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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63화 (64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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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층 답파

분명 바넷사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다.

설령 지금부터 섹스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같이 데이트나 하러 나가자고 하는 게 훨씬 더 기쁠 거다.

"……."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어째선지 바넷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건 설마….

"바넷사. 일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데이트보다 섹스가 더 좋아? 그런 거라면 나도 거절하지…."

"아닙니닷!"

내가 돌려 말하지 않고 직구로 몸쪽 꽉 찬 공을 던지자, 바넷사가 드물게 언성까지 높여가며 부정했다.

아무리 우리 철가면 집사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역시나 싫은 모양이다.

나도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는데.

"그럼 왜 그러고 있어? 데이트하게 갈아입고 오라니까?"

"…읏! …습니다."

내가 다시 바넷사에게 갈아입고 오라고 말하자, 바넷사는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며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 전에 언성을 높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였지만, 이런 태도 역시도 바넷사 답지 않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응?"

"…그러니까. …없습니다."

없다니.

아니. 잠깐만. 야. 설마.

"…사복이?"

내 질문에, 바넷사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피한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냐. 아니. 일밖에 모르는 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심지어 나도 던전에 다닐 때 입는 갑옷이나 천 옷 말고도 다른 옷들이 있다고.

"너 이렇게 노출도 높은 코스프레 메이드 복장도 가지고 있었던 주제에…."

너무 기가 막혔던 나머지, 나는 어젯밤 플레이에서 잔뜩 이용하고 아직 빨지도 않은 메이드 복을 꺼내서 보여주며 중얼거렸다.

"…읏! 코스프레가 아닙니다! 열대 지방에서의 집사 복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넷사 역시 이 메이드 복이 그런 느낌이 물씬 나는 복장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얘가 지금 이렇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뭐 나한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순간 너무 황당해서 인벤토리에서 이걸 꺼내버렸지만, 자기 옷으로 다른 여자랑 그런 플레이를 잔뜩 즐겼다는 증거를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는 바넷사가 메이드 복에서 어젯밤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에 다시 황급히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집사 복밖에 없으시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데이트를 하려고 했는데 자기 때문에 시작부터 다 망쳤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바넷사는 또 다시 살짝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바넷사와는 달리, 나는 살짝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 철가면 집사가 아까부터 미묘하게나마 계속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해서 내게 자기 마음을 겉으로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거니, 어떻게 보면 전보다 마음이 열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럼 그냥 이대로 갈까?"

"…이대로 말입니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가볍게 말하자, 바넷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래. 어차피 데이트를 옷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어제 약속 잡으면서 데이트 할 거란 얘기를 안 한 내 잘못이고. 무엇보다 나도 값싼 천 옷이나 걸치고 있으니까 남 말 할 처지도 아니잖아?"

사실은 바넷사가 갈아입으러 간 동안에 나도 제대로 된 복장으로 갈아입을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런 얘기를 해서 바넷사의 죄책감을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감사합니다."

물론 내가 그런 얘기를 안 하더라도, 바넷사는 내 배려를 대충 다 눈치 채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과연 집사답게 눈치는 빠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천 옷차림으로 집사 복을 입은 바넷사와 함께 저택을 나오게 됐다.

지금 우리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절대 데이트라고 생각 안 하겠지.

아니. 데이트란 건 우리만 좋으면 되는 거고, 다른 사람의 눈 같은 건 별로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지만 말이야.

그래도 역시, 이건 아니야.

옷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바넷사. 뒤에서 그러지 말고 옆에서 같이 걷는 게 어때? 지금은 집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나는 뒤를 돌아보고 바넷사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저택에서부터 여기까지 쭉. 바넷사는 내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집사의 정 위치라고 불러도 좋을 포지션을 잡은 채 날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바넷사는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하고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지금의 무뚝뚝한 말투는 평소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무뚝뚝해졌다고 해야 할까?

내 옆에서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점은 명확했다.

"데이트답게 팔짱이라도 끼고 갈까?"

"…읏! 아뇨. 그럴 수는…."

"왜 그럴 수는 없는데? 지금은 집사가 아니잖아?"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는 또 다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험해. 난 분명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나 할 생각이었는데, 얠 가지고 노는 게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

지금은 집사가 아니라 내 여자라는 말, 너무 써먹기 좋잖아.

"큿…."

결국 바넷사는 한참동안이나 내 팔을 노려본 끝에, 내 팔을 낚아챘다.

마치 관절기라도 사용하는 것처럼 재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정작 낚아채고 난 다음에는 부드럽게 내 팔을 끌어안는 바넷사.

아, 팔꿈치에 살짝 닿고 있는 가슴 감촉이 부드럽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행동이 부드러웠다는 의미다.

물론 가슴 감촉도 무지 부드러웠지만. 헤헷.

다만, 바넷사는 나와 팔짱을 끼고도 여전히 나와의 거리는 그다지 좁히지를 않았다.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어색해하던 바넷사니까. 아무래도 착 달라붙어서 팔짱까지 끼는 걸 기대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바넷사가 스스로 팔짱을 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건 나 스스로 하기로 했다.

말해두지만, 딱히 저 가슴감촉을 팔 전체로 더 확실히 느끼고 싶어서 그런 건…그런 의도는 아주 조금밖에 없으니까.

"읏…!"

내가 거리를 좁히자, 팔짱 낀 팔 너머로 바넷사의 몸이 다시 움찔하고 떨리는 게 느껴졌다.

생긴 거랑 달리 풋풋한 반응을 보이는 게 꽤나 귀엽잖아.

뭐, 얼굴빛이 살짝 붉어진 걸 제외하면,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럼 갈까?"

"…어디로 말입니까?"

드디어 바넷사와 조금 커플다운 모습을 하게 된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바넷사에게 물었고, 바넷사는 아무래도 진정되지 않는 건지 상당히 안절부절 못하며 반 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어디기는. 그야 당연하잖아?"

그리고 그런 바넷사를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어디인가 하면, 바로 옷가게였다.

사실 나로서도 여기는 그다지 여자와 함께 오고 싶은 곳이 아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바넷사라면, 바넷사라면 혹시 다를지도 몰라.

그런 미약한 기대를 하고, 나는 쇼핑 트라우마를 억누르며 여기까지 발을 옮겼다는 거다.

게다가 서로 이런 차림새로 데이트를 하는 건 조금 그렇잖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겠어?

사람은 차림새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고도 하고. 바넷사도 계속 집사 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다보면 무의식중에 집사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내 미약한 기대는 들어맞았다.

내 의도를 전달받은 바넷사는, 옷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근처에 있던 적당한 옷을 집어 들고는 곧장 계산을 하려 했던 거다.

"크흑! 바넷사! 난 널 믿었다!"

"큿…!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 쿨하고 신속한 쇼핑에 나는 그만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뭐, 갑자기 내게 끌어 안겨진 바넷사는 상당히 당혹스런 모습이었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바넷사.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충 고른 거 아니야?"

감격스러운 건 감격스러운 거고, 지적할 건 지적해야지.

그래도 이왕 데이트에 입고 다닐 옷을 고르는 건데, 너무 대충 고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잖아.

"그렇습니까? 장인이 만든 옷 정도는 아니지만, 값싸고 품질 좋기로 유명한 직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디자인도 유행에 걸맞게 너무 달라붙지 않게 몸을 감싸면서도 허리라인을 은연중에 강조하여 여성미를 살리고…."

그리고 그런 내 질문에, 바넷사는 진지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는 옷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얘가 가사 마스터라는 걸 잊고 있었어.

생각해보면 저택에 수없이 많은 디아나의 옷들.

그걸 다 디아나 스스로 샀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바넷사가 준비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잖아.

한 마디로 옷에 자세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 이것도 적당히 고른 게 아니라, 그 짧은 시간동안에 나름 생각을 해서 골랐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제대로 보니 바넷사가 설명하는 대로 디자인이 꽤나 유려한 옷이었다.

뭐, 난 이 세계 옷의 디자인은 여전히 잘 모르기는 하지만.

"…마음에 안 드신다면 구원님께서 직접 골라보시겠습니까?"

말문이 막혀서 조용히 있는 날 보고 착각을 한 건지, 바넷사가 손에 들었던 옷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며 내 표정을 엿봤다.

"아니. 직접 고르는 건 좀. 난 이런 건 별로 자신 없으니까. 요즘 유행이 뭔지도 모르고."

아니. 원래 세계였다면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나도 벌거벗고 살았던 게 아니니까 말이야. 나름 유행에도 신경 쓰고 했었다고.

그런데 이 세계는 정말로 모르겠어.

어쩔 수 없잖아. 24년동안 패션 감각이 원래 세계에 익숙해져 있었던 거라고.

게다가 여기 오고 나서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핑계로 거의 천 옷만 입고 다니면서 관심을 안 가졌으니까 더더욱 여기 패션 감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바넷사가 꼭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싶다고 한다면…."

"윽!"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자, 바넷사가 뭔가를 직감한 듯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이제 와서 위기를 직감해봤자 늦었다고.

"일단 네가 후보를 고르고 그 중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을 하는 건 어때? 그거라면 둘 다 만족할 만한 옷을 고를 수 있지 않겠어?"

"…그렇군요."

내 타당한 의견에, 바넷사는 괜히 긴장했다는 듯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돌아와서는 내 의견에 수긍했다.

바넷사야.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 않니?

"아, 미리 말해두는데 바지는 안 돼. 하의는 무조건 스커트야. 원피스도 상관없고."

"무…!"

방금 전 고른 옷도 하의가 바지였기 때문에 대충 눈치를 채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바넷사는 바지를 입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내 여자 중에 바지를 고수하는 캐릭터는 사라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심지어 그 사라조차도 디자인을 생각해서 각선미를 살리는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거나, 골반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거나 해서 눈을 즐겁게 해준다고.

그런데 자기 혼자 몸의 라인을 완전히 숨기는 바지를 입으려고 하다니. 그렇게는 못하지.

"내가 원하는 옷을 입어 주는 거잖아? 설마 바지만 고집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치마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도? 데이트인데? 설마 그 정도도 못 해주겠어? 애인사이가 되고 첫! 데이트인데!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

"크윽…!"

내 화려한 설득 스킬로 인해, 결국 바넷사는 날 노려보며 침음성을 흘리고는 홱 돌아서서 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란 건 진심으로 대화를 하면 다 통하게 되어 있다니까.

"…골랐습니다."

그리고 아까보다는 더 오래 가게를 둘러본 끝에, 바넷사는 몇 가지 후보를 제시했다.

당연히 디자인은 각각 달랐지만, 전부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치마 길이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이대로는 왠지 조금 아쉬운데.

평소에 집사 복만 입고다니던 바넷사다 보니, 더욱더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이 보고 싶단 말이지.

어떻게 해서든 좀 더 짧은 치마를 입혀볼 수 없을까?

우선은 생각할 시간을 끌어볼까.

"흠…우선 시착해보는 게 어때? 입은 모습을 봐야 정확히 고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을 끌기로 했고, 바넷사는 내 제안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집사 복을 벗어던진 바넷사의 패션쇼가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드렸던 연참은 낮에 올리겠습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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