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647화 (63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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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정남 구원

    앨리시아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달라고 부탁한 에이미도, 그리고 방문 앞에서 날 막아서고 있던 루티아 누님마저도, 내게 앨리시아를 반드시 받아들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건 강요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리고 만약 강요로 인해 우리 관계가 그런 관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시작한 관계가 끝까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리가 없으니까.

    둘 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앨리시아의 마음을 받아주라는 얘기는 하지 않고 온전히 내 판단에 맡긴 거겠지.

    그리고 4계층 마을에서 여기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까지 오는 동안, 거기에 더해 정문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동안 계속 고민한 내가 내린 결론은 역시나 앨리시아를 내 여자로 받아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앨리시아가 날 좋아한다.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얘기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는 건 너무 잘난 척을 하는 건가.

    까놓고 말해서 기분은 좋다.

    누군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남자라면 누구나 으쓱해지는 기분은 들 거다.

    게다가 그 상대가 눈이 돌아갈 만큼 미인이라면 더욱더.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앨리시아의 마음을 받아들여야하나? 그건 아니었다.

    계속 생각해봤다.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던전에 내려가기 직전 스스로가 더 이상 여자는 안만들 거라고 했던 것이나, 내게 들이대는 여자가 줄어들 거란 생각에 좋아하던 우리 애들의 표정.

    하지만 만약 이대로 차면, 앨리시아는 분명 엄청나게 낙담하고 슬퍼하겠지. 그런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많은 상념들이 오갔지만, 나는 그런 잡념들은 전부 떨쳐버리고 단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바로 내가 앨리시아를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나 좋다는 여자는 다 받아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오는 여자 안 막는 스탠스로 오해받아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나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들의 마음만을 받아주고 있었다.

    일단 계속 같이 다니며 애정을 쌓아올린 사라, 디아나, 레이아는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그 셋은 내가 먼저 반한 케이스니까.

    그리고 실비아, 마틸다, 바넷사, 레이첼 누님 역시도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있었다.

    실비아는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우리 애들을 지켜낸 그 기특함에 먼저 마음이 흔들렸고,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태도에 점점 마음이 열려갔다.

    마틸다 역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압적이고 오만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저주로부터 구하려고 하는 고귀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저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태도와는 달리 조금만 잘해줘도 핑크빛 모드가 되어서는 하트를 뿅뿅 쏘아대는 그 모습까지.

    가지고 놀듯이 이용해먹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마음이 움직였다.

    바넷사 역시도 그랬다.

    항상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관계를 가질 때 얼마나 그 표정이 망가질 수 있는지 나는 봐버린 거다.

    때문에 바넷사가 날 매몰차게 대할 때마다, 난 속으로 바넷사를 울리고 싶다거나, 저 철가면을 벗겨버리고 싶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

    스스로 자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런 생각자체가 내심 바넷사를 여자로서 신경 쓰고 있었다는 뜻이었겠지.

    때문에 바넷사와 다시 관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 몸에 손을 댔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양심상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손 하나 대지 않고 성자의 파동만으로도 어떻게든 그 몸을 절정으로 이끄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고려조차하지 않고, 바로 그 몸에 손을 대서 직접 절정을 이끌어내는 길을 택했다. 심지어 우리 애들한테 비밀로까지 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바넷사를 향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간 결과, 마침내 바넷사가 고백을 해오자 곧장 바넷사를 내 여자로 받아들일 결심을 한 거다. 그 당시엔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그리고 고백 전에 이미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레이첼 누님 역시도 상황을 마찬가지였다.

    3계층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사람들을 지켜내려 했던 그 모습?

    아니. 물론 그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레이첼 누님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 그보다도 훨씬 더 전이다.

    그래. 이 세계에서 처음 오고, 누님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 말이다.

    내가 이 세계에 오고 처음 만난 절세미인.

    어쩌면 이제 내 곁에는 우리 애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 난 그때부터 쭉 레이첼 누님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중간에 레이첼 누님을 향한 이성적인 감정은 더 없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조차도.

    감정이라는 게 사람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정리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내 마음 어딘가에, 첫 사랑과도 닮은 레이첼 누님에의 감정이 계속 억눌려있었던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누님과 겨우 친해졌는데 사이가 다시 서먹해지게 돼서 슬프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나는 계속 누님에게 얼굴을 보였던 거다.

    막말로 정말 내가 누님에 대한 감정이 없었으면, 그냥 누님과 서먹해진 시점에서 다른 안내원에게 파티 등록을 하고 마석을 정산 받았으면 그만이었을 거다.

    그때부터 난 이미 누님이 나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대충 눈치 채고 있었던 거고, 그렇다면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누님과는 더 이상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고, 어색한 분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도 꼬박꼬박 누님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던전을 오갈 때마다 누님과 얼굴을 마주치며 차곡차곡 더 쌓여가던 그 감정은, 그날. 레이첼 누님이 날 구조해주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폭발했다는 얘기다.

    결국 지금 나와 그런 관계가 된 여성들은 전원, 그런 관계가 되기 전부터 이미 그런 감정을 쌓아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앨리시아는? 나는 과연 앨리시아에게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사실 어떻게 보면, 앨리시아는 레이첼 누님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 세계에 오고,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섹스를 경험하게 해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

    그리고 중간 중간 꾸준히 얼굴을 맞대며 친목을 다져왔던 거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레이첼 누님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래도 앨리시아에 대한 감정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정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내가 괜히 앨리시아한테 그렇게 맞은 적까지 있으면서도 얼굴만 보면 반가워하고 서로 장난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서로 심하게 싸우더라도 다음날이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웃고 넘어가는, 동성 친구와의 우정.

    내 마음 속에서 느끼는 앨리시아를 향한 감정은 역시나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었다.

    성격이 너무 남자 같은 게 문제일까?

    아니면 중간 중간 사고로 인해 몸을 섞었던 레이첼 누님과는 달리, 앨리시아는 첫 만남 이후로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까?

    이유는 모른다. 아마 아무리 분석해봐도 결국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건 간에 내가 앨리시아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이상, 앨리시아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만약 앨리시아를 동정하는 마음에 받아준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끝이 좋게 끝나는 일은 없을 거다.

    난 그다지 감정을 잘 숨기는 성격이 아니고, 아마 그 감정은 우리 애들을 대하는 태도와 앨리시아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금방 드러나겠지.

    앨리시아도 처음엔 나와 맺어졌다는 생각에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폭발하고 말거다.

    원래 자기 화를 참는 녀석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선 단호하게 앨리시아의 마음을 거절하자.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렇게 머릿속의 정리를 끝낸 나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단 거절부터 하고 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대화를 하러 온 거니까 말이야.

    일단 천천히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토해내고, 그 이후에 앨리시아의 마음을 거절한다. 성격 급한 앨리시아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앨리시아의 얼굴에 점점 희망의 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기대하게 만들면, 거절당했을 때 오는 상실감은 더 커지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일단 거절부터 하고 보는 게 차라리 충격을 덜 받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던 거다.

    그렇게 순간의 충동에 몸을 맡기고 행동한 결과, 지금 난 방에 들어오고 수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앨리시아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 뭐냐. 여러모로 냉정한 척 생각을 했지만 말이야. 나 좋다는 여자를 차는 거잖아. 나 이런 거 엄청 익숙하지 않다고. 당황해서 예정과 다른 행동을 해버리게 되기도 한다고.

    "미, 미안…?"

    그리고 역시나라고 할까, 갑자기 내게 거절당한 앨리시아는 턱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그 말만을 내뱉었다.

    역시 너무 기대하게 되기 전에 일단 차고 보는 건 아니었어.

    아무리 그래도 과정이란 게 있지.

    충격을 덜 받기는 무슨.

    스스로 저질러버린 행동에 후회막급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우선 앨리시아다.

    "응."

    "그…저, 저번 일! 그래! 저번에 오해하고 도망 간 걸 사과하는 거지?!"

    "앨리시아."

    필사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앨리시아에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어줬다.

    물론 그것도 미안하지만, 지금 내 사과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내가 고개를 숙이기 전에 했던 대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너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앨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다만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겠지.

    "그, 그럼…그런…뜻이란 거냐…?"

    "…미안."

    앨리시아는 이번엔 평소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없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는 이번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멱살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잡히더니 앨리시아의 코앞까지 확하고 끌어당겨 졌다.

    "웃기지마 이 개새끼야! 사람 놀리려고 온 거냐?! 술 처마시고 있었던 건 안 보였냐?! 앙?! 굳이 그렇게 확인사살을 해야…! 흐윽! 씨발!"

    내 멱살을 잡은 앨리시아는 반대 손은 주먹을 꽉 쥐고 날 한 대 후려치려는 듯 들어 올리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중간부터 점점 목소리에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고, 앨리시아는 결국 주먹으로 날 후려치는 대신에 자신의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내팽개치듯이 내 멱살을 풀어준 후, 여전히 물기 어린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왜…왜 난 안 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역시나 앨리시아도 내가 지금까지 오는 여자를 안 막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에 살짝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전에 있었던 오해를 풀자마자 그렇게 희망에 찬 시선을 보냈던 거고 말이다.

    "앨리시아. 네가 문제 있는 게 아니야. 다만 난…."

    나는 그런 앨리시아의 어깨를 붙잡고, 드디어 미리 머릿속에 정리해놨던 말들을 앨리시아에게 할 수 있게 됐다.

    요약하자면, 네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기 때문에 네 마음은 받아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말이다.

    "…그러냐."

    그리고 내 말을 다 들은 앨리시아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너도 다른 놈들이랑 다를 바 없다는 거냐."

    아니. 다시 들어보니 차분해진 게 아니었다.

    다만 화낼 기력도 없을 정도로 풀이 죽었을 뿐이었다.

    "뭐? 그게 무슨…."

    "애초에 그럴 거면 기대하게 만들지를 말라고…."

    되물으며 다가가는 날 확 밀쳐내고, 앨리시아는 터덜터덜 침대에 돌아가서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기대하게 만들어? 그러고 보니 아까 술 취해서 혼자 떠들어댈 때도 그런 얘기를 했었지.

    하지만 내가? 앨리시아에게 그런 식으로 기대하게 만든 적이 있던가?

    "앨리시아. 미안. 사과할게. 그러니까 무슨 얘기인지 제대로 설명을…."

    "시끄러워! 속 시원하게 찼으면 빨리 꺼지라고!"

    하지만 앨리시아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불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대로 방을 나서면 그걸로 앨리시아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장이다.

    이기적인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앨리시아와의 우정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애들이 내 처음을 뺏어간 앨리시아를 그렇게 견제하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유지해온 우정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몇 안 되게 진심으로 우정을 느끼는 친구다.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

    "무, 뭣…?! 지, 지금 싫다고 했냐?"

    과연 지금 내 대응에는 앨리시아도 놀랐는지, 앨리시아는 이불을 박차고 나와서 다시 내 얼굴을 노려봤다.

    역시나 풀이 죽어도 그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이불 뒤집어쓰고 풀죽어있을 성격도 아니잖아.

    "그래! 너하고의 관계를 이대로 끝내다니! 절대 싫어!"

    "무, 무슨…! 너, 네가 지금 막 찼잖아, 이 미친 새끼야!"

    "네 사랑을 못 받아준다는 얘기지 친구사이까지 끊자는 얘기는 아니거든?!"

    "무, 무슨 이런 제멋대로인 새끼가…!"

    "내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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