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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78화 (66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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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할게요."

    소피아 대사제와 만나서 간단히 안부인사를 나눈 후, 레이아는 오늘도 역시 자선활동을 위해 빈민가에 간다며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 그럼 저도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고 와야겠네요. 도중까지 같이 가죠."

    그리고 마틸다 역시도 할 일을 해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이 흐름은….

    "당신은 어떻게 하실래요?"

    예상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마틸다는 날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야 그렇지. 예전처럼 개인교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소피아 대사제랑 단둘이 남아있어봤자 할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하아. 그래. 일단 나도 여신님의 사자고. 역시 가서 인사정도는 드리고 와야겠지?

    아니. 교황님을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전부터 느껴졌던 교황님의 묘한 압박감의 이유도 이제는 알게 된 거니까 말이다.

    아니. 반대로 알게 됐기 때문에 얼굴을 맞대고 조금 거북해진 건가.

    마틸다의 친할머니라니. 나한테는 그러니까…처조모님이 되는 거잖아?

    "하아. 여신님의 사자가 교황님을 뵙기를 어려워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에요."

    내 표정을 보고 내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건지, 마틸다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살짝 황당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교황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네 할머니라서 그런 건데.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면 어떻게 해."

    그런 마틸다에게 나는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런 내 변명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당신이라면…읏! 아, 알겠어요.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마틸다는 살짝 시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는 더 이상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듯이 뒤로 홱 돌아버렸다.

    "정말로?"

    잠깐 꾸물대기는 했어도 가기는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틸다가 그렇게 말하는 건 살짝 의외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틸다의 중얼거림에, 나는 왜 마틸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어차피 여신님의 사자로서 교황님께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같이 오면 제가…아, 아무튼 교황님께는 저 혼자 인사드리고 올게요."

    이 녀석. 교황님이랑 대화하다가 핑크빛 모드라도 되어버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곤란하기는 하겠지만.

    게다가 마틸다뿐만 아니라 나도 상당히 곤란해진다.

    처조모님 앞에서 알콩달콩 끈적끈적하게 서로 엉겨붙다니. 그게 무슨 벌칙게임이야.

    "그, 그래. 그럼 교황님께 안부인사 전해줘."

    "네. 자, 레이아씨. 가죠."

    "앗, 네. 그럼 구원씨. 다녀올게요."

    "응. 같이 못가줘서 미안해."

    "후훗. 아니에요. 다 이해하는 걸요."

    내가 다시 한 번 마차에서 했던 것과 같은 요지의 사과를 하자, 레이아는 포근하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해주고는 내 품에 살짝 기대듯 안겨왔다.

    마치 깃털처럼 사뿐하게, 하지만 가슴팍을 눌러오는 거대한 두 개의 봉우리의 감각만큼은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그 감각에, 나는 천국을 노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뻗어서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고는, 숨결로 부드럽게 귀를 간질이듯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구원씨를 독차지할 수 있는 날이니까요."

    살짝 요염한 느낌까지 감도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내 품에서 멀어진 레이아의 얼굴은, 역시나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웠던 건지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응. 다녀와."

    그런 레이아의 표정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나는 여기가 소피아 대사제의 방이라는 것도 잊고 그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줬다.

    "후훗. 네. 다녀올게요."

    뭐, 레이아의 꼬리가 기분 좋다는 듯 좌우로 살랑거리는 걸 보니, 조금 부끄럽기는 했어도 후회는 되지 않았지만.

    "……."

    "아니. 마틸다. 넌 내가 키스해주면 어떻게 될지 너도 잘 알잖아. 다녀오고 나서는 싫다고 해도 억지로 듬뿍해줄 테니까 우선 다녀와."

    그리고 나와 레이아의 그런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마틸다에게, 나는 그렇게 안심을 시켜줬다.

    딱히 레이아가 더 좋아서 레이아한테만 키스해준 게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뭐, 핑크빛 모드가 아닌 마틸다는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지만.

    "저, 전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자, 레이아씨. 인사 끝났으면 가죠!"

    "앗, 네엣! 그럼 구원씨, 다녀올게요!"

    또 저런다. 부럽다는 표정 짓고 있었으면서.

    아무튼 레이아와 마틸다는 그렇게 순식간에 방을 나섰다.

    그래서 이 방에는, 나와 소피아 대사제 둘만 남게 됐다.

    "여전히 사이가 좋아보이는군요."

    그리고 날 향해 그렇게 말하는 소피아 대사제의 표정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한없이 흐뭇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소피아 대사제의 앞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새삼 자각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도 나한테는 장모님 뻘이잖아.

    아니. 장모님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젊고, 레이아의 친부모인 것도 아니지만.

    제길. 교황님의 압박감이 너무 강해서 잊고 있었어.

    게다가 소피아 대사제는 오래 알고 지낸데다가 개인 교습까지 받기도 해서 편해진 상태였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아무리 교황님보다는 편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저 표정은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에 와서는 자상한 성격이란 걸 알지만, 처음에는 깐깐해 보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는 인상의 소피아 대사제라서 더더욱.

    "…저, 소피아 대사제?"

    "네?"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니요. 제쪽에서는 전혀."

    일단 아무 말이라도 해보려고 운을 떼봤지만, 소피아 대사제는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짓고 날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 그만둬주세요!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얼굴가죽이 두꺼운 나라도 그렇게 바라보면 쪽팔려지잖아요!

    아니. 그보다 소피아 대사제쪽에선 전혀라니! 그럼 제가 할 말은 있다는 거예요?!

    대체 뭘 원하는 거에요? 레이아와의 알콩달콩한 에피소드라도 늘어놓길 바라는 거예요? 저 그런 거 못한다고요!

    "아, 아아! 그러고 보니 통신 마법 장치에까지 가던 도중 마틸다가 남자 사제라도 만나게 되면 큰일이잖아! 저도 이만 가봐야할 것 같아요! 안녕히계세요!"

    결국 소피아 대사제의 무언의 압박을 나는 누가 봐도 변명처럼 들리는 말을 그렇게 내뱉고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소피아 대사제도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는 듯,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날 보내줬다.

    도중까지 같이 간다고했지만, 통신마법이 설치되어있는 곳과 빈민가에서 쓸 약초같은 것을 보관해둔 곳은 상당히 방향이 달랐다.

    때문에 내가 뒤를 쫓아갔을 때는 이미 레이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어차피 마틸다를 바래다준다는 변명으로 나왔으니까 상관없지만.

    "마틸다!"

    "꺄악! 다, 당신! 갑자기 뭔가요? 놀랐잖아요!"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내가 이름을 부르며 등을 톡 건드리자 마틸다는 흠칫하고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위험하니까 바래다줄게."

    "네에…으으읏! 그러니까 괜찮다고요. 남성 사제들은 특히 제 저주를 잘 알고 조심하니까요."

    뭐, 그러고 나서 곧장 핑크빛 모드가 될뻔했지만 말이다.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얘 유독 잘 참네.

    역시 추기경님인만큼 신전 안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건가.

    아니.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해서 저주의 영향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도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아니. 그래도."

    "그리고 거기까지 같이 가서 당신만 교황님께 인사를 안드리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럴거면 저하고 같이 인사라도 하시죠?"

    아니. 그러니까 교황님…처조모님은 조금 만나기가….

    게다가 저쪽에서는 기껏 여신님의 사자로 인정까지 해줬는데, 그 놈팡이는 추기경이자 자기 소중한 손녀를 고작 첩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있는 거니까.

    "…전 저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정말로 당신도….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는데."

    내 대답에, 마틸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혼자서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그렇게 복도에서 홀로 남겨진 나는,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벽에 기대서서 멍하니 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맵에는 신전 내부의 모습이 마치 설계도처럼 정확히 나오고 있었다.

    그래. 맨처음 신전에 왔을 때 건물 내부까지는 맵으로 표시되지 않아서 길을 잃었던 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원래 마을에서는 세부지도가 아니라 커다란 마을전경만 표시되던 맵이었지만, 어느샌가 이렇게 건물내부구조까지 볼 수 있게 됐다.

    뭐, 덕분에 어젯밤에도 위를 본 상태로도 저택에서 이동할 수 있었던 거지만.

    나도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다만 마을에 있던 도중에 갑자기 이렇게 맵기능이 늘어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도 금방 눈치를 챘을 테니까.

    던전에 다녀오고 나서 언젠가부터 이렇게 건물내부의 구조도 볼 수 있게 됐다.

    즉, 맵 기능이 확장된 건 레벨보다 직업레벨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추측을 토대로, 난 아마 내 맵기능이 모험가 레벨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남들과 마찬가지로 길드에 등록을 해서 얻은 직업이지만, 처음부터 내 모험가 직업은 다른 애들과 뭔가 느낌이 달랐으니까 말이다.

    애널라이즈도 그렇고, 도축도 그렇고.

    다른 모험가들은 경험을 통해서 상대방의 레벨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게 되거나, 대략적인 마석의 위치를 알게되는 것과 달리, 나는 아예 대놓고 스킬로 그런 능력이 있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맵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숙련된 모험가들은 굳이 맵퍼가 아니더라도 한 번 지나간 길은 기억에서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모험가의 능력을 아예 맵능력으로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진단 말이지.

    굳이 스킬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게임에서는 맵이 기본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적용됐다고 생각하면 대충 설명이 된다.

    뭐, 굳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서 원인을 파고들려고 할 필요 없이, 그냥 편한 능력이 더 편해진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얘기지만 말이야.

    이제는 한참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얘기지만, 내 안에 잠자고 있는 게이머로서의 본능이 이런 걸 그냥 넘어가게 두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맵을 보고 있던 도중, 나는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 여기서 마차가 있는 곳까지 그다지 멀지 않잖아?

    아니. 멀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붙어있잖아.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확인삼아 복도를 나아가서 창문 너머를 보니, 역시나 거기엔 우리가 타고온 마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부석에는 우리의 수퍼 집사님이 땡볕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마부석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직접 나가는 문이 있는 것도 아니라, 지금 저기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굳이 정문으로 들어와서 인파를 뚫고 올 것도 없이, 그냥 여기를 통해서 왔을 거다.

    하지만 이 창문, 사람 하나가 통과하기에는 충분한 크기란 말이지.

    아니. 물론 내가 도둑놈도 아니고, 여신님의 사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품위없게 창문을 넘어서 저기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하물며 딱히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그것도 마틸다가 돌아오면 다시 여기로 와야되는데.

    그런데도 창문을 넘어서 저기로 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바넷사 쟤 진짜 미동도 안하네.

    실은 눈뜨고 자고 있는 거 아냐?

    눈앞에서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서 확인해보고 싶다.

    하지만 여신님의 사자로서…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품위같은 거 따졌다고!

    나는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을 너머서 마차로 달려갔다.

    "마차 안에 들어가 있기라도 하지 거기서 뭐하냐. 살 탄다. 하긴, 너 같이 집에만 있는 애는 가끔 햇볕도 쬐어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구원님. 여신님의 사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신전 창문을 넘어다니지 마십시오."

    역시나라고 할까, 바넷사는 눈뜬 채로 자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창문을 넘어서 탈출하는 모습까지 똑똑하게 봐버린 모양이었다.

    "어? 봤어? 일단 넘을 때 은신은 썼는데."

    "그래서 더 수상했습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화에서 언급한 꿈은 662화에서 꾼 꿈을 말하는 겁니다.

    그 꿈 때문에 구원이 최대한 빨리 다시 던전에 가자고 얘기까지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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