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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96화 (68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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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호가 되기 위한 조건

    아무튼 사라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서, 나는 얼른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길드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길드는 사실 그냥 길따라 걸어가면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괜찮다.

    나는 암살자에서 전직까지 마친 몸이라고.

    봐라. 이 가벼운 풋워크. 지붕 위를 넘나드는 엄청난 도약력.

    할 수 있어. 이 속도로 길드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어!

    무식할 정도로 높은 스탯과 암살자 특유의 몸놀림을 살려서, 나는 빠르게 길드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됐냐면….

    "저, 서, 성자님…? 그게 그러니까…뭔가 급하신 용무라도 있으신겁니까?"

    경비병한테 붙잡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잡힌 건 아니지.

    고작 경비병이 내 몸놀림을 따라잡아서 붙잡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경비병이 내려오라고 밑에서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고 내가 순순히 내려온 거다.

    그야 그렇겠지.

    남의 지붕 위를 달리고 있으면, 그야 소동이 일어나겠지.

    일단 나 나름대로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는 안주겠다고 암살자의 몸놀림을 살려서 사뿐사뿐 달렸는데, 오히려 그게 더 안 좋았던 모양이다.

    암살자의 몸놀림을 살린다는 건, 다시 말해서 은밀하게 다닌다는 거니까.

    백주대낮에 은밀한 몸놀림으로 지붕위를 빠르게 달려가는 남자.

    응. 나라도 붙잡겠다.

    "…아뇨. 죄송합니다."

    경비병한테 불리자마자 순순히 내려간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요즘들어 절실히 느끼는 건데, 나 성격 참 많이 죽었다.

    예전같았으면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한 번 지어준 다음에 무시하고 갔을 텐데.

    이젠 내가 그런 짓을 하면 우리 애들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니까 말이야.

    게다가 예전처럼 내가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으면 모를까, 이제는 내 지위도 높아졌으니까.

    이 위치에서 막 행동하면 그냥 권력을 내세워 나대는 쓰레기가 되어버리잖아.

    내가 쓰레기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유형의 쓰레기는 아니거든.

    난 나름대로 자기 소신과 철학을 가진 쓰레기라고.

    "아, 아뇨.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성자님께서 여신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언제나 분주하고 계시는 건 압니다. 다만 방금 전 같은 행위는 신원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사람들이 불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제로 내 눈앞에 있는 경비병은 대낮부터 지붕 위를 폭주하는 웬 미친놈을 잡고보니 그 유명한 성자님이라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실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아, 아닙…아니. 네, 네에. 앞으로 조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당황한 경비병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내게 꾸벅꾸벅 불쌍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왔다.

    "그럼 저 이만 가봐도 될까요?"

    "네! 바쁘신 와중에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아뇨. 고생하세요."

    나는 성실하게 일하는 경비병에게 수고의 말을 전하고, 이번엔 경비병한테 잡히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길드를 향해 걸어갔다.

    늦었다 늦었어. 그야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성자만 아니었으면 수상한 인물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짓이었지. 앞으로는 좀 더 행동에 조심하지 않으면.

    물론 마을을 뛰는 걸로 경비병에서 잡힐 일은 없겠지만, 한 번 경비병에게 잡히고 나니 괜히 더 조심하게 되어서 뛰지는 못하고 최대한 빨리 걷는 나였다.

    아무튼 그런 경위가 있었기 때문에, 사라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내가 길드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길따라 뛰어올걸.

    지붕타기가 원인이었다지만 한 번 경비병한테 잡힌 다음인지라, 괜히 뛰지 못하고 빨리 걷기만 해서 예상보다 더 늦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으로 봐야할지, 황급히 길드로 들어가려고 입구를 쳐다보자 거기에는 때마침 길드로 들어가려고 하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이 보였다.

    동료들과 점심을 마치고 일로 복귀하려고 하는 도중인지, 안내원복 차림을 한 레이첼 누님은 마찬가지로 안내원복을 입은 여성 몇 명과 같이 대화를 나누며 길드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길드로 들어가고 있다는 건, 바꿔말하면 레이첼 누님의 점심시간이 다 끝나버렸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는 얘기로.

    망했다. 완전히 늦었잖아.

    머리 한구석에서는 빠르게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내 몸은 일단 레이첼 누님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레이첼 누님!"

    "넷? 어머. 구원씨. 어서오세요."

    뒤에서 돌진하며 갑작스레 이름을 불렀는데도, 레이첼 누님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내게 미소를 지어줬다.

    레이첼 누님과 안지 얼마 안됐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이상해. 평소의 레이첼 누님이 아니야.

    예상치 못한 일에 한없이 취약한 레이첼 누님이 이럴 리가 없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레이첼 누님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붉은데?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에 가려지도록 눌려있어 귀가 제대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엘프족 특유의 긴 귀가 눌려있을 부분의 머리카락도 기분탓인지 움찔움찔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자세히 보니,

    게다가 어째선지 레이첼 누님과 같이있던 분들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고.

    "저…구원씨? 무슨 일이세요?"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름을 불러놓고도 빤히 얼굴만 쳐다만 보고 있자 조금 부끄러워진 건지, 레이첼 누님이 조금 어색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앗, 네. 그게…잠깐 시간되세요?"

    "네? 저기, 그게 그러니까…."

    일단 레이첼 누님에게서 느낀 위화감을 둘째치고, 나는 황급히 용건부터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점심시간이 끝난 건지, 레이첼 누님은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잖아. 아직 점심시간이 끝난 것도 아니잖아."

    "얘, 얘! 그래도…!"

    "조금 정도는 늦어도 우리가 잘 말해줄테니까."

    하지만 그때, 옆에서 레이첼 누님의 동료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왔다.

    나이스 어시스트입니다! 이름 모를 안내원 누님!

    "금방 끝날테니까요."

    "그럼…."

    그렇게 해서, 나는 잠깐이나마 레이첼 누님과 대화를 나눌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점심시간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누님과 근처 찻집에 온 나는, 우선 누님께 사과부터 했다.

    왠지 오늘은 하루종일 사과할 일이 많네. 아직 점심시간밖에 안됐는데도.

    그래도 누님이 길드장 딸이라서 제멋대로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억지를 부려서 대화를 하겠다고 데려온거다.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아뇨. 그렇게나 급하게 달려온 걸 보니, 구원씨도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었던거죠? 괜찮아요. 누나가 그렇게까지 이해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날 보면서, 레이첼 누님은 특유의 여유넘치는 목소리로 누님이라는 스스로의 위치를 강조하며 가볍게 윙크하며 용서를 해줬다.

    "응?"

    "네?"

    하지만 그런 레이첼 누님의 대사를 듣고, 나는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미심쩍어하는 날 보고, 레이첼 누님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귀엽게 갸웃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하신 모양이다.

    "누님? 제가 여기까지 급하게 달려온 건 어떻게…?"

    "넷?! 아, 그, 그게! 살짝 땀도 흘리고 있고, 아까도 뒤에서 다급하게 왔으니까 당연히…."

    "혹시 제가 오는 거 봤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봤을 때부터 얼굴이 붉었지.

    만약 그게 길드로 오는 날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서 그런 거였다면?

    귀를 움찔움찔 떨었던 것도, 내가 언제 다가오나 집중하느라 그런 거였다면?

    동료분들이 보내던 의미심장한 미소도, 왠지 나보다는 레이첼 누님한테 집중되어있었다.

    "아, 아, 아, 아니요오! 그럴리가요! 그래보이나요? 구원씨는 농담도."

    가볍게 떠보자, 레이첼 누님은 손바닥을 좌우로 파닥파닥 흔들면서 부정하더니, 자기 얼굴에 손으로 파닥파닥 부채질을 하면서 말이 끝날 때 쯤에야 간신히 여유로운 목소리를 짜냈다.

    게다가 그렇게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더운 건지, 목에 두르고 있던 넥타이도 풀어버렸다.

    그러자 레이첼 누님의 풍만한 가슴이 살짝 열린 윗단추들 사이로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첼 누님, 셔츠 위쪽 단추는 푸르고 다니시는구나. 아니. 그야 가슴 크기가 크기인만큼 답답하기도 할테고, 넥타이가 폭이 넓은만큼 넥타이를 하고 있으면 가려져서 안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넥타이를 살짝 들추면 바로 가슴골이 보이는 차림의 안내원 누님이라니. 너무 야하잖아!

    남자의 로망을 불태우는 복장이 아닐 수 없었다.

    "후훗. 그래서, 구원씨. 저한테 무슨 할말이라도 있으세요?"

    핫! 어, 어느새?!

    내가 누님의 가슴골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누님은 여유를 되찾은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누님은 평소의 날 애취급하는 여유로운 누님으로 돌아와있었다.

    아니. 그 레이첼 누님이 이렇게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정신이 팔려있었다니.

    난 대체 얼마나 오래 가슴만 쳐다보고 있었던거야.

    아무튼 할 말이라.

    그래. 확실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였다.

    디아나를 통해서 누님의 과거를 알게 됐으니까.

    과거를 캐내는 짓을 한 걸 사과하고, 그리고 난 절대 던전에서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음을 주러 왔다. 누님이 던전에서 잃었던 그 애완견처럼.

    하지만 시간이 이래서야…아까 동료분은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다고는 했지만, 그리 긴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닐테고.

    어떻게 보면 누님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얘기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런 얘기를 시간에 쫓겨서 급하게 해치우는 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딱히 할 말이랄 건 없고. 그냥 누님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때문에 나는 할말이 있냐는 레이첼 누님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진지한 얘기는 다음에 돌아왔을 때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던전에 가기 전에 누님과 잠깐이나마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하자.

    "넷?! 아, 후, 후훗. 그런 사람치고는 조금 늦은 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서둘러 왔다는 사실이 상당히 기쁜건지, 누님은 얼굴이 붉어짐과 동시에 입꼬리가 살짝 풀렸다.

    제일 자주 보는 일할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커리어 우먼같은 느낌의 누님인지라, 이럴 때마다 갭이 너무 귀여우시다.

    뭐, 금방 다시 입꼬리에 힘을 줘 올리고 미소지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죄송합니다. 조금 할 일이 있어서."

    "노, 농담이에요. 저도 그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그 장난을 내가 조금 진지하게 받아치자, 누님은 다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아무리 평소에 장난기가 많아도, 이런 것까지 장난식으로 대꾸할 수는 없다고.

    그 진의가 뭐가됐든, 일단 누님이 완전히 내 여자가 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골고루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누님을 만나는 게 늦은 이유를 장난식으로 받아쳐버리면, 누님과의 관계를 내가 장난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잖아?

    내가 이래 봬도 진짜 장난을 안쳐야 될 상황은 눈치껏 자제한다니까.

    뭐, 누님은 내가 장난식으로 안받아준 게 오히려 예상외였는지 당황하셨지만.

    여유로운 척을 하다가 당황하다가 다시 여유로운 척을 하다가 당황하다가.

    오늘의 누님은 평소보다도 훨씬 바빠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가슴에 정신 팔리느라 하던 얘기를 마저 못했지.

    "누님. 혹시 오늘 점심시간에 저 보러 왔었어요?"

    "네? 아, 아뇨? 무슨 소리를. 후훗. 방금 전에 보셨잖아요? 오늘 점심은 동료들이랑 같이 저기 새로 생긴 카페에서…."

    꼬르르르륵.

    "카페에서 느긋하게 케이크를 즐기고 왔는걸요!"

    누, 누님…. 진짜로 찾아왔었구나.

    그럼 혹시 방금 전에 조금 늦었다고 한 것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였나?

    진심으로 며칠동안 안찾아오니까 직접 찾아오려고 하신 거구나.

    아니. 뭐, 비밀로 해달라고 했던 앨리시아 일을 그렇게 폭로하기도 했으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기도 했을 테니까. 응.

    앨리시아는 얼굴도 못봤으니까 그 이후고 자시고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자기 배에서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끝까지 억지를 밀어붙이는 누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봐서라도, 나는 그 이상 추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만약 날 찾으러 오다가 마주치고 황급히 길드로 돌아가서 여유로운 척을 한거라면, 대체 언제 마주친 건지 말이다.

    혹시 지붕 위를 달릴 때?

    경비병한테 붙들려서 사과하고 있을 때 모습을 보신 건 아니겠지?

    뭐, 아무튼 그런 것보다 지금은….

    "누님. 차 말고도 뭐 좀 시킬까요?"

    "네."

    일단 누님 뱃속에서 나는 소리좀 진정시키자.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호떡찡 // 관음증과 ntr은 다른 겁니다.

    관음증은 보는 걸 좋아하는 거고, ntr은 뺏기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라는 일부러 조금 애매하게 써놨습니다.

    사라가 지금까지 직접 보거나 상상한 섹스는 전부 구원과 다른 여자의 섹스밖에 없는 상항이니 관음증인지 ntr인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한 상황이죠.

    복수할 때 한 번 포츠와 케이트의 관계를 보기는 했는데 그때는 상황이 절대 흥분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예외로 쳐야 하고요.

    자드서란 // 엉덩이처럼 대놓고 폭로한 게 아니고 이쪽 취향은 가끔 말이 나오려고 해도 대충 얼버무렸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다른 애들이 알고 모르고는 상관 없습니다.

    구원이 다른 애들 앞에서 디아나한테 노출증이라면서 놀려먹으면서도, 실제로 디아나와의 노출 플레이를 다른 애들한테 들키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숨기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쟤가 그런 취향도 있더라.’수준과 ‘나 쟤 그 취향으로 눈돌아간거 직접 봤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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