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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77화 (66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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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아마 바넷사는 나와 방금 전에 나눈 대화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 마차를 몰겠다고 나선 것이겠지.

    때문에 대화를 마친 지금에 이르러서는 굳이 바넷사가 마차를 몰 필요가 없어졌다는 얘기가 되지만, 아무래도 바넷사는 한 번 하겠다고 나선 일에는 끝까지 책임을 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바넷사가 모는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향하게 됐다.

    "왠지 이렇게 같이 신전에 가는 건 무척 오랜만인 것같아요."

    내 옆자리에 앉은 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짓고는 내 한쪽 팔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끼우듯이 포근하게 끌어안아줬다.

    내쪽으로 기대어 앉아있는 자세 때문에 엉덩이도 살짝 기울어지게 됐고, 그 엉덩이 부분에서 옆으로 길게 늘어진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보니 상당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다만 나는 그렇게 좋아하는 레이아의 얼굴을 보며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레이아가 내 죄책감을 자극하려고 저런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같이 신전에 가는 게 오랜만이라고 느끼게 한 것 자체가 내 잘못이니까 말이다.

    "미안해. 원래는 고아원에도 항상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나는 언젠가 했던 말을 어느샌가부터 지키지 않게 된 걸 사과했다.

    물론 그때 그렇게 말한 이유는 고아원에 레이아를 노리는 불한당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불한당은 이제와서는 모든 것에 해탈한 수도승처럼 되어버렸으니 내가 항상 따라갈 필요가 없어진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이아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거니까.

    내심 날 원망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 아뇨. 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물론 우리 천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자신이 오해살만할 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것처럼 내게 사과를 해왔다.

    하여간 천사님은 너무 착하셔서 문제라니까.

    "아니. 레이아가 사과할 필요 전혀 없어. 요즘 내가 낮에 어울려주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미안해."

    고아원에 꼬박꼬박 같이 다니지 않게 된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다.

    실비아, 마틸다, 레이첼 누님, 바네사. 그리고 덤으로 펠리시아까지 챙기게 되다보니, 최근에는 위로 올라오면 낮동안에는 거의 대부분 원래의 세명이 아닌 다른 여자들하고만 보내게 되어버렸다.

    물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밤에는 셋하고만 번갈아가며 지내는 걸로 일단 커버는 하고 있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위에 있는 기간을 더 늘려서 느긋하게 지내면 낮동안에도 사라나 디아나, 레이아와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알고도, 나는 이제부터는 좀 더 느긋하게 던전탐험을 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전에 봤던 그 꿈이 아무래도 걸렸기 때문이다.

    그 꿈, 아무리 생각해봐도 플래그란 말이지.

    물론 개꿈이라고 말해버리면 그걸로 끝날 시답잖은 꿈일 수도 있다.

    나한테 예지몽 능력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플래그라는 것도 결국 창작물에서나 통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버리기에는 내 현재 상황이 너무 특수했다.

    애초에 게임과 같은 세계로 날아와서 여신님의 사자가 된다는 경험 자체가 창작물에나 나올법한 상황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 꿈을 개꿈이라고 생각하면서 던전을 공략하며 힘을 기르는 걸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구원씨…. 아니에요. 구원씨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그 무게감은 다름아닌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여신님을 모시는 사제로서, 그리고 구원씨의 여자로서요."

    꿈이나 사명에 관한 얘기는 전혀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레이아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끌어안고 있던 내 팔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손끝만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마지막에는 내 손을 꽉 꽉지를 껴서 마주잡았다.

    "그러니까 전 가끔 이렇게 구원씨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마치 뇌속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귓가를 간질이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뭔가 구원받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신님의 사자로서의 사명이 아니라, 내가 여자를 너무 무분별하게 늘려서 바빠진 것부터 지적해야 정상일텐데.

    그런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 점에서, 레이아의 상냥함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레이아…."

    "구원씨…."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레이아와 똑바로 마주봤고, 레이아 역시도 내 두 눈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마주바라봐줬다.

    우리의 얼굴 사이의 거리는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져갔고….

    "…제 저주 상태가 심해졌을 때 주변 사람의 기분이 이런 거군요."

    레이아와 나의 입술이 마주치기 직전, 정면에 앉아있던 마틸다의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야. 마틸다. 이건 너무하잖아.

    아니. 그야 물론 너 따돌리고 우리끼리 둘만의 세계에 빠진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지 않냐.

    "마틸다 추기경니임…."

    레이아도 나와 완전히 같은 심정이었는지, 정말 드물게도 살짝 원망하는 것 같은 시선을 마틸다에게 보냈다.

    "앗, 미, 미안해요. 두 분의 방해를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도 모르게."

    나와 레이아의 원망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마틸다는, 일단 자기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닌 모양인지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왔다.

    뭐, 마틸다가 그렇게까지 짓궂은 성격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애초에 네가 핑크빛 모드가 됐을 때 주변 사람의 기분은 그정도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물론 나는 마틸다와 달리 짓궂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마틸다를 괴롭히기로 했다.

    아니. 괴롭힌다는 표현은 이상하군. 이것도 나름 애정표현의 한가지 방식이지.

    "무, 무슨 뜻이시죠?"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뜻이야.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비교해볼래?"

    "저, 적어도 신전에 다녀올 때까지는 그만두세요!"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이동이 원활하도록 가장 작은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지만, 그래도 디아나 소유의 마차다.

    가장 작은 크기라고 해도 셋이서 나란히 앉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틸다가 내 옆이 아니라 이렇게 혼자 정면 자리에 앉아있는 건, 사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아닌 마틸다 자신의 요청이었다.

    마틸다 자신도 요즘 자신의 핑크빛 모드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건지, 추기경인 자신이 신전에서 너무 칠칠맞은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되도록 핑크빛 모드가 될 상황은 피해달라고 부탁해온 거다.

    아직 신전에 도착하기 전이기는 하지만, 마차에서 핑크빛 모드가 되어버리면 신전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자신이 없다나.

    그런 것 치고는 의외로 정말 필요할 땐 핑크빛 모드가 바로 풀려버리는 이미지가 있는데 말이야.

    던전 탐험을 할 때에도 마틸다의 핑크빛 모드가 방해된 적은 없었고.

    "다녀와선 듬뿍 해달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지?"

    "그야 물론 당신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정말! 그러니까 그만 두세요!"

    내 짓궂은 말마저도 달콤하게 들린 건지, 마틸다는 살짝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다잡으며 날 매도했다.

    최근들어서 마틸다가 저렇게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보니, 솔직히 말해서 조금 즐거웠다.

    아니. 이러니까 내가 얘를 처음 만났을 때, 오만한 귀족 아가씨 같다고 생각했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잖아.

    "뭐, 어차피 다녀오면 저주를 풀 거니까 좋든 싫든 핑크빛 모드인 채로 쭉 있게 될 거지만."

    때문에 나는 마틸다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한 손의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들고, 나머지 손의 검지를 세워서 그 고리에 쑤시는 짓궂은 제스처까지 보였다.

    "신성한 행위를 그런 파렴치한 행동으로 표현하아앙…. 으읏!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당연하게도 마틸다는 얼굴을 붉히며 두손을 뻗어서 불건전한 제스처를 그만두게 만들었다.

    다만, 그러는 도중 마틸다는 내 두 손을 붙잡게 되어버렸고, 자기도 모르게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리고는 손바닥…이 아니라 한데 모은 손가락 끝으로 착착하고 내 손을 때렸다.

    손바닥 전체가 닿으면 또 핑크빛 모드가 시동이 걸릴까봐 무섭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의외로 핑크빛 모드를 잘 컨트롤하고 있단 말이지.

    게다가 저주는 점점 풀려가고 있는데도 핑크빛 모드가 되었을 때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도 그렇고.

    진짜 저주 때문에 저러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 몸에 새겨진 지독한 저주의 흔적을 직접 본 이상,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바넷사. 오늘은 너도 같이 안에 들어가는 게 어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차 안에서 흐뭇한 시간을 보내며 신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바넷사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아침에 느꼈던 바넷사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사실을 마차를 타고 오면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바넷사는 우리의 즐거운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 한 거니까.

    나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이렇게 스스로 마차를 모는 것일 가능성조차 있는데, 그렇게 대한 건 너무 미안했다.

    뭐, 그러면서도 결국 오는 동안 바넷사에게 말을 걸지 못했던 나도 나지만.

    아니. 사람이 붐비는 곳을 마차로 지나가는 거다 보니, 방해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침에 그런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그렇게 신경을 써주면 바넷사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요. 바넷사씨. 모처럼 신전에 오셨으니, 같이 여신님께 기도라도 드리는 건 어떤가요?"

    그리고 내 그런 감정까지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레이아까지도 그렇게 말하며 내 지원사격을 해줬다.

    역시 우리 천사님이야.

    "…아뇨. 저는 여기서 마차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게 미안한 건지, 아니면 사제가 같이 기도를 올리자고 제안하는 것을 거절하는 게 미안한 건지 평소보다 살짝 유감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신전에는 성과 달리 마차들을 관리하는 인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바넷사를 꼬드겨보려고 했지만, 바넷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냐."

    "…네. 죄송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고개까지 숙이는 바넷사를 억지로 끌고갈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하는 수없이 레이아와 마틸다만 데리고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신전안의 사람의 물결로 빽빽하게 채워져있었다.

    물론 여기만큼 날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없기 때문에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서로 밀치며 길을 터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역시나 한계는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냐 하면, 결국 우리는 서로 딱 달라붙어서 길을 뚫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뭐, 안 그래도 마틸다는 다른 남자들한테 시선도 주지않게 하기 위해서, 옆구리에 꽉 끼고 갈 생각이었지만.

    "하아아…당시이인…. 음…쪽. 당시인…당시인."

    즉, 다시 말해서, 마틸다의 마차에서의 노력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얘기다.

    뭐, 다른 놈한테 괜히 시선을 줬다가 핑크빛 모드가 되어버리는 것보다야, 이렇게 나한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게 백배천배 낫지만.

    "휴우, 다 왔다. 야. 마틸다 다 왔으니까 이제 정신…으읍."

    그리고 겨우 길을 뚫고 사제들이 머무르는 구역까지 도착한 후, 마틸다의 핑크빛 모드를 멈추기 위해서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내 입술이 마틸다의 입술에 막아졌다.

    "하음…쪽. 아음…."

    이 녀석, 신전 안에서 칠칠 맞은 모습은 보이기 싫다고 한 주제에 지금 혀까지 넣었어.

    "아응! 당신도 차암…."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온 혀에 나는 반사적으로 마틸다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게 됐고, 그런 내 손길에 마틸다는 섹시한 콧소리를 흘리며 몸을 더더욱 내게 밀착시켰다.

    "…마틸다 추기경님. 이런 느낌이에요."

    "…엣? 핫?!"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내 반대쪽 옆구리에 안겨있던 레이아가 그렇게 말한 후에야, 마틸다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내게서 떨어졌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마차에서 자기가 한 말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덕분에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당신! 당신까지 그렇게 열렬히 키스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마틸다는 상당히 부끄러웠던 건지, 괜히 나한테 화풀이까지 했다.

    아니. 괜히는 아닌가. 나는 제정신으로 키스를 받아준 거니까.

    "네가 키스를 하는데 그걸 또 어떻게 안받아주냐."

    "당시인…그, 그러니까 그런 걸 그만 두시라고요!"

    마틸다는 살짝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면서, 나와 한발자국 떨어져서 걷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인파를 통과한 우리는, 일단 먼저 소피아 대사제의 방에 향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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