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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76화 (66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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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그렇게 날 벽으로 몰아넣은 채, 바넷사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날 지그시 바라봤다.

    안그래도 묘하게 위압감 있는 그 얼굴은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니 더더욱 박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박력있는 무표정을 바라본 순간, 나는 바넷사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오히려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할 정도다. 바넷사가 갑자기 이렇게 나올 이유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래. 그럼 그렇지. 바넷사가 모르고 넘어갔을 거란 건 너무 희망에 찬 생각이었지.

    그럼 역시 아침에 그것도 디아나를 배려해서 연기를 했다는 건가.

    아니. 나도 식사 전 레이아의 모습을 보고 저게 연기라고 주장하느니 차라리 바넷사의 아침 행동이 연기라고 주장하는 게 더 그럴듯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야. 설마 진짜였냐고.

    심지어 디아나까지도 바넷사가 진짜로 모르고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는데.

    과연 슈퍼집사님. 완벽하시다.

    나는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지금부터 튀어나올 바넷사의 매도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예상했던 바넷사의 매도는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넷사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가 바넷사의 벽쿵에 얼마나 당황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바넷사의 이 표정을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바넷사의 표정이 무표정이기는 해도, 평소처럼 완벽한 철가면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눈동자는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입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 벌어졌다가 아무 말도 내뱉지 않고 다시 굳게 닫혀버리길 반복하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은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바넷…."

    "…전 지금 집사입니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정적만이 흐르는 시간이 꽤나 오래 지속됐다.

    그리고 결국 참을 수 없게 된 내가 뭐라도 먼저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드디어 바넷사의 입이 열렸다.

    "아, 네. 그야 그렇죠."

    숨쉬기 힘든 정적이 깨진 건 좋았지만, 나는 바넷사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자기는 지금 집사라니?

    저 말은 내가 일하는 중에 같이 놀자고 꼬득이면 나오는 단골 대사잖아?

    뭐야? 나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슬쩍 얘한테 추파를 던졌나?

    아니. 그보다 디아나랑 어젯밤에 했던 일을 따지려는 거 아니었어?

    내가 바넷사가 한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 때, 말 한 마디만 내뱉고 잠시 숨을 고른 바넷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말은 결코 당신의 여자로서, 질투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의 여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부분까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전 디아나님의 집사. 어디까지나 디아나님의 집사로서, 디아나님을 위해서, 말해야겠습니다."

    마치 자기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빠르게 내뱉은 후, 바넷사는 푸욱하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아까 전보다 더 눈에 힘을 줘서 찌릿하고 날 노려봤다.

    "지나친 행위는 행위는 삼가하…되도록 자제하십시오."

    그리고 겨우 내뱉은 말은, 역시나 처음 벽쾅에 당했을 때 내가 예상했던 그 말이었다.

    아차. 역시나 들켜버린 건가.

    가만히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던 시간이 꽤나 길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마음의 준비를 끝냈던 나는 바넷사의 그 말을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예 하지 말라고는 말 못하고 자제하라고 바꿔말하는 바넷사에게 귀엽다는 감상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뭐, 마음의 준비라고 해도, 들켜버린 건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와 비슷한 심정이었지만.

    "말해두는데, 일단은 디아나랑 합의하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일단 스스로의 변호를 겸해서 얘기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디아나를 위해서 말해야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뭔가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짓을 억지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기우였는지, 바넷사는 얼굴을 희미하게 상기시키면서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줬다.

    그 얼굴은 마치 ‘말 안해도 알고 있으니까 대놓고 그런 부끄러운 얘기 하지 마십시오!’ 라고 오히려 자기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꽤나 귀여웠다.

    "아, 응. 믿어줘서 고마워."

    "큿…구원님을 믿은 게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디아나님을…."

    그렇게까지 믿어주니까 살짝 부끄러워지잖냐.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전하자, 바넷사는 짧게 침음성을 흘리더니 다시 냉정한 말투로 돌아와서는 그렇게 변명했다.

    하지만 냉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내뱉고있는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너 자기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냐? 억지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런 짓을 억지로 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어. 설마 디아나가 주도해서 억지로 했다고 생각한 건 아닐 거 아냐?"

    "크윽…."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바넷사는 아까보다 조금 더 얼굴을 붉히고는, 내 얼굴 옆에서 벽을 짚고 있던 손을 꽈악하고 쥐어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나 겉보기만 냉정하게 보일뿐, 실은 그렇게까지 냉정한 상태인건 아닌 모양이다.

    뭐, 남의 성생활을, 그것도 자기 남자와 자기 주인님의 변태적인 성생활을 지적하고 있는 거다.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거겠지만.

    "하지만 우리가 서로 합의하에 한 거란 걸 알고 있었다면, 나만 혼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디아나도 같이 불러서 혼내야지."

    "디아나님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난 되고?"

    그야 물론 내가 주인님은 아니지만, 주인님의 낭군님이잖아.

    내 여자로서 말하는 거라면 모를까, 집사로서 말하는 거라면 나한테도 그런 얘기는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아?

    "읏…!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되묻는 바넷사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딱히 질투하는 거라고 해도 상관 없는데. 아니. 질투하는 거라고 해주면 오히려 더 기쁜데."

    "큭…그,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바넷사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여전히 자세는 바넷사가 날 사이에 끼우고 벽쾅을 하고 있는 자세였지만, 주도권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가 한 손을 올려서 바넷사의 뺨을 살짝 쓰다듬자 바넷사는 그 손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목소리를 살짝 떨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바넷사의 이런 태도가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바넷사는 집사일 때와 내 여자일 때를 확실히 구분할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을 파헤쳐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바넷사는 집사일 때는 확실히 내 여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여자일 때 디아나의 집사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디아나에게 막나가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바넷사는 여자일 때조차도 자신이 디아나의 집사라는 생각에 너무 구애되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는 건, 디아나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따르고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바넷사의 생각이 조금은 약해져가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만족스런 미소를 짓게 됐지만, 아무래도 바넷사의 눈에는 내 미소가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바넷사는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내 손을 이제야 탁 쳐내고는, 여전히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앞으로는 자제하십시오! 만약 저 외의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면 어쩔 셈이었습니까!"

    역시 우리 철혈 집사님.

    설마 얘기의 흐름을 강제로 원래대로 바꿔버리려 하다니.

    완전히 냉정한 상태가 아닌 와중에도 내가 은근슬쩍 얘기를 이상한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챈 건가.

    쳇. 이대로 얼렁뚱땅 얼버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야 들키기 전에 마법을 쓸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레이아를 만난다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 덕분에, 우리 귀여운 변태 디아나씨가 너무 흥분해서 마법을 못썼어.

    물론 아무리 바넷사가 상대라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흐릴 수 밖에 없다.

    "그보다 그렇게 말한다는 건, 어제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은 결국 눈치 못 챘다는 거네? 실은 중간에 메이드를 한명 만났었는데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잘 얼버무렸습니다."

    "어떻게?"

    "상급 물의 정령 소환 중 실수로 제어를 벗어나 날뛰었다고 둘러댔습니다."

    와 머리 좋다.

    바넷사의 말을 듣고,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그런 변명이라면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 것도, 상들리에가 흔들린 것도,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복도에 물방울들이 떨어져있는 것도 전부 변명가능하다.

    응? 잠깐만. 그럼 얘는 설마 복도에 물방울들이 떨어져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 그 이전에, 저런 변명이 통하려면 바넷사가 처음부터 근처에 있어야 앞뒤가 맞지 않아?

    바넷사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는데, 소환한 정령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날뛰고 있었다고 변명하면 이상하잖아.

    "야. 그 얘기는 다시 말해서…."

    "상들리에 누군가 올라타는 게 수상해서 확인차 가던 중 마주친 것뿐입니다!"

    이번에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미리 눈치 챈 듯, 바넷사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그렇게 변명했다.

    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바넷사 얘는 저택 안 사람들의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뭐, 내가 은신을 썼을 때 누구인지 모르고 팔을 꺾은 걸 생각보면 완벽하게 신원까지 파악하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아무튼 그런 바넷사니, 정말로 누군가 상들리에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수상히 여겨서 우리쪽으로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바넷사가 근처에 있었던 거라면….

    아니. 그런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바넷사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어제 내 방에 가면서 흘렸던 디아나의 애액은 전부 바넷사가 뒤처리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나는 바넷사가 디아나라는 절대적인 존재의 성관계에 간섭하는 모양새가 되면서까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바넷사를 엄청나게 안고싶어졌다.

    "아무튼 얘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디아나님의 평판과도 관련된 일입니다. 앞으로는 자제하십시오."

    하지만 내가 그 몸을 껴안는 것보다, 바넷사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해서 숨을 고르고 살짝 상기된 뺨만 제외하면 겉보기에는 다시 완벽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마차를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벽쾅까지 한 것 치고는 상당히 어중간한 설교로 끝난 것 까지 겹쳐져서, 내 눈에는 그 뒷모습이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이상 얘기를 하고 있으면 자기한테 불리한 얘기가 나올 것 같아 도망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멀어져가는 바넷사의 뒷모습을 황급히 쫓아가서는, 뒤에서부터 꽉 껴안아줬다.

    본의아니게 뒤처리를 시킨 미안함과, 상대가 그 디아나임에도 불구하고 질투해주는 데에서 오는 기쁨과 기특함. 여러 감정이 복합된 마음을 담아서.

    "크읏! 제 얘기를 제대로 들은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짓은…."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그러자 바넷사는 뭔가 울컥하는 느낌으로 외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팔에 힘을 더 줘서 그 몸을 더더욱 꼬옥하고 껴안았다.

    "읏…!"

    내 목소리가 꽤나 진지했기 때문인지, 바넷사는 낮은 침음성과 함께 행동을 정지했다.

    그렇게 바넷사의 몸을 꽉 껴안은 상태에서 몇분인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바넷사에게서 떨어졌다.

    "그럼 이제 진짜로 마차에 갈까. 자칫하면 우리가 레이아나 마틸다보다 늦겠다."

    "…네."

    방금 전 포옹으로 내 감정이 전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넷사는 방금 전 포옹의 의미를 묻는 일 없이, 내 말에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해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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