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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남 구원
그런 고로, 텔레포트를 타고 길드로 올라온 나는 그 즉시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로 달려왔다.
혼자 올라온 내 모습을 보고 레이첼 누님이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잠깐 챙길 물건이 있어서 올라왔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렸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으에엣?!"
그리고 클랜 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해 적당히 인사를 던졌던 나였지만, 문지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어라? 설마 얼마 전에 봤던 그 문지기가 아닌 건가?
아니. 그야 문지기 일을 항상 같은 사람이 할 리는 없지만 말이야.
왠지 전에 봤던 그 얼굴이 맞는 것 같아서 적당히 찍어봤거든.
사람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거냐고?
그야 남자들을 육욕에 빠지게 해서 레벨을 올리는 클랜의 클랜원답게 이 문지기도 나름 미인소리를 들을만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그 뭐냐. 난 우리 애들 얼굴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순정남이니까. 다른 여자의 얼굴 같은 건 기억에 잘 안 남는다고 할까? 훗.
…뭐, 지금 이렇게 자화자찬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지만.
"어? 저번에 그 분 아니에요?"
"아, 아뇨!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내 기억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그럼 이 반응은 대체…아, 설마.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번에도 무수히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저번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저번과는 달리 새된 비명 같은 건 전혀 들려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숨을 죽이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설마…설마 앨리시아가 날 좋아하는 거, 그 삼인방뿐만이 아니라 클랜원 전체가 알고 있었던 거야?
앨리시아 걔는 대체 얼마나 티를 내고 다녔던 거야.
티를 낼 거면 차라리 내 앞에서 그렇게 내고 다닐 것이지.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문지기는 마치 경계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엿봤다.
"앨리시아를 만나러 왔는데요."
"용무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단 둘이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서…라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건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문지기가 숨을 크게 들이 삼켰다.
뭔가, 점점 이 클랜에서 앨리시아가 가지는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앨리시아의 연애사에 이렇게 많은 클랜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렇고, 걔 클랜에서 엄청 사랑받고 있구나.
확실히 욱하고 주먹부터 나가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털털한 성격이기도 하다.
같이 있으면 편한 성격이지. 그래서 나도 친하게 지낸 거고 말이야.
"흐읍!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문지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둥지둥 클랜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은 걸까? 삼인방의 얘기에 따르면, 앨리시아 걔 그때부터 계속 술에 빠져있다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이 지났다.
얼마나 오래 지났냐면, 슬슬 한 시간이 다 되어갈 정도로 지났다.
그냥 확 마음대로 들어가 버릴까?
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사라졌던 문지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앨리시아님과의 면담은 날을 달리하셔서 다시 방문해주시면…."
그리고 문지기가 들어갈 때 내가 했던 걱정은 멋지게도 적중했다.
진짜냐. 한 시간을 끌고도 대면 불가 판정을 내린 거냐.
하지만 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에이미와의 약속을 했다지만, 우리 애들이 나 빼고 아래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올라온 거다.
이대로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설 수는 없지.
"제가 직접 가서 상태를 확인해 봐도 될까요?"
"네?! 아, 아니. 그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문지기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앨리시아가 술취해서 망가진 모습을 내게 보여줄 수는 없다는 건가.
그 필사적인 모습에, 나는 다시금 앨리시아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걔가 지금 술에 취해서 그런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 그래도. 그게."
"절 마음대로 들여보내 준 건, 당신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제가 잘 말해둘 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클랜 하우스로의 입장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를 받아서 나는 다시 앨리시아의 방으로 가게 됐다.
얼마 전에는 내발로 도망쳐왔던 곳이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찾아오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방문 앞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오늘은 무슨 일이니?"
바로 아라크네 클랜 간부 중 최고의 색기를 자랑하는 누님. 루티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전에도 앨리시아가 날 유혹할 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그것 때문에 앨리시아가 날 유혹하는 게 클랜 단위로 면밀하게 계획된 함정이라는 내 오해에 박차가 가해졌던 거지만.
다 알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확실히 저번에 앨리시아가 날 유혹할 때, 앨리시아는 앨리시아답지 않았다.
아니. 물론 말투나 그런 부분까지 완전히 고쳐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남자를 몸으로 유혹하려 하고 있었다. 그 앨리시아가.
그 말은 즉, 누구한테 남자를 유혹하는 법이라도 듣고 따라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준 사람이, 바로 눈앞에 계시는 이 누님이란 얘기겠지.
걱정이 된 이 누님은 앨리시아가 잘 하는지 궁금해서 문 앞에서 상황을 슬쩍 엿봤던 거고 말이다.
뭐, 결과는 보신바와 같이 내 오해와 앨리시아의 어색한 유혹이 합쳐져서 대실패로 끝났지만.
그 모습을 전부 보신 이 누님은, 오늘도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걱정이 돼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잠깐. 앨리시아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흐응? 전에는 그런 식으로 도망갔으면서?"
역시 살짝 말투가 공격적이다.
이 누님은 내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 테니, 그야 이런 태도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사정을 모르고 보면 자기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를 그런 식으로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버리고 가버린 놈이 되는 거니까.
물론 그런 식으로 몸으로 유혹하려 하는 앨리시아의 방식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세계다. 게다가 우리는 둘 다 모험가다.
이런 세계에서도 가장 성적으로 개방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
어쩌면 그런 유혹 방식을 문제시하는 건 나 혼자뿐일지도.
"그때는 살짝 오해가 있었거든요. 오해도 풀고 사과도 할 겸 해서요."
"그것 말고 할 얘기는 없고?"
"그야 그것 말고도 당연히 할 말은 더 있죠. 물론 누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요."
앨리시아와 진지한 얘기를 할 거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엿보지 마라.
그런 의미를 담아서, 나는 누님의 까칠한 태도를 받아쳐줬다.
"…좋아."
그리고 그런 내 대답은 아무래도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루티아 누님은 그대로 몸을 살짝 옆으로 비껴서, 앨리시아의 방문을 열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해줬다.
"아가. 우리 앨리시아가 저래 봬도 꽤나 여린 구석이 있거든. 그러니까, 울리면 안 된다?"
물론 그래도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닌지, 내가 지나가는 타이밍을 노려서 그렇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두 팔로 내 몸을 감싸고, 부드럽게 몸을 밀착시키며 귓가에 속삭이듯이.
죄송한데, 그건 장담할 수 없겠는데요.
나는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서, 루티아 누님은 안겨올 때처럼 우아하게 내 몸에서 떨어졌다.
"앨리시아. 들어간다."
"젠자아앙! 내가! 내가 어디가 문제라고! 개새끼! 기대하게 만드는 말을 하지 말던가! 나쁜 새끼! 떠먹여줘도 못 먹는 고자새끼!"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진한 알콜 냄새와 함께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명백한 욕설들이 들려왔다.
저거 취해서 사람 들어온 것도 모르네.
방안의 꼴 역시도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술병은 늘어져있고, 중간 중간 던진 건지 깨진 술병마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꼴을 만든 장본인은, 책상에 반쯤 드러눕듯이 엎어져서는 술병 째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취한 건지, 앨리시아는 내가 들어가고 접근해도 전혀 눈치 채는 기색 없이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쪼다새끼. 섹스도 못하는 게 분명해. 병신새끼. 분명 넣기도 힘들 정도로 작아서…."
"아니. 크거든. 너도 봤잖아."
과연 마지막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가기 힘들어서, 나는 앨리시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그렇게 반박해줬다.
"앙? 어떤 새끼가 허락도 없…이…."
앨리시아는 힘없이 고개만을 돌려서 풀린 눈으로 날 쳐다보고 그렇게 말하다가, 점점 말끝을 흐리더니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야. 괜찮냐?"
내 부름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앨리시아였지만, 딱 하나 변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완전히 동공이 풀려있던 눈동자였다.
술에 취해 완전히 풀려져있던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면서 점점 초점을 찾아가더니, 그 눈동자에 완전히 내 모습이 인식됐다고 느낀 순간, 앨리시아의 손에 들려있던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히끅…!"
그리고 앨리시아는 뭔가 말하려는 듯 턱을 덜덜 떨더니,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너! 히끅! 너, 너어! 히끅! 구, 구원!"
"그래.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 구원이다."
그런 앨리시아의 반응이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앨리시아에게 그렇게 말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쿠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앨리시아가 파닥거리며 의자 째로 뒤로 넘어졌다.
"아, 아아, 아아아…!"
내가 자기 마음을 눈치 챘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앨리시아는 나동그라진 자세로 의미 불명의 신음을 흘려댔다.
"야. 괜찮…."
앨리시아의 몸이 고작 저런 걸로 상처를 입을 리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모습에 걱정이 된 나는 일단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는 것보다 빠르게, 앨리시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뒤로 나동그라진 자세에서 손목 스냅과 허리힘을 이용해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내게 달려온 거다.
마치 야수와도 같은 그 움직임에 미처 대응을 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앨리시아의 목적지는 내가 아니었다.
"보, 보지 마아아! 나, 나가! 나가아아!"
내 뒤편에 있던 문을 열고는 그대로 그 안쪽 방에 있던 침대로 다이빙한 앨리시아는, 이불로 전신을 완전히 뒤덮고는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니까 이대로 나가는 건 곤란한데."
"난 할 말 같은 거 없어! 무슨 일로 온 건데! 날 놀리려고 온 거냐?! 비웃으려고 온 거냐?!"
"넌 내가 그렇게 성격 나쁜 놈으로 보이는 거냐…. 아니거든. 그 일이라면 일단 사과하러 온 거야."
뭐, 할 말은 사과뿐만이 아니지만.
"……사, 사과?"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불을 덮고 있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파닥거리며 난리를 치던 앨리시아의 움직임이 우뚝하고 멈췄다.
"그래. 전에 그 일은…그때 내가 살짝 오해를 하고 있었거든."
"…오해라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내 말에 살짝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 건지, 앨리시아가 이불 사이로 배꼼 얼굴을 내밀었다.
"얘기하자면 꽤나 긴 얘기인데 말이야."
그렇게 운을 띄우고, 나는 삼인방에게 설명했던 그대로 다시 한 번 내 오해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내 설명을 다 들은 앨리시아의 반응은 이랬다.
"그런 오해를 했다고?! 그래서 내 유혹을 거절했다고?! 너 진짜 대가리 장식으로 달려있는 거 아니야?!"
드디어 이불을 박차고 나와서 벌떡 일어난 앨리시아는, 거의 내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와서는 그렇게 외쳤다.
"아니. 일단 머리를 썼으니까 그런 오해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데."
"머리를 썼으면 뭐해?! 제대로! 적절하게 써야지!"
앨리시아는 그런 오해로 자기 유혹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화가 나는 건지, 내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흔들면서 분통터진다는 듯이 외쳐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얘,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흔들고 있단 사실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앨리시아는 짜증스럽게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는…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홱하고 옆으로 돌려서 시선을 피했다.
"어, 어라? 잠깐. 잠깐만. 그렇다는 얘기는 난 아직 차인 게…."
"그래. 그 얘기 말인데."
"핫!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미안!"
앨리시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앨리시아에게 똑바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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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왜 다들 구원이 당연히 앨리시아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의아했어요.
앨리시아 얘기 바로 직전에 당장 다른 여자를 더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라고 떡밥을 뿌려댔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죠.
라고 후기에 쓰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 거렸는데, 작가 스스로 스포일러를 할 수는 없어서 간신히 참았네요.
겨우 쓸 수 있게 돼서 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