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51화 (635/1,205)
  • 651====================

    4계층 답파

    "하아앗!"

    그리고 크라켄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라는 언제 놀랐냐는 듯 곧장 자세를 바로잡고는 크라켄을 향해 활을 겨눴다.

    "사라! 잠깐!"

    "바, 바보! 이런 때에 뭐하는 거야! 이런 장난이라면 나중에 받아줄 테니까, 지금은…!"

    나는 사라가 활을 쏴버리기 전에, 황급히 그 몸을 끌어안으면서 제지했다.

    하지만 사라는 내가 왜 그러는 건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날 날카롭게 노려봤다.

    사라가 답지 않게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역시 겉보기에는 냉정하게 보여도, 크라켄의 거대한 위용에 깜짝 놀라기는 한 모양이다.

    "바보야! 너야 말로 뭘 하는 거야?! 이번엔 내가 바로 어그로를 못 끈다고!"

    평소라면 태평하게 말했겠지만, 과연 나도 이번만큼은 다급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저 크라켄은 우리를 인지하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

    사라도 내 말을 듣고,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방금 사라가 하려던 것처럼 먼저 활부터 날려버려도 아무 상관없다.

    어차피 다가오기 전에 해치울 수 있을 거고, 만약 그렇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조건 어그로를 먹어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둘 다 불가능한 상황이니까 말이야.

    아무리 사라라도 계층의 주인을 다가오기도 전에 해치워버린다는 건 불가능하고, 이번 작전에서는 실비아가 메인 탱커인만큼 내가 성자 스킬로 어그로를 끄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파티가 그러는 것처럼, 우선 탱커인 실비아가 저 크라켄의 어그로를 먹고 난 후에야 공격을 시작해야한다는 거다.

    그러니 이렇게 주의를 주는 내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지만…그래도 사라가 저렇게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니까 또 마음이 무거워지네.

    아무리 급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여자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남자가 되는 것이 내 신조일 텐데.

    "나중에 이런 장난 받아주기로 한 거다?"

    때문에 나는 일부러 사라의 엉덩이를 더듬듯이 톡 치고는, 가벼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사라는 그런 내 행동에 곱게 눈을 흘기면서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크으. 이런 긴급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내 여자를 케어해주는 나란 남자.

    나란 놈은 왜 이렇게 다정하고 달콤하고 완벽한 걸까.

    그렇게 살짝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나는 지금 해야할 행동을 잊지 않고 일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실비아. 메인 탱커 역할, 확실히 부탁할게. 나도 최대한 어그로를 분산시켜줄 테니까."

    "넵!"

    내가 지근거리에서 그렇게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비아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든든하게 대답해준 후 앞으로 빠르게 헤엄쳐갔다.

    그런 실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인벤토리에서 새로 장만한 단검과 예비용 단검을 각각 한 손에 꼬나쥐고는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타격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상대고, 위기 상황이 오지 않는 한 성자 스킬도 봉인된 거니까 말이다. 단검 마스터리의 레벨이 낮다고는 하나 이렇게라도 공격을 해야지.

    참고로 쌍수를 사용하는 이유는 별 거 아니다. 어차피 줄 수 있는 데미지는 적을 테니, 그렇다면 많이라도 때리자는 의미로 꺼내든 것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드디어 크라켄과의 전투가 시작됐다.

    크라켄이 처음 공격을 시도하는 건, 역시나 가장 빨리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실비아였다.

    수중에 둥둥 뜬 채로 다리 하나만을 뻗는 다는 건, 일단 이쪽의 실력을 가늠해보겠다는 얘기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머리도 상당히 돌아가는 녀석인 모양이다.

    하기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눈치 채기 전까지 수초로 위장을 하고 있지도 않았겠지만.

    고작 다리 하나를 뻗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크라켄의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아무래도 다리 하나 굵기가 내 몸통의 두세 배는 될 것 같은 크기다 보니, 마치 거대한 나무창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까 전에 브리핑에서 디아나가 촉수 같은 공격으로 볼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했었지만, 저걸로 촉수 플레이는 불가능하겠네.

    다리로 한 바퀴만 휘감겨도 몸 전체가 보이지 않게 될 수준이잖아.

    아니. 아쉽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위협적으로 뻗어오는 크라켄의 다리를 바라보며, 실비아는 방패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재주 좋게 빗겨 쳐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방패에 흘려져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게 된 크라켄의 다리 옆면을 검으로 그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두께가 두께인지라 깊은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실비아의 참격은 크라켄에게 충분히 위협이 됐던 모양이다.

    크라켄은 실비아를 향해 두 개의 다리를 더 뻗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뒤편에 있는 사라에게 공격의 수신호를 보냈다.

    사라도 한 번에 이 녀석을 해치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지, 크라켄의 몸통을 노리기보다는 실비아를 향해 뻗어져오는 다리를 먼저 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디아나가 말했던 대로, 사라의 공격 역시 다른 때와 같은 위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라는 사라.

    뻗어져오는 다리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실비아의 참격과 비슷한 수준의 데미지를 꾸준히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꾸준히 데미지를 주면서 상대하다보면, 언젠가 이 괴물도 쓰러지겠지.

    평소에 전투를 10분 이상 끌지 않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원래 보스전이란 이런식으로 치러지는 것일 거다.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황급히 크라켄의 뒤로 돌아간 후 양손에 꼬나쥔 단검으로 그 뒤통수를 난자하기 시작했다.

    …데미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 아무리 내가 전투직 레벨이 낮고 단검 마스터리 레벨이 낮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이 녀석 내 쪽에는 신경도 안 쓰잖아.

    좋아.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이것도 신경 안 쓰고 버티나 보자.

    나는 이번에는 단검에 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낮은 단검 마스터리가 발목을 잡아서 주먹에 하는 것처럼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단검에서 미약하게나마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 필살기인 고통과 쾌락…아니. 헬 앤드 헤븐을 먹여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봐줬다.

    나는 두 손에서 빛나는 단검으로 난도질을 시작했다.

    …크라켄은 내 쪽에 다리 하나만을 뻗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지루한 전투를 계속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와 실비아 둘이서, 아니. 뒤에서 버프와 힐을 걸어주고 있는 레이아까지 포함해 셋이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내 쪽에는 끝까지 다리 하나 이상을 뻗지 않는 크라켄을 난도질하며, 나는 반쯤 셋을 응원하는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꽤나 지난 후, 드디어 이 지지부진한 전투에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재주 좋게 크라켄의 다리를 방패로 비껴 쳐내고 있던 실비아였지만, 옆에서 휘둘러져 오는 다리를 그만 방패 정면으로 그대로 막아버린 거다.

    막았으니 문제없는 거 아니냐고?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문어의 다리 하면 빨판이 특징이다.

    이 크라켄 역시도 그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다리를 막은 실비아의 방패를 빨판에 찰싹 붙여버린 거다.

    그 상태로 크라켄이 다리를 빼니, 방패를 단단히 쥐고 있던 실비아 역시도 그대로 그 몸이 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

    나는 물속에서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실비아의 이름을 외치고는, 당장 성자 스킬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전투 시에는 평정을 잃지 않는 우리 기사님께서는 고작 이정도로 당황할 사람이 아니었다.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패를 놓고는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휘둘러버린 거다.

    크라켄의 다리에 딸려가면서 생긴 가속도까지 이용해서 휘두른 그 무거운 일격은, 드디어 크라켄의 다리 하나를 완전히 잘라내버리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렇게 다리가 잘린 크라켄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날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다리를 한꺼번에 웅크린 크라켄은, 다음 순간 다리를 모두 쫙 펼치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크윽!"

    갑자기 솟구치는 크라켄 때문에 그 뒷통수에 달라붙어서 고군분투하던 나 역시도 위로 솟구쳐 오르게 됐지만, 나는 곧바로 그게 다행임을 알 수 있었다.

    크라켄이 아래쪽을 향해 시커먼 먹물을 분사해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저장하고 있는 먹물도 많았던 건지, 쏟아져 나온 먹물은 근처 일대를 전부 새까맣게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드디어 주인공이 활약할 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애들의 시야는 먹물로 완전히 가려진 상태.

    실비아는 당연히 크라켄의 다리를 피할 수 없을 거고, 사라나 디아나도 시야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누가 맞을지 모르는 원거리 공격을 막무가내로 날릴 수 없을 거다.

    마틸다나 레이아도 대처수단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크라켄의 뒤통수에 있던 나 혼자만이 시야가 멀쩡한 상태로, 지근거리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디아나가 지금까지 공격을 전혀 안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듯 디아나는 이 전투도 우리 성장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위기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끼리 해결하게 만들 셈이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성자의 손길을 한 손에 둘렀다.

    "제대로 건드리기도 전에 그렇게 검은 걸 싸버리다니! 진짜 쌀 것 같단 느낌이 뭔지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지! 뿅가 죽어라아아!"

    나는 성자의 손길을 두른 주먹을 전력을 다해 크라켄에게 휘둘렀다.

    물론 내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다고 해서 크라켄에게 데미지가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크라켄이 이 한 방으로 뿅가 죽는 상황도 발생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내가 매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4계층의 주인을 한 번에 복상사시킬 수준은 아닌가봐.

    실비아에게 잘린 다리 하나를 제외한 모든 다리가 날 향해 덮쳐오는 걸 보고, 나는 새삼 그 사실을 재인식했다.

    …기분 나빠.

    문어 다리에 전신이 휘감겨서 처음 느낀 감상은 그런 감상이었다.

    아니. 아프기도 아프다. 그것도 무진장 아프다.

    과연 4계층의 주인. 내 방어력에 5계층 수준의 장비를 꼈는데도 이런 데미지라니.

    하지만 고통보다도, 나는 불쾌감을 더 심하게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전신이 다리에 둘둘 말려서 조여지고 있는데, 동시에 전신에 빨판이 달라붙어서 당겨지고 있는 거라고.

    엄청 기분 나쁘다고.

    그리고 난 아직도 성자 스킬을 손에 발동중인데 말이야, 내 손을 빨판으로 한 번 빨 때마다 이 몸의 다리가 움찔움찔 떠는 게 느껴져서 더 기분 나빠.

    여러모로 기분 나쁘다고.

    그런데 제일 기분 나쁜 건 그게 아니야.

    제일 기분 나쁜 건, 왜 하필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는 거야.

    보통 말이야, 이런 촉수 플레이 비스무리한 건 여자가 당해야 그림이 사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전에 4계층에 처음 왔을 때도 왠지 나부터 이런 플레이를 당하지 않았던가?

    이상하잖아?! 보통 이런 건 나 같은 사내새끼가 아니라 어여쁜 아가씨들이 당하면서 므흣한 광경을 연출해내야 정상이잖아?!

    왜 난데?! 왜 항상 내가 당하는 건데?!

    저기 바로 앞에 실비아도 있었잖아! 여기사님의 촉수 플레이! 어감부터 완벽하잖아! 왜 난데?!

    아니. 내 여자에게 이런 고통을 맞보게 하고 싶다는 건 절대, 결단코 아니지만,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억울한 이 감정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젠장! 이런 세계라면 말이야! 모처럼 이런 가는 곳마다 섹스 이벤트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세계라면 말이야, 몬스터와 싸울 때도 좀 그런 일이 일어나도 되잖아?!

    왜 항상 던전에서의 전투는 이렇게 엄격 근엄 진지한 건데?!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오는 계기가 된 게임의 제목, 분명 ‘섹스 앳 더 던전’이었지?

    여신님! 던전에서의 섹스가 전혀 없는데요?!

    내가 크라켄의 촉수&빨판 공격을 받으며 억울함을 폭발시키고 있는 사이에, 코끝에 맛있는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 녀석. 디아나한테 구워지고 있군.

    결국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대 크라켄 전은 용두사미로 허망하게 막을 내리게 됐다.

    다음부터는 성장이고 뭐고 그냥 콱 전부 디아나한테 잡아달라고 해버릴까 보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엔 촉수 관련 얘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다들 기대하시는 것 같아서 마지막을 촉수로 마무리 했습니다.

    독서용안경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1000화는 넘기고 싶지 않네요.

    Tntn12 // 기본적으로 조아라는 예약 아이템이 유료입니다. 그리고 예약 아이템을 쓰더라도 10분 간격으로 x7분에만 등록이 가능해서 정시에 못 올려요.

    비탄의나태 // 지적 감사합니다. 만류귀종의 뜻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게 된 중간 과정을 설명안하고 결과만 말해버리는 제 안 좋은 버릇이 또 나왔네요.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서 저렇게 된 것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무기를 연마하든 결국 그 끝이 같다면, 한 무기를 극으로 연마하면 그와 다른 무기를 극으로 연마한 것과 마찬가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 만류귀종이라는 스킬이 존재한다면, 한 가지 무기 숙련도를 끝까지 올린 순간 다른 무기들의 숙련도 역시 최고치가 되는 스킬일 거다.

    그리고 올 웨폰 마스터리는 굳이 무기 숙련도를 끝까지 올리지 않더라도 다른 무기 숙련도가 같이 올라가는, 만류귀종을 강화한 것 같은 사기 스킬이다.

    라는 생각 끝에 그런 대목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중간 과정을 잘라버리고 제가 결과만 썼네요. 적절하게 수정했습니다.

    닭구 //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바이박수 // 크라켄이란 게 실존하는 생물이 아니다보니, 등장하는 작품마다 표현되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문어 모습으로 표현되는 작품도 있고 오징어 모습으로 표현되는 작품도 있죠.

    이 작품에서는 문어 모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