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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662화 (64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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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계층 답파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를, 아니.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 같은 압박감.

    저 손이 움직이는 순간 나는 변변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저 손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겠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맞서 싸울 의지마저 잃게 만드는,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끔따끔 아파오고 위액이 넘쳐흐를 것 같은 강렬한 살기.

    그리고 그런 살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압도적인 미모.

    아니. 그 압도적인 미모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살기가 더 피부에 와 닿는 건지도 몰랐다.

    눈앞에 서있는 여성. 마신을 보며 나는 그저 전율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신님. 여신님이 저한테 사기적인 능력을 준 것도 맞고, 감사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대체 무슨 수로 상대하라는 거예요.

    잠시 후면 저 아름다운 여성의 손에 죽을 걸 알면서도, 나는 가만히 마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전투력에서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버리면, 사람은 저항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구나.

    자연히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전투력이 부족해도 성자의 스킬이 있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로는 무적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성자의 스킬도 결국에는 사람이 쓰는 스킬. 진짜 신한테는 통할 리가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저 압도적인 미모는, 마치 그 옛날 이 세계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전성기 디아나의 미모를 봤을 때처럼 내 매력 수치의 보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있는 날 보며, 마신이 입 꼬리를 올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고운 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내 가슴에는 뜨거운 격통이 느껴졌다.

    그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에, 나는 그만 볼썽사납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죽을 땐 죽더라도 추하지 않게, 의연하게 죽자는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으아읏뜨아그아아앗!"

    그리고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어? 어?!

    상황 파악이 안 된다.

    가슴에는 여전히 후끈후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여전히 살기를 띄고 있는 미모의 여성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아까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엔 상대가 마신이 아니라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뿐.

    아니. 어떤 의미로는 마신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났으니 조금쯤은 놀랄 법도 한데, 눈앞의 여성. 사라는 전혀 신경 쓰는 눈빛이 아니었다.

    내 반응에 신경을 쓰기에는, 이미 머릿속이 다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었다.

    "이 변태! 바보! 멍청이!"

    사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손바닥을 내리치며 내 가슴을 찰싹찰싹 때려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똑똑히 전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해해. 원래 취했을 때 기억이 전부 생생하게 기억나면 진짜 죽고 싶어지지.

    특히 취해서 평소에 안 할 것 같은 짓을 잔뜩 하고 난 다음에는 더더욱.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말이야.

    "크학! 사라야! 잠! 아으 따가! 잠깐만! 쿠헉! 잠깐! 진짜로 아픈데요!"

    "몰라! 변태! 이 변태! 이상성욕자!"

    "아니. 이상성욕자는 내가 아니라 너…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라의 손이 마력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정색하며 대답하려던 나는 황급히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라가 내 가슴에 손바닥 자국을 찍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손에 깃들었던 마력은 빼줬으니까 사과가 먹히긴 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결국 지나친 부끄러움에 이성을 상실한 사라를 진정시키는 작업은 바넷사가 올 때까지 계속됐다.

    심지어 그것도 겨우 진정만 됐을 뿐, 식당에 내려올 때까지도 사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하고 꽤나 재미있는 플레이를 많이 했던 사라지만, 역시 자기 의지가 아니라 취해서 그런 플레이를 한 건 파괴력이 컸던 모양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엄청 지쳤다.

    애초에 사라한테 술을 먹인 게 나니까, 전부 자업자득이지만.

    아, 그리고 참고로 사라가 내 가슴에 남긴 손바닥 자국은 이미 다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바닥 자국은 생기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사라가 그 와중에도 삽입은 풀지 않고 있어줬거든. 힐링 섹스 만만세라는 거다.

    "크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내일모레 다시 던전으로 간다!"

    아무튼 그렇게 식당에 내려온 후, 나는 모두를 향해 그렇게 선언했다.

    "뭐가 그런 의미에서라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네만."

    그리고 그런 날 향해 디아나가 대표로 딴죽을 걸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부족했나.

    "우린 명색이 여신님의 사명을 받고 움직이는 파티!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자각이 너무 없어! 좀 더 진지하게 던전에 다니며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어!"

    깨어나기 전에 꾼 악몽을 보고, 나는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힘을 키울 필요가 있어.

    물론 꿈에서 봤던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아마도 그 꿈 자체가 사라의 살기 때문에 꾼 개꿈이겠지만, 그래도 항상 최악의 사태에는 대비를 해줘야 한다.

    만약 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난 너무도 무기력해진다.

    "흠.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네만 갑자기 그러는 것이 수상하구먼. 간밤에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겐가?"

    그리고 그렇게 힘차게 주장하는 날 보며, 디아나가 의심가득한 눈으로 정곡을 찔러왔다.

    "윽! 그,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애도 아니고! 여신님의 사자로서! 여신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해주실까!"

    "무서운 꿈을 꿨다는 것이로구먼."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쫄래쫄래 다가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줬다.

    완전 애 취급하고 있잖아.

    아니. 디아나에 비하면 애인 건 맞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다들 위에서 볼 일이 있으면 오늘 내일 사이에 미리 다 해둬."

    "으아앗! 뭘 하는 겐가?!"

    나는 머리를 토닥여주는 디아나를 끌어안고 그대로 의자에 가서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디아나는 왠지 그런 내게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내가 무시하고 꼭 끌어안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결국 포기한 듯 가만히 내 품에 안겼다.

    "후훗. 네. 그럴게요. 아, 그럼 전 오늘 중으로 신전에 다녀와야겠네요. 아 하지만 마틸다 추기경님은…."

    레이아는 나와 디아나의 모습이 흐뭇했던 건지, 쿡쿡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중간에 말을 흐리며 살짝 나와 마틸다의 안색을 살폈다.

    이왕이면 신전에는 마틸다와 같이 가려고 하는데, 내가 마틸다에게 용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 일정을 신경 쓸 게 아니라, 내 일정이 제일 문제네.

    오늘 내일 사이에 마틸다와 저주 해제도 해야 되고, 펠리시아의 성욕도 풀어줘야 되고, 실비아도 신경을 써줘야 한다.

    게다가 오늘 낮에는 이미 선약이 잡혀있다.

    분명 어제만 해도 이번엔 느긋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청 바빠지게 생겼잖아.

    나는 필사적으로 오늘 내일 사이에 그 일정을 전부 소화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봤다.

    "…던전에 가는 건 사흘 후로 하자."

    "지금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안 되겠다 싶은 겐가."

    그리고 그런 날 보며, 여전히 내 품에서 속박 당해있는 디아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얘는 또 왜 쀼루퉁해져 있냐.

    아니. 맞는 말이지만.

    "크흠! 아무튼 그래서 미안한데, 마틸다는 내일 내가 같이 데려다줄게. 오늘은 레이아 혼자 가줘. 내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식당에 들어와서 정위치를 지키고 있던 바넷사의 몸이 살짝 떨렸다.

    다행히도 어제 한 약속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가요…. 네. 알겠어요."

    레이아는 여차하면 마틸다와 단 둘이서 신전에 갈 생각인 모양이었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우리 마틸다한테 또 다른 놈팡이가 달라붙을지 어떻게 알고.

    아니. 물론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 파티의 멤버 구성은 이 도시 전체에 소문이 났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자기 정체를 숨기던 디아나마저 이제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꼭 뒤집어쓰고 다니지 않을 정도가 됐으니 말 다했지.

    참고로 마법사 협회의 누님들이 손을 쓴 건지, 가끔가다 모험가를 하고 있는 마법사가 우리 파티를 보더라도 디아나에게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엄청나게 존경하는 시선을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보내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우리 파티 멤버가 알려졌다는 말은, 마틸다 역시도 알려졌다는 말이다.

    게다가 마틸다의 저주는 그렇지 않아도 유명한 모양이라, 아마 최대한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마틸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놈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웬 미친놈이 고자가 될 걸 각오하고 절세미인의 사랑을 맛보겠다며 달려들지 누가 알아.

    그런 꼴은 내가 죽어도 못 보지.

    마틸다의 핑크빛 모드를 맛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틸다가 외출할 땐 무조건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마틸다 그걸로 괜찮지?"

    "네, 네에…그럼요. 전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얜 또 왜 아침부터 핑크빛 모드가 되어있냐.

    진짜 최근 들어 이상하게 핑크빛 모드가 자주 된 단 말이야.

    역시 불안해.

    그렇게 앞으로의 일정을 서로 논의하고 식사를 마친 후, 다들 볼 일을 보러 하나둘 식당을 떠날 때까지도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여전히 부끄러워 죽으려 하는 사라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디아나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 품에서 겨우 탈출했다는 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아도 신전에 갈 채비를 하러 자리를 벗어나고, 마지막으로 마틸다는 핑크빛 모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서 내가 억지로 평소 상태로 되돌렸다.

    실비아는 어쨌냐고? 아직 있어. 저기 구석에.

    아까 전에 나가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엿보고 있는 중이시다.

    실비아 쟤는 아직도 스토커 기질을 다 못 버렸다니까.

    아마 내가 가라고 해도 몰래 스토킹을 할 테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눈치를 봐서 자기가 따라올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알아서 따라오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다들 식당을 빠져나가고 나서, 나는 식당에 있는 또 한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식사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바넷사에게.

    "시간, 제대로 만들어 놨어?"

    "…네."

    내 질문에, 바넷사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부터는 집사가 아니라 내 여자로 대해도 된다는 거겠다?"

    "읏!"

    내가 그런 바넷사에게 다가가며 중얼 거리자, 바넷사가 드디어 몸을 움찔하고 떨면서 살짝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완벽한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런 바넷사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옷 갈아입고 와."

    "…하?"

    그런 날 보며, 바넷사의 무표정이 드디어 깨지며 살짝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설마 그 차림으로 놀러갈 생각이야?"

    "…지금부터 놀러 가는 겁니까?"

    "그럼 뭘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내 질문에 바넷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내게 똑바로 말하고 있었다. 알면서 묻지 말라고.

    아무래도 어제 내가 한 말을, 그렇고 그런 짓을 할 테니 시간 비우라는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니. 뭐, 사실 그게 정답 맞지만 말이야.

    어제 바넷사에게 시간을 비워두라고 했을 때는, 나도 바넷사와 할 생각이 가득했다.

    그걸 직접 말로 표현한 건 아니었지만, 아마 바넷사도 그걸 느낀 거겠지.

    하지만 사라와 하룻밤을 보내며 산뜻해진 기분으로 새삼 생각해보니, 모처럼 바넷사가 시간을 만들었는데 그냥 야한 짓만 하고 끝내는 건 아쉽다는 생각이 든 거다.

    게다가 디아나가 내게 바넷사를 맡긴 이유를 생각해보면 더욱더.

    그런고로, 나는 지금부터 바넷사와 데이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아까 전에 이틀만으로 스케줄 소화를 다 못하겠다고 계산한 것도, 실은 오늘 바넷사와 데이트를 할 생각이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뭐, 아무튼 데이트니까. 집사복 말고 제대로 된 사복으로 갈아입고 와줘."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호떡찡 // 언젠가 작가의 말에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답글에 일일이 답변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글 쓰는 것만큼이나 답변을 다는 것에 시간을 쓰게 되더군요.

    그래서 그 이후로 답변이 필요해 보이는 댓글 말고는 답글을 안 달고 있습니다.

    또한 답변이 필요한 댓글이라도 앞으로의 전개를 묻는 질문에는 답변을 안 하고 있습니다.

    호떡찡님의 장문의 댓글은 감사하게 봤습니다.

    다만 저런 원칙으로 다른 댓글에는 답변을 안 달고 있으면서 장문의 칭찬 댓글에만 답변을 다는 것도 우스운 일인지라 그냥 답변을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호떡찡님뿐 아니라 다른 분에게도 미리 양해를 구하자면, 앞으로도 저 답변 원칙은 유지할 생각입니다.

    물론 답변을 안 할 뿐, 달아주시는 댓글은 전부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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