 거 아니었어?"

    그리고 나는 드디어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사실 방금 전 디아나의 제안도 그 의도가 파악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제일 궁금한 건 그쪽이었지만, 그 얘기는 앨리시아가 없는데서 우리 클랜원들끼리만 해야할 얘기니까 말이야.

    "응? 아아. 아까 슬슬 5계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니까. 아까 그 펭귄 녀석은 공격력만큼은 괜찮으니 저 녀석들의 방어력을 좀 시험해보려고."

    "…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내 상상력을 아득하게 초월한 것이었다.

    "뭐냐 그 표정은. 너 모험가 주제에 아직까지 공격력 방어력 개념도 없는거냐?"

    아니. 앨리시아씨? 왜 그렇게 황당한 표정으로 절 보시는 거죠? 황당한 건 오히려 제 쪽인데요?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힐끔 시선을 돌려서 삼인방을 보니, 확실히 갑옷의 가슴팍이 뭔가에 뾰족한 것에 격돌한 듯 움푹 파여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사인 칸나와 세레나만 그렇다는 거고, 성직자인 에이미의 옷은 두 사람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했지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시험한다고?"

    "그럼 정확한 수준도 모르면서 그냥 갈까?"

    "아니. 그래도…."

    "걱정 마. 나도 다 먼저 맞아보고 죽진 않을 것 같아서 시킨 거니까. 애초에 고작 펭귄 한 마리 공격도 못버텨서야 5계층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아니. 확실히 우리 파티가 레벨에 비해서 스탯이 규격 외고, 특히 내 어그로 능력은 사기에 가까우니까 그런 거지, 다른 모험가들은 이런 게 평범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공격을 무조건 막거나 피하거나 흘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제대로 한 번 맞아보기도 해야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피해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테고.

    확실히 논리적이기는 하지만…삼인방이 얘를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참고로 저 삼인방, 아직도 눈과 귀를 막고 오들오들 떨고 있다.

    이제 얘기 다 끝났으니까 저러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대체 얼마나 귀를 꼭꼭 막고 있는 거야. 트라우마급이잖아. 저러고 잘도 모험가 생활을 계속할 수 있네.

    아니. 뭐, 앨리시아 얘도 교관이 본래 역할인 모양이고, 그 정도는 잘 조절해서 하는 거겠지만.

    "뭐, 공격을 위해 벽으로 파고든 녀석이 갑자기 안 나온다 싶었더니 네가 튀어나오고, 심지어 방해만 받다가 스틸까지 당해버렸지만."

    과연. 갑자기 황제 펭귄이 통로쪽에서 튀어나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건가.

    페이크라도 일단은 보스니까 보스룸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튀어나오지 말라고.

    아니. 여기 수컷펭귄방까지 길을 뚫는 시점에서 의미 없는 얘기지만.

    응?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개미굴에서도 여왕개미가 벽을 뚫고 나타난 적이 있지 않았던가?

    …혹시 말이야. 어쩌면 그게 여왕개미가 소계층의 진짜 보스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실마리였던 게 아닐까?

    만약 그런거라면, 지금부터는 소계층의 보스를 잡을 때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진짜 계층의 주인들과 달리, 녀석들은 위기상황에 보스룸에서 도망쳐도 끈질기게 쫓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니까.

    "…야. 뭔가 말하라고."

    "응? 아아! 미안! 난 스틸할 의도로는…."

    "됐어. 나도 그 정도는 보면 알아. 그리고 우리 사이…어차피 방어력 시험은 끝났었고. 그냥 좀 구박 준건데 그렇게 제대로 사과하면 내가 민망하잖아."

    앨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꽤나 힘있게 퍽퍽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본 사라가 엄청나게 할 말 있는 표정으로 다리를 움찔움찔 떨었지만, 일단 참아준 모양이다.

    뭐, 방금 전에 앨리시아가 중간에 말을 고쳐한 것만 봐도, 일단 얘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너희는 여길 통해 4.5계층이란 데에 가려고 왔다고? 거긴 어떤 놈들이 나오는 덴데? 아, 아직 거기까진 비밀인가?"

    "아니. 우리도 아직 가보지는 않아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볼래?"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번엔 사라뿐만 아니라 디아나를 제외한 모두가 몸을 움찔움찔 움직였다.

    이렇게 겉보기에 친구처럼 보이게 행동해도, 역시 나와 앨리시아가 동행하는 건 경계가 되는 모양이었다.

    디아나는…아마 4.5계층을 보여주는 게 설득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니. 됐어. 아직 쟤들한테 보여줄 장소도 아니고. 괜히 그런데를 보여주면 비밀 유지만 힘들어져. 일단 우리 미리엘한테 얘기하고 속시원하게 비밀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다음에 가보면 되지."

    하지만 앨리시아는 드물게도 분위기 파악을 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그런 말을 하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랑 협력 관계를 맺을 게 확실한 것처럼 말하네? 자기 혼자 결정하기 힘들다고 한 주제에."

    "그야 뭐. 복잡한 얘기기는 하지만. 아마 괜찮을거야. 우리 미리엘은…아무튼 그런 거니까. 우린 일단 먼저 위로 올라갈게. 당장 미리엘하고 의논해서 그쪽 하우스로 연락주지."

    "아, 응. 하지만 길은 막혔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지나온 구멍은 흔적도 없이 막혀있었다.

    하지만 앨리시아는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에 쥔 대검을 가볍게 붕붕 휘두르며 대꾸했다.

    "반대쪽이 뚫려있는 건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묻히거나 질식사하기 전에 뚫고 가면 그만이지."

    …아니. 너 너무 터프잖아.

    "뭐 할 말 있는 표정이다. 새끼야?"

    "아뇨. 걱정이돼서요."

    "…거, 걱정할 필요 없어!"

    아니. 야. 대놓고 약을 팔았는데 거기서 부끄러워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방금 전까지 잘 해놓고 왜 그래?

    …찬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흠. 그런 거라면 이 몸이 해결해주겠네."

    그리고 그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디아나가 나섰다.

    "응? 디아나가?"

    "음. 모처럼 이 몸이 한 제안을 의논하러 가는 것이니, 조금 도와주도록 하겠네."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고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며 동시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상당히 길게.

    대체 무슨 마법을 쓰려고 이러는 거지?

    그 대답은 디아나의 지팡이 끝에 생겨난 작열하는 화염구가 점점 더 빛을 더해가는 것으로 대신해주고 있었다.

    "인페르노."

    끝내는 눈을 뜨고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게 된 구체는, 디아나의 신호와 함께 그대로 얼음동굴의 벽에 닿아 일직선으로 쭉 길을 만들어냈다.

    대체 얼마나 강렬한 마법인지, 벽에 닿기도 전에 벽이 녹아내리면서 소음조차 전혀 발생하지 않을 정도였다.

    자, 잠깐만. 이러면 아까전에 내가 버드 미사일이니 뭐니 헛소리하면서 간신히 길을 만들었떤 건 뭐가 돼?!

    아니. 이미 여기를 보여준 시점에서 내가 한 짓은 헛수고가 된 거였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해!

    "다시 막히기 전에 어서 가게."

    아무튼 그렇게 쉽사리 길을 만들어내고, 디아나는 앨리시아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디아나가 위엄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축객령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와. 아, 넵. 그럼. 이만. 나중에 보자. 너희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간다!"

    최고 클래스의 모험가인 앨리시아 조차도 이런 마법을 보는 건 드문 일인 건지, 앨리시아는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도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삼인방을 데리고 다시 황제 펭귄이 있는 통로를 올라갔다.

    그리고 앨리시아 파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인페르노로 뚫린 벽은 다시 흔적도 없이 막혀버렸다.

    벽이 완전히 막힌 걸 확인하자,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가 갑자기 날 불렀다.

    "자네. 잡게."

    "응? 우왓?! 왜그래?!"

    그리고 디아나의 몸이 갑자기 허물어졌다.

    디아나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간신히 캐치한 후 끌어안아서 디아나의 안색을 엿보자, 그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창백한 것처럼 보였다.

    "마나를 너무 많이 썼네…."

    "너 바보지. 이럴 거면 왜 그런 허세를 부린 건데."

    "자네는 정말로 실례로구먼. 방금 전에 그 처자가 이 몸의 위엄에 몸둘바를 모르는 걸 보지 못했는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달라고?"

    "절대 아닐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품에 자기 뺨을 살짝 비볐다.

    하여간 태평한 녀석이라니까.

    "이 몸의 이름까지 걸었던 만큼, 조금 이 몸의 위엄을 보여주는 편이 협상도 순조로워질거라 생각해서 말일세. 아무튼 여기는 안전한 곳이고, 처음부터 마나가 떨어지면 이곳에서 묵어갈 생각이었으니 좋지 않은가. 자네도 궁금한 것이 있을테고 말일세."

    방금 전까지 보였던 위엄은 온데간데 없는 태평한 말투로,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힘겹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냐. 그럼 여기서 쉬어갈 준비나 할까."

    나는 그런 디아나를 등 뒤로 업어주고, 인벤토리에서 오랜만에 텐트를 꺼냈다.

    진짜 오랜만이네. 아무래도 4계층에서는 쓸 일이 없었으니까.

    "음. 열심히 일하게."

    그리고 디아나는 내 뒤에서,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토닥토닥 토닥여줬다.

    야. 몸에 힘이 없으니까 업어주기는 하겠는데 말이야, 너무 노골적으로 노는 티 내는 거 아니냐?

    뭐, 그러고보니 이렇게 업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고, 옛날 생각 나서 싫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수컷 펭귄의 마석을 회수하고 그 자리에서 야영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모처럼이니 둘러 앉아 식사까지 하면서, 겨우 디아나에게 사정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몸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한 걸세."

    "안전?"

    "음. 자네도 5계층에 가본적이 있으니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네만, 5계층에서 모험가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장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응? 4계층의 물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음. 2계층은 더위. 3계층은 추위. 4계층은 물이 모험가들을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는가. 그럼 5계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디아나의 말대로, 1계층을 제외하면 각각의 계층은 뭔가 환경적인 조건이 던전을 내려가는 걸 까다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5계층의 환경요소하면 역시….

    "모든 것이 다 엄청나게 큰 거?"

    "그것은 그저 부가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네. 5계층의 특징은 바로, 그 계층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마나가 놀라울 정도로 많이 깃들어있다는 점일세. 그 말은 다시 말해…."

    "몬스터들이 그만큼 강하다…."

    "음. 5계층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것일세. 다른 계층처럼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몬스터들의 전투력으로 모험가들을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5계층일세. 그리고 이 몸들은 그 5계층을 지나, 5.5계층. 어쩌면 6.5계층까지도 탐험해야할지도 모를 일이지."

    과연. 거기까지 듣고 나자, 나는 디아나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계층은 직전 계층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코볼트 동굴은 1계층, 개미굴은 2계층, 얼음동굴은 3계층의 특징을 남기고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5.5계층은 상상 이상으로 무식하게 위험한 곳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곳을,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탐험해야 하는 거다.

    디아나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모험가 클랜 중 가장 강력하고 탐험욕이 강한 아라크네 클랜과 협력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거다.

    5.5계층의 정보를 흘려주면 아라크네 클랜은 기쁘게 거기에 뛰어들테니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화 마무리를 살짝 수정했습니다.

    앨리시아와의 대화에서 더 쓸 내용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그냥 올려보내버려서요.

    tjdgh0802,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아루꿍 // 712화에서 잠깐 욱해서 반말하려고 햇던 것 빼면 기본적으로 존댓말입니다. 앨리시아가 존댓말이 살짝 어색한 이유는 그냥 존댓말 자체가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디아나같은 사람이랑 대화할 일이 흔한 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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