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48화 (63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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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정남 구원

    "그러니까 포기하고 순순히 말해. 내가 기대하게 만들었다니. 대체 무슨 말이야? 말해줄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니까!"

    나는 그렇게 앨리시아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오히려 한발자국 더 앨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크윽…! 이, 이런 또라이가…너 대가리 이상한 거 아냐?"

    앨리시아는 거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특유의 건강한 커피색 피부위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게 치사한 짓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앨리시아는 아직 날 좋아한다.

    방금 전에 차였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앨리시아는 이렇게 내가 억지 부리는 걸 보면서도 강제로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치사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앨리시아와의 우정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물론 그게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우선 아라크네 클랜과의 관계를 위해서.

    물론 전에 삼인방에 그런 발언을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내가 이대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아라크네 클랜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삼인방에게 했던 말이 아라크네 클랜 전체를 향한 비하였다면, 앨리시아와의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남녀 간의 감정문제다.

    게다가 우리와 아라크네 클랜과의 협력관계는 아라크네 클랜도 얻는 바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손을 끊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시아는 이곳의 간부. 게다가 정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위치에 있는 존재.

    이대로 가면 아라크네 클랜과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걸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지금이야 우리가 아라크네 클랜과의 협력관계에서 얻을 게 거의 없다고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아라크네 클랜의 도움이 필요해질 때가 반드시 올 거다.

    디아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협력 관계를 신경 썼던 것일 테고 말이지.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앞으로의 행동을 조심하기 위해서다.

    만약 이대로 앨리시아와의 우정까지 박살나고 내가 나간다고 하더라도, 아라크네 클랜과 협력관계를 맺은 상태로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서 활동하다보면 언젠가는 앨리시아와 마주치게 될 날도 올 거다.

    그리고 내가 그때 또 다시 방금 전 앨리시아가 말했던 기대하게 만드는 행동을 반복해버리면, 앨리시아의 마음에 다시 상처를 주게 된다.

    아니. 굳이 앨리시아가 상대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여자에게 앨리시아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대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 일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도대체 내 어떤 행동이 앨리시아를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건데."

    "크윽…너, 네가…! 네가 말했잖아! 나보고! 예쁘다고! 조금만 여자답게 행동하면 마음에 드는 남자 하나 유혹하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날 보고 자포자기한 건지, 앨리시아는 원망의 눈빛을 잔뜩 담아서 날 노려보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어?! 지, 지금 뭐라고?!

    아니. 응. 확실히 그런 말을 했어. 했었지. 얘 가지고 여자다워지는 특훈이니 뭐니 하면서 장난칠 때.

    하지만 너 그게…잠깐만. 확실히 이 녀석, 나한테 그렇게 놀려지면서도 꿋꿋하게 특훈을 계속하기는 했었지. 그런 모습을 보고 이런 맹수 같은 애라도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남자가 하나 있기는 한가보다고 생각했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그 남자라는 게 설마 나였다고?!

    그럼 난 나 좋아한다는 애가 날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난치고 웃었다는 얘기가…!

    위험해. 위가, 위가 쓰려.

    확실히 난 쓰레기다. 때로는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한다.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었다.

    쓰레기인 나라도 나만의 기준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앨리시아에게 한 행동은 내 기준을 완벽히 넘어서는 행위였다.

    비록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미안…. 진짜, 진짜로 미안…."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앨리시아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진짜로 전혀 눈치 못 챘다고.

    아니. 그도 그럴 게, 너 그 전까지 그런 모습은 전혀 티도 안 냈…잠깐만. 이거 설마 그 말로 기대만 한 게 아니라, 아예 그 말 때문에 날 좋아하게 된 거 아냐?

    날 이렇게까지 여자취급 해주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으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쉽게…아니.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앨리시아에게 몹쓸 짓을 한 건 변함이 없었다.

    "뭐, 뭔데 갑자기 또 그렇게 사과하는 건데."

    그리고 그런 날 보면서, 앨리시아는 괜히 자기도 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미안. 난 설마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거라고는 생각도…정말 미안해! 그, 그래도! 그때 한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고 죄책감에 짓눌린 나는 또 한 번 실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읏!"

    "앗, 미안! 진짜 미안!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사, 사과 하지 마, 새끼야! 그런 걸로 사과하면 진짜 내가 남자 하나 유혹 못 하는 여자가 될 것 같잖아!"

    당황하는 날 보면서, 결국 앨리시아는 이제 됐으니까 그만하라고 말하듯이 그렇게 내 말을 끊었다.

    "조금만 여자답게 굴면 어떤 남자도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로 난 예쁘다! 그걸로 된 거지?!"

    "…그래."

    마치 날 다독여주듯이 말하는 앨리시아를 보고,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상처받은 건 자기일 텐데도 이런 태도라니.

    역시 이 녀석은 조금 거칠기는 해도,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좋아.

    이런 점이 거칠고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면서도 부하들한테 사랑받는 원인인 거겠지.

    "그럼 됐어. 그걸로. 너한테 딱히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착각한 건 나니까."

    그리고 앨리시아는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얘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아니. 그건…."

    "핫! 이런 좋은 여자를 차다니. 너 같은 햇병아리 동정새끼한테는 다시없을 기회였는데. 나중에 이불을 눈물로 적시면서 실컷 후회하지나 말라고."

    그리고 방금 전 스스로를 예쁘다고 했던 자신의 발언이 상당히 부끄러웠던 건지, 앨리시아는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빠른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앨리시아…."

    그런 앨리시아를 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앨리시아는 흠칫하고 몸을 긴장시키더니 내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읏! 뭐, 뭐야.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젠 내가 안 받아 줄 거니까. 마차는 떠났어. 새끼야."

    "응. 미안."

    "그럼 얘기 끝났으면 이제 꺼져. 걱정 마라. 너하고 우정인지 뭔지는 계속 이어나가 줄 테니까. 이 앨리시아. 이딴 걸로 삐져서 나중에 본척만척도 안 하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그건 또 참 남자다운 발언이네.

    나한테 그런 이유로 차였으면서 끝까지 저런 태도를 유지하는 앨리시아를 보고, 나는 이런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실소가 나올 뻔했다.

    하여간 저 녀석은….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그…힘내고."

    "흥!"

    내 인사에, 앨리시아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날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크게 콧방귀만 한 번 꼈다.

    하지만 내가 문고리에 손을 걸고 나가려고 하기 직전에, 앨리시아 쪽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 정말로, 조금만 여자답게 굴면,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는 거겠지?"

    답지 않게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읏!"

    내 대답을 듣고, 앨리시아의 몸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말이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넌 지금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야. 굳이 억지로 여자답게 굴려고 하지 않더라도 분명…."

    "…야. 너 거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나는 앨리시아의 생각이 더 부정적으로 변하기 전에 황급히 위로를 해줬다.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앨리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뒷걸음질로 내게 천천히 나가왔다.

    그리고는….

    "하앗!"

    "쿠허어어억!"

    몸을 빙글 회전시켜서 주먹을 내 명치에 제대로 꽂아 넣었다.

    "새끼가 아까도 그러더니 진짜 사람 놀리나. 너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런 거지?"

    "아, 아니…그런 게…."

    그리고 몸이 굽혀진 내 등을 퍽퍽 때려대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 여자다운 행동 그만두고 고백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새끼가 혓바닥은 왜 그렇게 놀려?! 앙?! 네가! 그러니까! 착각한 거라고!"

    "미안! 미안!"

    아니. 너 방금 전 까지도 여자다운 행동은 전혀 안 보였잖아. 어디가 여자답게 행동했었다는 건데?!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후우. 때리니까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됐다. 이제 진짜로 가라."

    그리고 그렇게 한참 등을 두들겨 맞은 나는, 앨리시아의 속이 후련해지고 나서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그, 그래…. 잘 있어라…."

    그리고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앨리시아의 방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맞던 자세 그대로 허리를 굽히고, 앨리시아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로.

    절대로 후련해하는 앨리시아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다.

    "드디어 나왔네. 아니. 그런 얘기를 한 것 치고는 빨리 나온 편인가? 응. 너무 빨리 나왔네. 적어도 섹스할 시간은 없었겠어. 얘, 혹시 모르는 거니까 물어보는 건데, 조루는 아니지?"

    하지만 앨리시아의 방을 나왔다고 해서 아직 시련이 끝난 건 아니었다.

    루티아 누님이 아직도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습을 보아하니 이번엔 몰래 엿보거나 엿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 모습을 보고 대충 상황은 짐작한 것 같았지만.

    "아니에요."

    그리고 내 대답을 듣는 순간, 루티아 누님의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렇지. 잘나신 성자님이지. 그래서, 앨리시아는 결국 울린 거야?"

    "…아마도요."

    "흐으으응…."

    루티아 누님은 내 눈을 차갑게 바라보더니,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안 혼내세요?"

    "응. 변명하면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솔직히 대답해줬으니까 이번엔 봐줄게. 앨리시아도 분풀이는 충분히 한 것 같고."

    루티아 누님은 그렇게만 말하고, 섹시하게 엉덩이를 흔들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앨리시아의 방에 들어가서 위로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는 하지 않는구나.

    일단 앨리시아 혼자 진정할 시간을 주겠다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겨우 앨리시아와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얘기다.

    후련…하지는 않네. 솔직히 말해서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나 좋다는 사람을 매몰차게 찬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아니. 그냥 친한 사람의 슬퍼하는 얼굴을 보게 돼서 이런 기분이 되는 건가?

    기분은 상당히 꿀꿀했지만, 그래도 이런 기분을 겉으로 표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얼굴을 보였다가는, 괜히 우리 애들까지 걱정하게 만들 테니까.

    나는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를 나와서 던전에 돌아가는 동안,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 그러고 보니 칸나 때문에 앨리시아의 감정을 알아챈 것도 잘 좀 말해달라고 했던가. 완전히 깜빡했다.

    …뭐, 앨리시아도 어떻게 자기 마음을 깨달은 건지는 궁금해 하지 않았으니까, 별로 상관없겠지?

    고작 그런 일로 다시 앨리시아의 방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리고 4계층의 마을로 다시 내려와 보니, 여관에는 이미 다들 사냥에서 돌아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관 주인이 내 전언은 잘 전달해준 모양이다.

    아니. 그러니까 이쪽 보면서 윙크하지 말라고! 부담스럽다고! 전언을 전달해준 건 고맙지만 말이야!

    "위에 다녀왔다고 들었네만, 대체 무슨 일인가? 그 처자들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겐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잘 해결 됐어. 잠깐 중간에 일이 있었지만 말이야."

    "…정말인가?"

    "정말이라니까. 못 믿겠으면 레이아한테 냄새라도 맡게 할래?"

    디아나는 내 말에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애써 웃으면서 팔을 내밀었다.

    "아뇨. 믿어요."

    물론 레이아는 그런 날 믿음 가득한 눈으로 쳐다봐줬지만.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어째선지 레이아는 날 가슴에 꼬옥 껴안아줬다.

    그리고 그런 레이아에게 사라나 디아나도 질투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 같이 날 위로하듯 껴안아줬다.

    "뭐야. 잠깐 못 본 사이에 내가 그리워지기라도 한 거야?"

    "…그런 거라고 해둘게."

    내 농담에도 사라는 웬일로 솔직히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우리 애들에게 감싸여서, 꿀꿀했던 감정이 겨우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역시 난 제대로 해야할 일을 한 거야.

    그래도 왠지 미안하네. 찬 건 난데 내가 꿀꿀해 하고, 내가 이렇게 위로를 받다니.

    역시 난 쓰레기일지도.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닭구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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