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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97화 (68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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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호가 되기 위한 조건

    "그치만 오늘도 아침부터 바빴던 거죠? 그냥 얼굴만 볼 생각이었으면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이나 나중에 여유있으실 때 오셨어도 됐을텐데. 후훗. 그렇게 누나 얼굴이 보고싶었나요?"

    파스타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나자, 누님은 행복하기 그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날 놀려왔다.

    내 코 끝을 손가락 끝으로 장난스럽게 톡하고 두드리는 행동도 아까보다 훨씬 생기가 넘쳐보였다.

    아무래도 식사를 하면서 허기를 채움과 동시에 여유까지 되찾으신 모양이다.

    응. 역시 누님은 이런 모습이 어울리신다니까.

    하지만 누님. 며칠 오늘은 아예 본인이 직접 찾아오려고까지 하셨던 분이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뭐, 누님은 일단 나 보러 저택까지 찾아올 생각 없었다고 부정했지만.

    "내일은 던전에 가야해서요."

    "어머, 그런가요? 이번에는 상당히 빨리 다시 가시네요?"

    당연한 얘기지만, 레이첼 누님은 내가 던전에 다니는 주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시다.

    던전에 드나들 때마다 제일 먼저 레이첼 누님한테 가서 보고부터 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내 던전 탐험 일정에 누구보다도 빠삭한 누님은, 이번에 급하게 다시 던전에 가는 날 보고 꽤나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일단 성자니까요. 슬슬 던전도 깊이 내려가고 있고, 여신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제 조금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요."

    그런 누님께, 나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빙돌려서 한가지 사실을 전했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계속 던전에 자주 가게 될 거라고.

    "…그런가요. 그래도 일단은이라니.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지금까지는 별로 진지하게 안 한 것 같잖아요. 불량한 성자씨네요? 여신님께 천벌 받을 걸요?"

    누님도 내 말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신 듯, 살짝 흐려진 얼굴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 아주 잠깐동안 뿐이었다.

    이내 활짝 웃는 표정이 된 레이첼 누님은 다시 장난스런 말투로 그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그 표정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아닌, 사무원 일을 할 때 보여주는 영업 미소에 가까운 표정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혹시 지금까지도, 내가 던전에 가기 전 보고를 할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저기, 누님."

    그 표정을 보고 나니, 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시간 넉넉할 때 약속을 잡아서 얘기하려고 했지만, 지금 당장 저 표정에 숨겨져있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었다.

    게다가 대화의 흐름 역시도 이런 얘기를 꺼내기 딱 좋은 흐름이잖아.

    "아이 참. 구원씨도. 농담을 너무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치면 제가 당황스럽잖아요. 혹시 누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아까부터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저도 여신님이 강림하셔서 구원씨를 엄청 칭찬하고 가셨다는 얘기 정도는 들었다고요."

    하지만 내 진지한 표정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건지, 레이첼 누님은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런 분위기를 이어갔다.

    "아니. 그런게…."

    나는 그 말을 부정하며 원래 하려던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레이첼 누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면 뭐에요? 지금부터 누나를 꼬드겨서 뭔가 하고 싶은 거예요?"

    누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앉은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고는 그야말로 귀여운 아이를 상대하는 누님의 표정이 되어 장난스럽게 내 두 눈을 가까이에서 빤히 쳐다봤다.

    게다가 그렇게 몸을 숙이니 당연히 누님의 커다란 가슴은 테이블에 얹혀지는 모양새가 되었고, 그에따라 풀어진 윗단추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누님의 가슴골이 더더욱 강조되었다.

    "후훗. 하지만 안돼요. 시간이 없는걸요."

    내 시선이 자신의 가슴골에 향한 걸 눈치 챈 건지, 누님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살짝 상체를 더 숙여서 테이블에 가슴을 더 짖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내 코끝을 톡 치고는, 그렇게 말하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워서 다시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너무 매력적이시다. 매력적이시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젠장. 평소에 농담따먹기만 해대고 진지한 표정은 여자 꼬드길 때만 지었던 영향이 이런 식으로 나와버릴 줄이야.

    "누나를 꼬시고 싶으면, 좀 더 여유있을 때 찾아오지 않으면 안돼요."

    그리고는 아까 풀어놨던 넥타이를 멋드러진 동작으로 다시 매어 가슴골을 가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구원씨. 정말로 늦었으니까 전 이만가볼께요. 후훗. 잠깐이나마 얼굴 보게되어서 좋았어요."

    "네. 누님. 안녕히 가세요. 다음엔 좀 더 시간 여유있을 때 찾아올게요."

    "정마알! 응큼하다니까."

    "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후훗. 다음에 봐요."

    누님은 끝까지 날 놀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카페밖을 나섰다.

    뭔가 오랜만에 연애 경험 풍부한 척 하는 레이첼 누님한테 휘둘린 기분이야.

    아니. 진지한 말을 하려는데 저렇게 나오니까 나도 당황해서 그렇게 되더라고.

    하지만 레이첼 누님, 저럴 때 보면 진짜 연애경험 풍부해보이신다니까. 실은 연애경험같은 거 없으시면서.

    대체 집에서 평소에 얼마나 많이 연습을 하고 계신 거야?

    게다가 오늘은 약속도 안잡고 갑작스레 만난 거잖아.

    아니. 내가 안 왔어도 레이첼 누님이 직접 찾아올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미리 연습할 시간은 충분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창밖에 시선을 돌려 방금 카페를 나선 레이첼 누님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카페에 나서는 그 순간까지 누님의 여유를 맘껏 뽐내던 레이첼 누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길드를 향해 달려가시고 계셨다.

    저렇게 부끄러워하실 거면 굳이 연애경험 풍부한 척 안하시면 될텐데.

    아무튼 그렇게 원래 목적이었던 누님의 과거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채 헤어진 후, 나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저택까지 돌아갔다.

    누님께 얘기를 못꺼낸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님의 얼굴을 봤을 때부터 시간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미리 약속을 잡아서 누님께 휴가까지 쓰도록 부탁드리고, 그때 제대로 얘기를 하자.

    그리고 사실 나도 이 이후에 더 할 일이 남아있는만큼, 너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저택으로 빨리 돌아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녀왔…."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뭔가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아니. 저택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를바가 없었다.

    정원 청소를 하던 메이드들 몇 명이 내 귀가를 확인하고 꾸벅 인사까지 해온 걸 보면, 저택에 뭔가 생긴 건 절대 아니다.

    그럼 대체 이 등골이 싸해지는 감각은 뭐지?

    내 직감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울려대고 있는데?

    그렇게 정체모를 감각에 의아해하고 있는 동안, 저택의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바넷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넷사는 내 귀환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자마자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뭔가 복잡해보이는 눈동자를 한 채, 두 손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얘기 좀 하시죠."

    "걱정마. 이렇게 애타게 매달리지 않아도, 이제는 널 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을 테니까."

    물론, 나는 붙잡힌 두 팔로 바넷사의 허리를 꽉 껴안아줬다.

    "……."

    야. 그러니까 낭군님 농담에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안긴 상태로 지근거리에서 그렇게 쳐다보니까 더 박력있잖아.

    그냥 아까 레이첼 누님한테 휘둘렸던만큼, 이번엔 내가 먼저 농담을 해보려고 한 것뿐이라고.

    "…그래서. 무슨 일인데? 갑자기 무슨 얘기? 마치 도망가는 사람이라도 붙잡은 것처럼 잡아서는."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겁니까?"

    마치 내가 당당하게 행동하는 게 이상한 것처럼, 바넷사는 미심찍은 눈동자로 날 쳐다보며 되물었다.

    "응. 정말로 몰라서 묻는데. 나 방금 전까지 나갔다가 지금 온 건 알지?"

    "그 전에 있었던 사라님 관련 얘기입니다."

    사라 관련 얘기라니. 아침에 있었던 그거?

    사라가 다 잘 설명한 거 아니었어?

    아침에 내가 말했던대로 설명했으면 딱히 문제가 없을 텐데?

    "응? 그거? 사라가 다 설명하지 않았어?"

    "…설명, 해주셨습니다만…."

    "그럼 됐잖아?"

    "…그렇지만, 그러니까."

    내 질문에, 바넷사는 드물게도 대답하기 곤란한 것처럼 확실하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면 뭐야? 설마 너도 그런 식으로 벌을 받고 싶다든가? 핫! 그럼 설마 평소에도 조금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던 게!?"

    "읏…! 아닙니다!"

    내가 웃으면서 농담을 하자, 바넷사는 예상보다도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뭐야. 왜 이래? 평소 같으면 딱딱한 말투로 ‘지금은 일하는 중입니다.’라고 말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과민 반응을 보이잖아?

    마치 나랑 섹스하는 게 두렵다는 듯이.

    아, 그러고 보니 사라 걔 나랑 섹스하고 그대로 옷만 대충 챙겨입고 방까지 갔었지.

    누가 봐도 ‘방금 전까지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왔습니다.’라고 알 수 있을만한 모습이었으니, 혹시 그 모습을 다른 애들이 보고 조금 소동이 일어났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바넷사가 이렇게 평소보다 과민반응을 보인 것도, 그리고 아까 전에 날 범인체포하듯 붙잡은 것도 이해가 됐다.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놓고 주의라도 줄 생각이었겠지.

    "아무튼 그런 것보다, 마차나 준비해줘. 지금부터 성으로 가야되니까."

    "…성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화제를 바꾸자, 바넷사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석연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얘기에 대답해줬다.

    "응. 내일은 던전에 가야하니까. 가기 전에 잽싸게 공주도 처리하고 와야지."

    "…알겠습니다."

    "응. 아, 그리고 실비아 어디있는지 알아?"

    "연무장에 계십니다."

    "그럼 난 마차 꺼내올동안 실비아 좀 데려올게."

    실비아는 벌써 한 번 성에 다녀온 상태였지만, 그래도 또 가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일단 확인은 해두지 않으면.

    "…네. 조심하십시오."

    "응? 뭘?"

    "……."

    내 물음에 대꾸하는 일 없이, 바넷사는 그대로 마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사라져버렸다.

    아니. 대체 뭘 조심하라는 건데.

    그 대답은,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실비아."

    "으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연무장에서 열심히 연습용 검을 휘두르고 있던 실비아는, 내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검을 저 멀리 내팽개치고는 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초고음을 입으로 쏟아내면서 덜덜 떨어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도망을 간 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뭐, 도망 안 간게 아니라 못 간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마치 공포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처럼 굳어져있는 실비아.

    그리고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실비아의 진동은 더욱더 커져갔다.

    바넷사야. 아까 전에 조심하라고 했던 게, 내 얘기가 아니라 실비아가 놀라지 않게 조심하라는 얘기였냐.

    아니. 설명 안해주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게다가 이 태도. 첫키스나 기타등등 일로 가끔 내성이 최저치로 떨어졌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의 반응이잖아.

    얘도 사라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된 건가?

    "안잡아먹을 테니까 그만 떨어. 아니면 너도 사라처럼 혼날 일이라도 했어?"

    "아, 아, 아, 안했슙니다! 안해쓥니다아! 요, 용셔! 용셔해! 저, 쥬, 쥬거어…!"

    아니. 그러니까 안 한 대도.

    바넷사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사라의 그 모습이 그렇게 임팩트가 컸던가?

    아니. 확실히 평소에 툭하면 나한테 야야거리면서 틱틱대는 사라니까, 그런 사라가 엉망진창으로 당한 모습은 그야 다른 애들보다 더 임팩트가 크긴 크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반응들이 격렬하잖아.

    이러다가 내가 수틀리면 잡아다가 그런 식으로 벌을 주는 귀축이라는 인식이라도 박혀버리는 거 아니야?

    으윽.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남자라는 이미지가….

    아무튼 지금은 상상 속의 벌을 받고 죽음까지 각오한 실비아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다.

    야. 넌 상상도 진짜 위험하니까 웬만하면 하면 안된다고.

    안 그래도 신체의 쾌감이 아니라 정신적 흥분으로 절정하는 애가.

    "그러니까 혼낼 일도 없는데 그런 짓 안 한다니까. 진정해. 심호흡부터 하자. 심호흡."

    "후아아아. 후으으읍. 후아아아…하, 하읏! 구, 구원님의 얼귤에 슘이이…! 제, 제셩…!"

    아니. 그러니까 진정하게 눈 좀 맞춰준 거라니까!

    아, 생각해보면 다른 애도 아니고 얘가 그걸로 진정할 리가 없나.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제일 처음 지적하신 부분은 잘린 게 맞습니다.

    제가 ctrl+z를 애용하는 습관이 있어서 종종 저런 경우가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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