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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남 구원
아니. 뭐, 상관없지만 말이야.
만약 이걸로 누님이 내 여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약점 잡아서 강제로 그렇게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 테고.
그리고 난 언젠가 누님의 마음을 확실히 돌릴 자신이 있으니까.
원래 미인은 고생해서 얻어야 더 값지게 느껴지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난 아무 문제 없다고! 젠장!
"…고마워요."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그맣게 감사의 말을 속삭여주는 레이첼 누님을 보고 있자니 그 이상 밀어붙일 생각도 안 들었다.
"흥. 두고 보라고요. 언젠가 누님 스스로 제발 제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길게 볼 것도 없이, 이번에 던전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후훗. 그래요. 그러려면 우선 무사히 돌아오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그거야 아무 문제 없어요. 제가 누님을 여기 방치하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두고 보라고요. 반드시 아무 일 없이 돌아와 줄 테니까요."
"…읏! 네. 바, 반드시 그렇게 해주세요."
날 제대로 연하 취급하는 여유로운 누님으로 돌아온 레이첼 누님이었지만, 내가 별 생각 없이 던진 그 말에 다시 평정심이 깨진 모양이었다.
얼굴을 붉히고 가슴 한구석에서 벅차오르는 뭔가를 견디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누님을 보며, 나는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누님이 저렇게 감동받을 정도로 대단한 말을 했나?
솔직히 말해서 살짝 오글거리기만 할뿐 그다지 대단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그렇게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중에, 문득 스스로가 전에 했었던 가설이 떠올랐다.
누님이 과거에 던전에서 누군가를 잃었고, 그 떄문에 던전에서 아는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 가설 말이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한테 확인 차 물어본다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방금 내가 했던 그 말에 이런 표정을 짓게 되는 것도 납득이 됐다.
던전에서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 말이 누님이 무엇보다도 원하는 말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거다.
아니. 어쩌면 그런 간단한 설명으로 끝날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누님이 지금까지 계속 완고하게 내 여자가 되길 거부해왔던 것 역시, 그런 누님의 속사정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모험가이기 때문에. 언제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던전에 항상 드나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님은 내 여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거다.
전에 누님이 말했던, 내 주변에 여자가 많으니까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을지 어떨지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다던 그 말은 그냥 핑계로 한 말이고 말이다.
아니.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순전히 내 망상과 바람이 듬뿍 들어간 가정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가설은 아니다.
역시 제대로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굳이 빙빙 돌아서 디아나에게 물어볼 것 없이, 누님에게 직접.
"누님. 혹시…."
"앗, 아아! 구, 구원씨! 저기…!"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누님에게 말을 걸자, 누님도 뭔가를 느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내 뒤편을 가리켰다.
누님도 참. 요즘 그렇게 뻔한 방법으로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여간 임기응변은 엄청 약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뒤를 돌아 누님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해보는 나였다.
그리고 누님의 당황한 표정이 내가 진지한 말을 하려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내 뒤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라가 웬 모험가 하나와 싸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걸 싸우려고 한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이상한가.
사라가 모험가 하나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모험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저항다운 저항도 못하고 있었다.
응. 저건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거지 싸우는 게 아니지.
과연 용사님. 하여간 화나면 무서워 죽겠다니까.
"누님. 잠깐만 실례할게요!"
아무튼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사라를 말리기 위해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주변에서 다른 애들이, 심지어 레이아마저도 사라를 말리지 않고 있는 게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말리고 나서 자세한 사정을 듣자.
"사라. 잠깐! 스톱!"
"알았으면 헛소리 집어치우고 꺼지시죠."
"흐으윽! 네에…."
하지만 내가 말리려고 난입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가 다가오는 날 보고 이쯤 해두겠다는 표정으로 종료시킨 거지만.
야. 대체 뭔 말을 했기에 상대방이 울면서 물러나냐. 일단 저 사람도 모험가일거 아니야. 나름 터프하게 생활한 사람인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몰라.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면서 오더니 구원 욕을 하잖아."
내가 사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사라는 흥하고 콧방귀를 내뀌면서 짜증난다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과연. 내 욕을 듣고 화를 냈다는 건가. 그래서 다른 애들도 말리지 않은 거고.
흠. 흠. 과연. 과연. 역시 사라가 괜히 사람을 괴롭힐 리 없지.
애인 욕을 듣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하여간 귀엽…아니. 잠깐만. 내 욕이라고? 그거 설마….
"구체적으로 어떤 욕인데?"
"만나는 여자마다 외모에 점수를 매기고, 여자를 얼굴로만 평가한다든가. 우리도 그냥 예뻐서 데리고 다니는 거지, 사랑 같은 건 없을 거라든가. …생각해보니 여자를 얼굴로만 평가하는 건…."
여전히 화가 안 풀린 표정을 짓고 있던 사라였지만, 그래도 나랑 얘기를 하면서 슬슬 화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에는 농담으로 그런 말까지 해왔으니까.
…농담이지?
"아니거든 이것아! 잘 가다가 딴 길로 새지 마라!"
물론 내가 얼굴을 보는 건 맞아. 하지만 얼굴만 보는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굴을 볼 수밖에 없잖아.
깊게 알고 지내면서 성격을 파악하지 않는 한, 결국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외모밖에 없는 거니까.
난 지극히 평범한 거라고.
그리고 내가 우리 애들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외모가 절대 아니다.
아니. 물론 사라나 디아나, 레이아는 처음 만났을 때 외모를 보고 혹한 건 맞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처음 만났을 때 외모에 끌렸다는 거지,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 건 결코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실비아나 마틸다, 바넷사에 이르러서는 외모에 혹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니.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임자가 있는 몸이니 외모만 보고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안 했다는 거다.
내가 외모로만 얘들을 데리고 다니는 거였으면 실비아나 마틸다, 바넷사도 만나자마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별 수를 다 썼겠지.
레이첼 누님이야…뭐, 특이 케이스잖아. 특이 케이스.
어쩔 수 없잖아. 레이첼 누님은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난 절세미인이라고.
사라도 만나기 전에, 심지어 동정을 빼앗아간 앨리시아를 만나기도 전에 만난 미인이라고.
동정에 연애 경험 제로였던 당시의 나로선 혹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단 말이야.
그리고 사라나 다른 애들이랑 그런 관계가 된 이후로는, 레이첼 누님 상대로 엄한 생각도 안 했었고 말이야.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을 저지른 건데?"
역시나 사라도 농담으로 했던 말인지, 내 반박을 부정하려 하진 않았다.
대신 묘한 질문을 던져왔지만 말이다.
"왜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게 확정인 것처럼 말하냐."
"그야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상한 시선을 사방에서 받았었고, 구원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바로 구원 험담을 해온 거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아?"
뭐, 하긴 그런가. 얘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진짜로 이번엔 내가 뭔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고.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사정 설명을 하려 했던 나였지만, 도중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이거 설명하면, 괜히 레이첼 누님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거 아냐?
물론 레이첼 누님이 잘못한 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애들도 그걸 알면서도 레이첼 누님에게 핀잔을 주거나 할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이첼 누님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사실이다.
누님은 방금 전에 나한테도 미안해 죽으려고 하고 있었으니, 우리 애들까지 상황을 알게 되면 누님 스스로 더욱더 우리 애들한테 기를 못 펴고 살 거다.
안 그래도 누님은 지금 내 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니. 물론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다른 애들이랑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계속 파티에서 함께 해왔던 실비아나 마틸다, 저택에서 계속 함께 지냈던 바넷사와는 달리, 레이첼 누님과는 기껏해야 길드에서만 잠깐잠깐 얼굴을 마주친 사이인 거다.
게다가 정산과 같은 누님과 처리할 일은 전부 내가 담당하고 있으니, 더욱더 누님과 우리 애들이 대화할 기회는 없었다.
그나마 개미굴의 위치를 누님께 확인시켜 줄 때라든지, 3계층에서 모험가 파티를 구조했을 때라든지 중간 중간 잠깐씩 파티에 합류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말을 아예 안했다는 건 아니지만.
정리하자면 얼굴은 오래 알고 지내서 서먹서먹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고 할까.
물론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디아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레이첼 누님이 우리 애들한테 더 기를 못 펴고 살게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언젠가 레이첼 누님도 내 여자가 돼서, 다 같이 지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단지?"
"미안. 실은 내가 사고를 쳤어."
그런 고로, 나는 예정을 변경해서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기로 했다.
"거짓말 하지 말고."
물론 사라한테는 통하지 않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얘 진짜 독심술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 너 방금 전에는…."
"사실대로 말해."
…레이첼 누님. 약한 남자라 죄송합니다.
나는 결국 사실대로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흐응…."
그리고 사정을 전부 들은 사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레이첼 누님께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 어?! 쟤 설마?!
"야! 잠깐! 싸움은 안 돼! 레이첼 누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여자끼리 싸우는 꼴은 절대 못 봐! …그렇다고 흙을 넣지는 말고."
물론 나는 당장 사라 앞을 가로막으며 뜯어 말렸다.
마지막에 살짝 약해진 건, 그 뭐냐. 어쩔 수 없잖아. 상대는 사라라고.
"레이첼씨는 아직 구원 여자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날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라는, 툭 던지듯 내게 그렇게 말했다.
크흐흑. 이, 이 녀석! 그러니까 넌 왜 그렇게 잽을 날리는 것처럼 가볍게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거냐고!
그렇게 사라는 가볍게 날 무너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씨."
"네. 사라씨."
"잘했어요!"
그리고 사라가 내뱉은 말은, 내 예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말이었다.
…으, 응? 사라야? 너 지금 뭐라고?
"네, 네?"
레이첼 누님도 그런 사라의 말에는 당황한 건지,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역시 레이첼씨도 이 바람둥이랑 지내면서 저희 고생을 알게 된 모양이네요. 설마 이런 식으로 대처를 하다니. 이거라면 이 바람둥이의 바람기도 상당히 줄일 수 있겠어요!"
"그런 뜻이였냐아아아!"
"뭐야. 자기가 바람둥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너, 아무리 그래도, 일단 네 애인이 뒤에서 욕을 먹게 되는 거라고! 아, 레이첼 누님. 그렇다고 그게 누님 잘못이라는 건 아니고요."
약점을 찌르는 사라의 공격에, 나는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 안정시키듯, 뒤에서 다독거려주는 손이 있었다.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그러나. 여자를 외모로 평가한다는 소문 정도라면, 그렇게까지 심한 뒷담화도 아니지 않은가. 원래 유명인에게는 그런 뒷담화가 따르는 법일세. 위대한 대마법사인 이 몸마저도 그런 소문 한두 개쯤은 있을 정도니 말일세. 유명해지면 그만큼 질투하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라는 것일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너도 사라랑 똑같은 생각이었던 거냐!
어쩐지 사라가 레이첼 누님한테 가는데도 아무 말 않고 있더라니!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입으로 위대한 대마법사라고 하지 마라! 물론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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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 밤을 새고 생활 리듬을 고친 전 다시 태어났습니다.
마침 달도 새로워졌으니, 이제부턴 반드시 정시에 연재를!
이런 다짐은 오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요.