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56화 (64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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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층 답파

하여간 그 녀석도 참.

레이첼 누님에게 대강의 상황설명을 듣고 난 후, 나는 그런 감상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얼마 전에 자기 고백을 찬 놈이라고 할지라도, 친구 욕을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건가.

내 뒷담을 듣고 바로 그렇게 시원한 대응을 해버리다니.

게다가 앨리시아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앨리시아가 나한테 차였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아라크네 클랜 내부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라, 앨리시아 본인이 가장 먼저 퍼뜨렸다는 게 되잖아.

그 너무나도 앨리시아다운 행동에, 나는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아까운 여자를 차버린 건지도 모르겠는걸.

"하여간 그 녀석도 참. 차이고 나서도 여전히 씩씩하다고 해야 할지. 그럼 레이첼 누님 입막음을 한 것도 괜히 쪽팔린다고 그런 거죠?"

"네? 앗, 네, 네에…."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얘기하자, 레이첼 누님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괜찮아요. 레이첼 누님. 저도 그렇게까지 둔감하지는 않다고요.

아마 앨리시아는 날 신경써준 거다.

다음에 봤을 때는 전처럼 다시 친구사이로.

그렇게 얘기했으면서 저런 식으로 행동을 해버리면, 앨리시아가 나한테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정말로 앨리시아가 나에 대한 감정 정리가 아직 덜 됐는지 어떤 건지는 모른다.

워낙 맺고 끊음이 확실한 녀석이니 벌써 감정 정리가 끝났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차이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니 아직까지 감정 정리가 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런 뜻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했다는 게 나한테 알려지면 다음에 만났을 때 전과 같은 친구 사이로 만나기는 힘들 거다.

아마 앨리시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레이첼 누님의 입막음을 한 거겠지.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도, 굳이 일부러 이렇게 모른 척을 하는 거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전처럼 친구사이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앨리시아가 레이첼 누님에게 입막음을 한 것처럼, 나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최고라고 판단했다.

뭐, 전부 내가 너무 심하게 넘겨짚은 거고, 사실은 정말로 그냥 쪽팔린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앨리시아는 원래 머리보다는 감정에 몸을 맡겨 움직이는 성격이니까.

아무튼 레이첼 누님이 해준 말로, 나는 두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앨리시아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좋은 여자였다는 점.

그리고 앨리시아가 이제 다시 던전에 다닐 정도로는 감정을 추슬렀다는 점이었다.

그걸 알게 된 것 만으로도 나는 레이첼 누님께 사정 설명을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그 녀석, 그 이후로 또 계속 술만 퍼마시는 거 아닐지 걱정했는데. 다행이도 감정을 잘 추스른 모양이다.

적어도 이제는 앨리시아가 언제까지나 술만 퍼마시며 폐인처럼 지낼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뭐, 평소의 셋을 이끌고 던전에 갔다는 걸 보니, 왠지 삼인방이 희생양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아니. 미안! 진짜 미안! 앨리시아랑 감정적인 대화를 나누다보니까 그만 너희 얘기하는 거 깜빡했어! 진짜로 미안!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삼인방에게 사과를 했다. 물론 내 사과가 삼인방에게 들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삼인방을 만나게 되면 그때 다시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자.

지금은 우선…삼인방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게 먼저일까.

"후하하핫! 들었냐?! 이걸로 내게 씌워진 억울한 프레임은 완전히 벗겨졌다는 거다! 뭐가 여자를 얼굴로만 평가한다는 거야! 후훗. 안타깝게 됐네? 그 소문으로 내게 여자들이 달라붙는 걸 막아보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아무래도 난 하늘이 돕는 모양이야! 이래 봬도 여신님의 사자니까! 후하핫! 이걸로 나는 다시 여자들한테 인기절정의 위대한 성자님이…."

"그래서, 좋아?"

아, 아차! 앨리시아의 진심을 눈치 채지 못한 척 장난스럽게 넘어가려고 연기한다는 것이, 그만 너무 과도하게 몰입을 해버리고 말았어!

사라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나는 퍼득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요. 전 여러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다른 여자 따위! 다른 여자 따위! 다시 소문내고 올까요? 가서 아무나 저렙 모험가 한 명 붙잡고 백점만점에 십삼점 정도로 평가해주면 곧바로…."

"그만두게! 모처럼 앨리시아양이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까지 감싸준 걸세! 그걸 전부 무위로 돌릴 셈인 겐가! 아읏! 호오…호오…."

그리고 내 이어지는 과장된 사과에, 디아나가 진지하게 꾸중하면서 내 머리에 꿀밤을 놨다.

아니. 야. 자기가 때려놓고 그렇게 울상 지으면서 노려보지 마라. 너 지금 내가 돌머리라고 은근슬쩍 돌려 까는 거냐?

아무튼 디아나가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앨리시아의 행동이 우리 애들한테도 꽤나 깊은 감명을 주기는 한 모양이다.

앨리시아를 그렇게 경계하던 애가 앨리시아를 측은하게 여기면서 감싸고 들다니.

"전 십삼점이라는 구체적인 점수가 신경 쓰여요. 당신 혹시 정말로…."

"아니라고! 그냥 아무렇게나 말한 거라고!"

"네에. 농담이요. 믿고 있는 걸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너 핑크빛 모드였던 거냐?! 헷갈린다고! 방금 전에 뜸 들였던 건 뭔데?!

"여, 여기! 마석 정산! 끝났어요!"

내가 앨리시아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면서 일부러 장난스럽게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자, 레이첼 누님이 황급히 마석 정산금을 내밀었다.

마치 어서 이걸 받고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말하듯이.

설마 내 얼굴을 이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누님은 아직도 나한테 못 다한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이 이상 내가 눈앞에 있으면 또 앨리시아 얘기를 꺼낸 것처럼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다.

뭐, 못 다한 말이라고 해도, 내가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앨리시아가 그렇게 행동한 진짜 의미에 관한 말이겠지만.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하는 누님의 모습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누님은 화내실 지도 모르지만 상당히 귀여웠다.

"네. 누님. 그럼 나중에 또 놀러올게요. 점심시간에 오면 잠깐 빠져나올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서 누님을 골탕 먹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뒤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모험가들도 있으니까.

"네, 네에!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누님을 뒤로 하고, 우리는 길드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설마 그 여자를 찼을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앨리시아에 대한 얘기가 완전히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야 그렇겠지. 레이첼 누님한테 자세한 얘기를 듣는 게 먼저라면서 얼버무렸었으니까.

사정을 다 듣고 나온 지금, 다시 한 번 그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뭔가 말이 이상하다?"

"응? 뭐가?"

"아니. 보통은 내가 앨리시아를 찬 것보다 먼저, 앨리시아가 날 좋아했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되는 거 아냐?"

"…하아."

내 그 말에, 사라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일부러 보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뭐야 그 한숨?! 설마 너 알고 있었어?!"

"몰랐던 건 자네뿐이라고 생각하네만."

뿐만아니라, 디아나까지도 옆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뭣이?! 진짜로?!"

"네, 네에…."

내가 확인 차 천사님께 시선을 돌리자, 천사님마저도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럼 너희가 앨리시아를 그렇게 견제했던 이유도, 그냥 단순히 내 동정을 빼앗아가서 그런 게 아니라…."

"그걸 이제 알았어? 하여간 둔해 빠졌다니까."

"아니. 그래도 앨리시아 걔가 평소에 날 대하는 걸 보면…대체 뭘 보고 눈치 챈 건데?!"

"보면 아네,"

"아니아니. 보면 안다니. 무슨 텔레파시 쓰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항변했지만, 날 제외한 전원은 다들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실비아마저도.

젠장. 이러니까 마치 지금까지 눈치 못 챘던 내가 이상한 것 같잖아.

아니지? 눈치 못 챘던 게 정상인 거 맞지?

"아무튼 설마 찰 거라곤 생각 못했어.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니까, 구원이 그 여자 마음만 눈치 채면 또 은근슬쩍 넘어가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실제로 그랬잖아?"

그야. 지금까지 알고 지낸 여자 고백은 전부 받아들인 게 사실이지만 말이야.

아니. 그래도 난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정말 마음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였던 거라고.

"난 정말로 이성으로서 좋아한 사람만 받아들였다고. 실제로 앨리시아하고는 엄청 친했는데도 제대로 거절했잖아?"

"그러고 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분위기 잡으면서 우울해했잖아."

"아니. 그거야…나도 그렇게 제대로 고백 받은 다음에 차버린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던 것뿐이라고! 이래 봬도 엄청 노력한 거란 말이야!"

고작 그런 걸로 그렇게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우울해하면 어떻게 해?

그럼 지금부터도 다른 여자들이 고백할 때마다 그럴 거야?

솔직히 사라라면 그렇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돌아오는 건 부드러운 대답이었다.

"…응. 알아. 고생했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제대로 우리한테도 말해줘. 괜히 혼자 끌어안고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터놓고 얘기하는 게 마음도 편해지잖아?"

"사라양 말이 맞네. 자네가 이 몸들에게 왜 그 얘기를 안 한 것인지, 짐작은 가네만. 이 몸들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옹졸한 성격은 아닐세."

"그래요. 구원씨. 어떤 일이라도, 다 터놓고 얘기해주세요. 저희끼리 비밀이 생기는 건…너무 슬퍼요."

"저희는 이미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있으니까? 당신도 좀 더 기대주세요."

"미, 미력하지만…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라에 이어서, 다들 차례차례 그렇게 날 다독이듯 말을 건네줬다.

특히 실비아는 두 눈을 꼭 감고 내게 안겨 와서는 실비아테라피까지 선사해줬다.

얘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목숨을 걸고 내 힘이 되줄 생각인가 보다.

실비아야. 적어도 지금은 고민하고 있거나 너희한테 비밀이 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이러는 건 쓸데없이 생명력만 깎아먹는 것 같은데.

물론 실비아테라피가 기분 좋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실비아의 몸을 안아줬지만.

"사라 너…너희들…."

아무튼 예상했던 쓴 소리는 한 마디도 없이, 그저 한없이 다독여주기만 하는 우리 애들을 보고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왠지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코끝이 찡해지니, 또 내 안 좋은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라 넌 오늘 밤에 무조건 메이드 복을 입히고…."

"야! 구원! 너 아직도…!"

"아무리 핍박해도 이것만큼은 포기 못해! 네가 네 입으로 스스로 말한 거니까! 이제 와서 못하겠다는 소리는 못하겠지?!"

"디아나아아!"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 내가 우겨대자 사라가 울상을 지으며 디아나에게 매달렸다.

"왜 갑자기 화살이 이 몸에게 오는 겐가?! 아, 알겠네! 알겠으니까! 자네! 사라양의 그 발언은 이 몸이…."

"내일 디아나가 대신하겠다고?"

"코, 코홈! 역시 이런 일은 말을 한 장본인이 직접 책임을 지는 게 타당하다고 보네!"

디아나는 그런 사라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재를 나서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바로 말을 바꿨다.

디아나도 메이드복을 입고 내 발을 핥는 건 싫은 모양이다.

"디아나아아!"

"에, 에에잇! 그만 달라붙게! 이 몸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사라와 디아나 둘이서 투닥거리는 사이에, 레이아가 은근슬쩍 내게 다가와 날 꾸중했다.

"후훗. 두 분도 참. 그래도, 이번엔 구원씨가 너무하셨어요. 항상 좋은 분위기만 되면 그렇게 얼버무리시고."

"아니. 부끄럽잖아."

"후훗. 그런 점을 보면 아직 애라니까요. 그런 거라면 굳이 밤에 있을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됐잖아요. 어차피 아직 밤은 멀었으니까, 우선은…."

"당신, 우선은 실비아씨부터 놔주시는 게 어때요? 슬슬 위험해 보이는데요."

뭔가 쑥스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고혹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아가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운을 띄웠고, 그 뒷말을 마틸다가 곧바로 이어받았다.

"아앗! 네, 네! 추기경님 말이 맞아요! 슬슬 실비아씨의 상태가!"

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여전히 실비아를 품에 안고 걷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실비아 테라피가 너무 몸에 착 맞게 기분 좋아서 오히려 자각을 못하고 있었다고 할까.

"으으으읏! 구, 구원니믄! 졔, 졔가아아! 목숨을 걸고셔라도오오!"

실비아야.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죽으면 진짜로 개죽음이라니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하늘에서뚝딱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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