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
4계층 답파
실비아의 방에서 빠져나온 나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식사를 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내가 급하다고 해도, 디아나까지 끼니를 거르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어?
"오, 자네 왔는…무, 무슨 일인가?"
하던 일을 잘 끝마친 건지, 디아나는 나보다 먼저 식당에 와있었다.
날 보고 왠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려했던 디아나였지만, 어째선지 당황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뭐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디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쪽을 가리고는 살짝 등을 돌리듯 몸을 뒤로 빼며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 그것이…이, 이 몸을 갑자기 방에 끌고 가려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게지?"
그리고 날 치켜올려보며 그렇게 말하는 디아나를 보고 나서야, 나는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시간관계상 실비아와의 행위에서 완전히 만족하지 못해서 아직 몸이 달아올라있다는 게 겉으로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특히 디아나는 전에도 이런 상태의 나한테 그대로 끌려가서 일을 치른 경험이 있으니 더더욱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
그때처럼 이성을 잃고 흥분해있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때는 한나의 몸을 주물럭거리기만 하고 발산을 못했기 때문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디아나를 방으로 끌고건 거였지만, 지금은 충분히 못했다 뿐이지 나도 발산을 하고 온 거니까.
하지만 모처럼 디아나가 저런 오해를 하고 있는 거다. 그 오해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
전에 끌고 갔을 때도 상당히 귀여운 반응을 보여줬었으니까 말이야!
뭐, 그땐 노출증을 자극했던 게 제일 영향이 컸겠지만.
"간다. 지금. 방으로. 당장."
나는 마치 성욕에 지배되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사람처럼, 말까지 뚝뚝 끊어가며 로봇처럼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고."
하지만 그런 내 옆구리를 향해, 뒤에서부터 날카로운 꼬집기 공격이 들어왔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옆구리를 꼬집는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크윽. 어째서냐! 완벽한 연기였을 텐데!"
나는 옆구리에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날 냉정하게 내려다보며, 사라는 한층 더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완벽하기는.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구원 연기 엄청 못하거든?"
…뭐, 라고?
"그,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도 아니잖아? 어차피 연기 조금 못한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충격받은 내 표정이 상당히 임팩트있었던 모양인지, 사라는 곧장 얼버무리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게 그런 사라의 위로 아닌 위로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니 사라를 올려다보기만했다.
"미안하다니까. 알았어! 연기 잘 하니까! 응?!"
내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사라도 조금 초조해진 건지,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사과를 해왔다.
물론, 나는 그 정도로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내 연기력을 비웃다니.
사라의 아름다운 다리에 절로 시선이 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용서 못해."
"뭐, 뭐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메이드복으로 갈아입고…."
"이게 진짜! 앞으로 절대! 평생! 안 할 거거든!"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사라는 지금 내 그 모습도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훗. 어떠냐. 이게 바로 네가 무시했던 내 연기력이라고.
"야! 평생은 너무 하잖아!"
"하나도 안 너무하거든! 이 변태!"
식당에 들어와서 내 옆구리를 꼬집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정됐던 사라는, 다시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는지 삐진 표정을 새빨갛게 붉힌 채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취중진담이라고 너도 실은 좋아…."
이대로 평생 메이드 플레이를 못하게 될 순 없어!
뭐, 결국 나중에 부탁하면 또 못마땅한 척 하면서도 해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말을 이어가려고 했을 때, 우리 말다툼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코홈! 코홈!"
바로 어느샌가 얘기에서 소외된 디아나였다.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나는 황급히 아까 하던 말을 다시 했다.
"아, 그래. 디아나. 말하던 도중에 미안. 그럼 다시 한 번. 간다. 방으로. 당장."
"안 갈 걸세!"
결국 디아나한테 딱콩을 한 대 맞고 나서야, 우리는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됐다.
"디아나. 간다. 방으로. 당장."
그리고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디아나에게 다가가서 일으켜세웠다.
"또 그건가."
아니. 질린 표정 짓지 말고.
이래 봬도 살짝 진지하다니까? 진짜로 조금 급해.
물건도 마나를 돌려서 죽이고 있을 정도라고.
"후우. 어쩔 수 없구먼. 그럼 이 몸들은 먼저 가보겠네."
지금 보채도 디아나가 씻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생각해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보챈 거였는데, 의외로 디아나는 나와 같이 곧장 방으로 향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전 식당에 막 들어왔을 때 미묘하게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던 것 같기도….
공방에서 뭔가 하는 것도 오늘 밤에 관련된 일 같았으니까, 얘도 미리 준비를 하고 왔다는 건가.
"오늘은 이 몸의 방으로 가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그런 내 추측을 뒷받침해주듯, 디아나가 그런 제안을 해왔다.
대체 뭘 준비했길래 방으로 가자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나는 디아나가 말한대로 오늘 밤은 디아나의 방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디아나가 준비한 물건이 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떻게 눈치를 못 채겠어. 방 한구석에서 저렇게 밝게 발광하고 있는데.
저거 대체 뭐야? 마석?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어쩌면 수백개도 될 것 같은 무수한 양의 마석이 어떤 장치안에 빼곡하게 들어가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디아나, 저건?"
"후흐응. 신경쓰지 말게."
내 질문에, 디아나는 어울리지 않게 씨익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신경쓰지 말라고 해도. 무지막지하게 신경쓰이는데.
너 공방에서 준비하던 거 저거였지?
"그런데 자네. 이 몸이 자네에게 선물이 있네."
하지만 내 의문을 뒤로하고, 디아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팔찌 비슷한 물건을 짚어서 내게 건네줬다.
"응. 고마워."
나는 그 물건을 받아서, 곧장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왜, 왜 곧장 집어넣는 겐가아?!"
"응? 아니. 그야…."
누가 봐도 엄청 수상하잖아.
"그러지 말고. 모처럼 이 몸이 선물한 것 아닌가. 응? 어서 꺼내서 차보게. 자, 자아!"
내 표정을 읽은 건지, 디아나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떻게든 내 팔에 팔찌를 채워보려고 노력했다.
역시나 뭔가 꿍꿍이가 있단 말이지.
"아니야. 모처럼 받은 건데. 이렇게 섹스 직전에 흥분한 상태로 별 감흥 없이 차는 것보다는, 나중에 나 혼자 있을 때 감상에 충분히 감상에 젖어가면서 차볼게."
"우으으으…!"
내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에 넣은 팔찌를 꺼내려하지 않자,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 답답한 건지 디아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머리도 좋으니까 조금만 냉정해지면 나같은 건 금방 구워삶을 수 있을 텐데.
뭐, 이런 점이 디아나의 매력이지만.
"누나 말을 못 듣겠다는 겐가!"
아무리 말로 설득하려해도 내가 팔찌를 꺼낼 기색이 없자, 디아나는 삐진 것 같은 얼굴로 살짝 날 노려보더니 갑자기 성장한 모습으로 변신을 시작했다.
야. 옷도 안 벗고 갑자기 변신하지 마라. 옷이 작으니까 꽉 끼게 되어버리고, 무엇보다 속옷이 작은 만큼 여러모로 터져나오려고 해서…절로 눈이 가버리잖아.
"자네. 이 누나의 부탁, 들어줄 수 있겠는가?"
내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디아나는 안 그래도 꽉 끼는 옷 위로 자신의 가슴을 더더욱 모으며 아까보다 한 층 더 여유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마라.
아니. 외모가 완벽하다보니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안하던 짓 해서 어색한 게 눈에 다 보인다고.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단 디아나의 말대로 팔찌를 차보기로 했다.
아니. 딱히 누님버전 디아나의 색기에 넘어간 건 아니고 말이야.
이대로 가면 계속 침대로 못 가고 이대로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쯤되니 디아나가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슬슬 궁금해지기도 했다.
"음! 음! 잘 생각했네!"
그리고 여전히 폴리모프를 풀지 않은 채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를 보며,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까 받은 팔찌를 꺼내 손목에 착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가벼운 현기증이 날 덮쳤다.
이 느낌은…언젠가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데…. 그래, 분명….
곧자로 사태를 파악한 나는, 일단 흘러내려간 상의를 더더욱 잡아 끌어서 한쪽 어깨를 완전히 노출시키고 바닥에 털석 주저앉았다.
"여, 역시 누나는…이런 취향이었던 거야…?"
완전히 흘러내려가 벗겨진 바지에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상의. 거기에 더해 물기어린 시선과 옆으로 주저앉은 자세까지 합쳐지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완전히 위험한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디아나는 지금 평소보다도 더 성장한 모습이다보니 더욱더.
"아, 아닐세! 그런 거 아닐세!"
설마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디아나는 당황해서 양손을 맹렬히 휘저으며 부정했다.
하여간 자기가 해놓고 당황하기는.
"그래서, 갑자기 나한테 이런 걸 채운 목적이 뭔데?"
농담은 그쯤하기로 하고,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아 앉은 후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그래. 전에 카페에서 디아나에게 마법이 걸렸을 때처럼, 난 지금 평소보다 살짝 어려진 모습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이 팔찌는 폴리모프 마법이 걸린 팔찌.
그리고 저기 방구석에 있는 마석들이 담긴 장치는 이 팔찌에 마력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무선 충전기처럼 말이다.
디아나마저도 오래 사용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마력 소모가 큰 마법이니, 이런 식으로 유지시간을 늘린다는 건가.
아니. 발상은 훌륭한데 말이야.
너 마법사 협회 누님들까지 총동원해서 뭐 이런 쓸데없는 걸 만든 거야.
대체 뭘 하려고?
전에 이 모습을 보고 살짝 위험한 상태가 됐던 레이아라면 모를까, 디아나 얘가 진짜로 이런 상태인 나랑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으음. 그, 그게 말일세…. 그냥 조금 살짝 취향을 바꿔서 말일세…."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디아나는 정말로 이 모습인 나와 한 판 하려는 모양이었다.
일단 자기도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건지, 디아나는 나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니. 이 모습으로도 못할 건 없지만…뭐, 조금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훌륭한 녀석이 달려있고.
"취향을 바꿔서 말이지."
"가, 가끔은 괜찮지 않은가! 자네도 평소에 이상한 요구를 많이 하지 않는가!"
내가 냉정하게 중얼거리자, 디아나가 얼굴을 붉히고는 이젠 오히려 정색하며 반론에 나섰다.
"그리고 자네도 좋지 않은가! 자네는 가만히 있게. 이 누나가 어른의 매력을 듬뿍…."
하지만 디아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자기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 말을 통해서, 나는 디아나의 진짜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덤으로 디아나가 최근들어 날 대하는 태도가 살짝 이상했던 이유까지도.
"과연. 그런 거였나."
"뭐, 뭐가 말인가."
"디아나."
"음?"
"거기 앉아봐. 잠깐 얘기좀 하자."
"무, 무슨. 자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지금부터 즐거운 밤을 보내려고 하고 있는데! 자네도 급하지 않은가! 자, 어서 침대로 가서 이 누님에게…."
설마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디아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날 잠자리로 유혹하려 했지만,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앉아."
"히이잉…."
내가 딱딱한 말투로 말하자, 디아나는 폴리모프를 해서 성장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바닥에 앉았다.
그렇게 어려진 상태인 내가 누님 모습이 된 디아나에게 설교를 한다는 기묘한 그림이 완성됐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중간과정을 생략한 겁니다.
바로 디아나가 이어지는데 그걸 다 묘사하면 너무 길어져서요.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